그동안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지난 1979년 부마민주항쟁의 고통을 간직한 당사자들의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
8일 부마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 따르면 그동안 문건에는 확인됐으나 구체적인 증언이나 증거가 부족해 진실 규명이 되지 못했던 일부 사건들의 사실관계가 확인됐다.
최근 규명된 사례를 보면 부산여대(현 신라대) 침묵 행진, 고 서회인 씨 사과탄 사건, 계엄군 전차-택시 충돌 사고, 경찰 폭행으로 고환이 터진 안승록 씨 등으로, 이 사건들은 군·검·경과 정부의 문건에 기록되거나 당시 상황을 기록한 책자에서 글로만 확인됐었지만 구체적인 증언과 당사자를 찾기에 이른 것이다.
먼저 부산여대 침묵 행진은 지난 1979년 10월 18일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일어난 첫 번째 대규모 시위로, 부산 전역에 군인이 배치된 상황에서 유신 독재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사안이다.
애초에는 '침묵 시위'라고 인식이 되어 있었으나 당일 참가자들의 진술을 어렵사리 확보하면서 침묵이 아니라 행진과 '유신 철폐'라는 구호가 울려 퍼진 분명한 항거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서회인 시 사건은 당시 동주여상(현 동주여고) 야간부 2학년이었던 그가 1979년 10월 17일 귀가하던 중 소형 최루탄에 얼굴을 맞아 침례병원(당시 동구 초량동)에서 치료를 받은 것으로, 부마항쟁을 취재한 조갑제 기자의 저작 '유고'에 '서혜인', 군 자료에는 '서해인'으로 이름이 오표기되어 있었다.
그의 진짜 이름과 당시의 기억은 지난 3월 서 씨 유족의 증언이 확보되면서 실체가 확인됐다. 유족들은 서 씨가 최루탄에 맞은 영향으로 폐를 다쳐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으며 지난 2000년 숨을 거둘 때에는 결핵까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유고'에 기록된 안승록 씨 사건도 당사자를 찾아내면서 피해 보상의 길이 열렸다. 당시 21살이었던 안 씨는 부산대학병원 앞 골목에서 시위자로 오인받아 경찰관들에게 붙잡혀 몽둥이로 난타를 당하다 한쪽 고환이 터졌다.
그는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보호실에 갇혔다가 뒤늦게 병원 치료를 받았고 '데모에 가담했으나 이를 뉘우치니 용서해달라'는 내용의 각서에 도장을 찍어주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전차-택시 충돌 사고는 군 기록상으로는 택시의 일방 과실로 군 탱크와 충돌했다고 적혀 있었으나 실상은 시야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탱크가 정차해있던 택시를 들이받으면서 생긴 사고로 승객 4명 사망이 아닌 부상자 2명에 그친 것으로 확인됐다.
차성환 부마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은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아직까지 많은 피해자들이 신고를 하지 않은 사례가 많다. 그 이유는 부마항쟁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것이 불이익으로 돌아올까 두려워하는 심리가 여전하다"며 "40여 년이 지난 과거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분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부마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진상조사 기간이 20대 국회에서 1년 연장되어 올해 연말까지이지만 담당 인력 부족과 진술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감안해 기간을 3년 이내로 연장하는 법안이 국회에 상정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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