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사라졌는가. 아니면 (다시) 도래했는가. 오늘날 세계무대에서 신을 둘러싼 담론은 뜨거운 논쟁주제다. 21세기 벽두에 일어난 9‧11 사건과 이후 전개된 전쟁정치, 최근 아프간 사태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도착과 폭력성 문제는 ‘신-담론(God-talk)’이 철학적 관심사일 뿐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도 시급히 다루어져야 할 사안임을 드러낸다. 국내로 시선을 돌려 보면,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코로나 시대에 새로운 방식으로 부상하고 있다.
신과 종교를 둘러싼 물음은 비단 공적 의제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개인적 실존에 관여한다. 특정 교파의 교리를 내면화하고 전파하는 이들뿐 아니라, 제도종교 참여에 소극적이거나 비판적이지만 여전히 그 언저리를 서성이는 이들, 특정 교리와 무관하게 ‘신적 현현’(에피파니) 체험으로 인해 초월적 신비의 감각을 탐색하는 이들,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해롭다고 적극적으로 설파하는 전투적 무신론자들, 종교 간 대화 없이는 종교 평화, 나아가 세계 평화도 없다고 호소하는 이들도 여기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방인 환대를 중심에 둔 신-담론을 제시한 철학자 리처드 카니의 <재신론(Anatheism)>[부제: ‘신 이후에 신으로의 귀환’(Returning To God After God)]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수 세기 동안 신을 둘러싼 무수한 갑론을박이 있었고 니체는 기어이 ‘신의 죽음’까지 선언했건만, 카니는 여전히 “성스러운 것들을 비판적으로 되찾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신과 종교를 다시 성찰한다(11쪽).
신의 부름과 인간의 응답에 대한 ‘반복’, ‘다시’ 도래하는 신을 말할 때, 그는 어떤 신을 말하고 있는가? 인류가 역사에서 종교를 명분 삼아 폭력을 조장해 온 경험 이후에도, 그러한 사태에 대한 ‘환멸’ 이후에도 여전히 신과 종교를 성찰하는 것이 가능한가? 카니는 세심하면서도 담대하게 그 ‘가능성’을 향한 여정에 발을 내딛는다. 그는 억압적인 신에 대한 환멸을 넘어 이방인을 환대하는 신을 발견하는 순례의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험난한 여정에는 지도, 나침반, 등불 같은 준비물이 필요하다. 카니는 비판적 항의, 예언적 상상, 성사적 실천을 말한다.
비판적 항의
가던 길을 계속 잘 찾아가는 능력이 아니라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긴 경로를 이탈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할 때가 있다. 김승희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물론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부수고 깨뜨리는 우상파괴적 힘이 필요한 때다.
가령 우리는 ‘군사화된 근대’(Militarized Modernity) 시기에 종교의 권력화와 맘몬화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지켜봤다. 정권과 공모한 종교권력은 불의한 사회구조를 정당화하고 병영사회 체제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어떤 이들은 군사주의 문화에 적극적으로 편승해 구성원들을 억눌렀다. 제 몸 부풀리기에 성공한 종교장사치들은 공공의 것을 사유화하면서 사람들을 희생물로 삼는 제의적 종교를 조장했다. 표면적으로는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가 전파되지만, 이는 사회에서 학대받고 억눌린 이들을 더욱 숨 막히게 하는 정치사회적 효과를 산출하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수틀린다’ 싶으면) 화해의 메시지를 철회하고 신의 ‘위대한 사명’을 명분삼아 타자를 악마화하면서 저주하는 경우 역시 적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내어 쫓기고 바깥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부서지는 모습을 짐짓 외면해도 여전히 ‘신앙심 좋은’ 이로 간주되는 구조를 마련했다. ‘승리주의/정복주의’ 종교 개념이 주조되는 과정에서 종교 지도자들과 대중들의 욕망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결합했다.
카니의 재신론 기획에서 비판적 항의는 여기에 개입한다. 타자를 향한 연민이 아닌 억압적 지배를 강조하는 신념 체계는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승리주의적‧교조주의적 유신론에 대한 해독제는 ‘무-신론적 모멘트’를 지나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의심의 도가니에서 솟아난다”(34쪽). 카니는 “가부장적 물신숭배에 대한 원초적 애착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신-담론에 대한 ‘무-신론적’ 비판을 통과해야 한다고 명토 박아 말한다(114쪽). “환멸의 무-신론적 순간을 지나치지 않고서는 재탄생의 재-신론적 순간도 있을 수 없다”(188쪽).
홀로코스트와 같은 참혹한 비극을 통과하면서, 카니는 근원적으로 신을 다시 상상하라며 도전한다. 재신론은 관례화된 주권적 통치자로서의 신에 대한 항의에서 출발한다. 그가 염두에 둔 신에는 “살인과 죽음의 몰록(몰렉)”이 있다(120쪽). 몰록은 어린아이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혐오스러운 인신공양과 관련된 종교의 신이다. 카니는 고대 종교의 신 몰록만이 아니라 통치자로서의 신과 신정론으로 변호되는 전통적 신 개념 일반을 버리기를 제안한다(106쪽). (권세 행사 방식에 대한 폭군과 성군의 차이를 주목하기보다) 주권적 통치자로서의 신 일반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천상의 권세를 지닌 모든 것의-신(Omni-God)”은 “아우슈비츠에서 교수대 밧줄에 달려 죽었다”(115쪽).
카니는 무고하게 죽은 어린아이의 비극에 충격을 받은 이반의 ‘반역’에 공명한다(119쪽). 이반은 찢겨 죽은 아이들이 “밑거름이 되어 누군가를 위한 미래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신적 섭리라면 그런 “고상한 조화 따위는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궁극적인 인류 행복을 위한 건축물이 아무리 멋들어지게 완성되더라도 여기에 가장 미약한 이의 보상받을 수 없는 눈물이 대가로 지불된다면, 자신은 “그저 입장권을 정중히 돌려” 보내고 “차라리 보상받지 못한 고통과 해소되지 못한 분노를 품은 채” 남겠다고 결의한 것이다(도스또예프스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상)>, 열린책들, 425-432쪽 참고). 2014년 봄,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들린, “나라가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은 그래선 안 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는 끔찍한 발언에 카니는 발본적인 비판을 가한다. “우리가 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 한 전부 모욕에 불과하다”(24쪽).
일그러진 우상이 깨어지는 순간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카니는 격변의 시대에 상호 결속된 집합 경험과 관여된 신-담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저마다 다른 사연으로 고통을 경험하는 내밀한 ‘영혼의 밤’의 문제를 다룬다. 누군가에겐 시대의 거대한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이 버겁게 다가오기도 한다. 투쟁을 주도하는 항의의 목소리는 고사하고, 자기 앞가림 하나도 못한다는 심정이나 현실에서 느끼는 자책감만으로도 힘겹다. 부조리한 자신의 삶을 보면서 자괴감은 깊어진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자기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꺼이꺼이 울음을 삼키는 소외를 경험하기도 한다. 암울함과 상실, ‘버림받은’ 시간이 깊어져 임계점에 도달하면서 마지못해 신에 대한 기존의 신념을 버리는 ‘무-신론’을 경험하기도 한다. 카니는 무신론 문제가 근본적으로 “신에게 대항하는 인식론적 논증의 문제”라기보다 “불안이나 포기” 같은 “상실과 고독의 선반성적 체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어느 시점에서 경험하는 실존적인 ‘영혼의 어두운 밤’에 관한 문제”라는 점에 동의한다. 비록 카니의 주관심이 “수동적 박탈이라기보다는 기권과 철회의 행위”에 있지만 말이다(12쪽).
표면적으로는 유신론과 무신론이 통약 불가능한 경합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카니는 이분법적 경계 이면, 혹은 심층의 상호 교류하는 운동을 탐문한다. 비판적 항의(‘무신론적 순간’)는 “맹목적인 신앙의 도약과 지혜로운 신앙 사이를 구별”하는 데 필수적이다. 곤혹스럽긴 하지만, 이러한 식별 작업과 비판적 항의를 통해서 우리는 “신이 자기들 편이라고 주장”하면서 “악랄한 잔학행위를 추진하기 위해 신의 목소리를 소환”하는 이들을 ‘파문’할 수 있다(94-97쪽). 열린 무-신론은 “유익한 소외의 순간”이다. 카니는 우리 시대에 “비판적이고 우상파괴적인 무신론에 다 같이 가담”함으로써, 무비판적으로 사유된 적대적인 “신에게 대항”하기를 촉구한다. 다시 “신-에게로 가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말이다(85쪽).
예언적 상상
이리저리 굽이치는 일에 휘말리다 방향감각을 잃은 채 ‘무지의 밤’을 보낸 이후에도 삶이 끝나기 전까지 시간 여정은 계속된다. 그 길에는 애초부터 신에 무관심한 이들도 있고, 한때는 사랑했던 ‘신’을 떠난 이들도 있다. 환멸감 속에서 신에 대한 논의를 끝장내려는 이들도 있고, 저항하고 원망하면서도 여전히 도래할 신을 찾는 이들도 있다. 카니는 “‘신’을 버리고도 여전히 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인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30쪽).
걷다 보면, 폐허에서 꽃이 피어나거나, 빈핍해 보이는 곳에서 은은한 빛살이 비치는 장면이 나타날 때가 있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빠져 있지만, 우리 중 일부는 별빛을 바라본다”고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카니는 예언적 상상으로 각성된 모멘트를 다룬다.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 “무지의 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누군가는 다시 “감히 거대한 도약을 감행”한다. 삶의 “가장 깊은 고통 속에서”조차 말이다(113쪽).
비판적 항의는 종종 예언적 상상과 얽히기도 한다. 분노와 저항 이면에서 희망하는 그림이 (확정된 형태는 아니지만) 내밀하게 자리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공포심을 조장하는 종교적 금기와 자기보존 욕망에 매몰된 종교적 도피를 비판하는 무-신론은 “파괴적인 동시에 해방적인” 진정한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것은 “종교가 지닌 불안정성과 유아적 의존성이라는 위장의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동시에 죄책감과 현실 도피를 넘어서는 “새로운 실존의 가능성을 발산”한다(137쪽).
다만 일부 근본주의적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의 비판 대상인 교조주의적 유신론자들만큼이나 폐쇄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착된 종교를 넘어서는 “긍정적 과잉은 무시”한 채 모든 영적 신앙을 “광신주의라는 한 가방 속에 욱여넣는 것” 역시 광신적이다(256, 284쪽). 카니는 비판적 항의를 통해 ‘식별’하는 일이나 도착된 종교 문법을 ‘파문’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다시-신(ana-theos)’을 상상한다.
오해는 금물이다. 카니가 제시하는 두 번째 긍정의 가능성은 “이전의 완전성의 상태로의 회귀”와 관계없다. 재신론은 ‘순수했던’ 황금시대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아니다(35쪽). 아울러 카니는 이반의 절규를 한순간도 잊지 않는다. 재신론은 “특수한 것들의 구실을 통해 최후의 총체성으로 펼쳐지는” 절대정신의 변증법이나 목적론을 거부한다(12쪽). 그것은 “유신론에서 무신론을 거쳐 최종목적으로 이행하는” 종합 혹은 ‘성취론’이 아니다. 재신론은 “완전한 기원과 종말” 모두에 저항한다(35쪽).
복고주의적 향수를 꿈꾸는 반동과 무관하고, 대문자 역사와 진보를 내세우는 필연적 목적론과도 상관없다면, 도대체 재신론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소문자”이며, “여기 있는 이들 중 가장 작은 자 안에 있는 성스러운 것을 다시 상상하고, 다시 상연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12쪽). 그것은 “뒤로의 ‘회상’”이 아닌 “앞을 향하는 ‘반복’”과 관여되어 있다(35쪽).
신의 사라짐 이후 다시 성스러움을 모색하는 자리는 자유로운 가능성의 공간이다. 재신론 기획에서 비판적 항의, 예언적 상상, 성사적 실천을 연결 짓는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각각의 모멘트에서 자유로운 선택 혹은 ‘내기[도박]’가 있을 뿐이다. 자유로운 결단 속에서, 재신론자는 개인적인 어둠의 터널과 사회적 참상 너머에서 생활세계를 다시 성스럽게 하는 ‘가능성’을 마음에 그린다. 그는 순례의 여정에서 비판적 항의와 예언적 상상에 헌신하면서, 일상생활의 성스러움을 회복하고자 한다. 평범한 일상에서 범상치 않은 특별함을 발견하는 “매일의 에피파니”를 꿈꾼다(154쪽).
철학과 문학을 횡단하면서, 카니는 성사적 삶의 지형을 탐색하고 매일의 에피파니를 상상한다. 그는 “살 안에서” 신적인 것을 회복하고 “초월로부터 세계의 몸의 중심에 오는 자기 비움”으로, “성사적 체화”를 해석하는 ‘살의 현상학’을 소개한다(163쪽). “신의 살이 매일 도래하는 일상적 육화”는 오랜 시간 정당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메를로-퐁티 이후 현대 현상학 전통은 “다시 ‘성사적 살’의 경험”을 되살려 내고 있다는 것이다(344쪽).
또한 카니는 조이스, 프루스트, 울프 같은 작가들의 ‘성사적 글쓰기’에 주목한다. 그는 소설들을 독해하면서, ‘감각의 성사성’을 부인하는 비우주적 신의 죽음에서부터 어떻게 “우주적 현현의 신”으로 다시 탄생하게 하는지를 보여 주는 미학을 스케치해 나간다(174쪽). 그렇게 작품에 옮겨진 언어 이면에 놓여 있는 다채로운 경험과 “작품이 이 경험 앞에 펼쳐놓은 세계와 그 시간성”을 선보인다(349쪽 참고). 이들 ‘세속’ 작가들은 “근원적으로 신비적인” 작품을 통해 성스러운 것과 범속한 것 사이를 횡단한다(179쪽). 가령 갈망과 관련해서, <율리시스> 작품은 우리가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과거를 앞으로 소환시키는 반복의 기적”과 마주하게 한다. “과거와 미래의 연대기적 시제”를 파열하고 “가로지르는 도치가 일어날 수 있는 은총의 순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186쪽). 이 작가들은 “범속한 것의 중심에 있는 매우 특별한 성스러움”을 목격했고, “사물에 대한 독특한 신비”에 사로잡혀 있었다(220쪽).
정해진 선로를 이탈하지 않고 익숙한 안전지대 안에서 맴돌면서 협애한 세계에 갇혀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려면 ‘상처받을 가능성이 있는’ 낯선 세계에 자신을 개방하고 경계를 횡단해야 한다. 카니는 문학 작품이 “나 자신과 나의 관계의 반향이자 타자들과 나의 관계의 반향”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텍스트 안에서, 텍스트 사이에서, 텍스트를 넘어서, 독자들은 등장인물과 이야기 안으로 스며들면서 “다른 실체로 변형”되는 ‘성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픽션 텍스트를 ‘낯선’ 방식으로 환영할 때 텍스트의 ‘말은 살이 되고’, 독자들은 “범속한 존재 안에서 성사적 의미를 회복”할 여지를 마련한다(218, 223, 346쪽 참조).
성사적 실천
비판적 항의와 예언적 상상으로 지핀 카니의 작업은 성사적 실천으로 이어진다. 그는 자유로운 결단 속에서 정치적 모험(‘내기’)을 단행할 것을 요청한다. “재신론은 언제나 마음을 정하는 도정에 있다”(306쪽). 카니는 고통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고통에 응답하는 실천을 통해 세계 안에서 성스러운 것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는 예언적 상상을 보완할 수 있는 “체화된 신성(embodied divinity)”에 주목하는데, “그것은 기다림의 메시아성과 우리 앞에 서 있는 육화한 이방인”을 서로 관여시키면서 양자를 결합하는 것이다(257쪽). 이는 “성스러운 육화의 현전”이라기보다 어떤 기대지평도 사라진 기다림으로서 “메시아적인 것”을 말한 데리다의 작업과 대비된다. 카니의 관점에서 데리다의 ‘메시아적 보편성’은 “살과 피를 가진 특이성”을 지닌 “일상의 에피파니”를 몰수하는 것처럼 보인다(124-125쪽).
카니에게 ‘이방인으로서의 신을 맞아들임’ 문제는 ‘말이 살이 되었음’을 증언하는 생생한 증인의 문제다. 재신론자들은 “모든 경계, 길모퉁이, 또는 문턱” 곳곳에서 내부인과 이방인이 서로 만나, “우리 가운데 있는 메시아의 문을” 여는 행동에 동참한다(258쪽). “급진적으로 들이닥치는 타인을 향해” 성사적 실천을 증언한 현대적 증인들 안에는 가톨릭일꾼운동에서 활동한 도로시 데이가 있다. 그녀는 새로운 자본주의 시뮬레이션 세계에서의 “탈-육화(ex-carnation)의 증가 경향에 대항하여, 동료 인간들의 신체적 안녕을 촉진하는, 존재하는 이들 중 가장 작은 자들로의 신적 육화(in-carnation)라는 메시지를 증언”했다(266쪽). 신적 육화의 메시지는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 전통 밖에서도 발견된다. 가령 간디 역시 “초월적 관조와 세상에서의 공적 행위”를 함께 염두에 두면서, “세상의 살로의 신성의 육화”를 증언했다(273, 276쪽). 카니는 다양한 종교적·세속적 원천들로부터 도출되는 “종교적 남용 이전에 항상 존재”했던 “낯설면서도 소중한” 이방인 환대의 신학을 전유하고 심화한다(286쪽 참조).
“세상 가운데 우리 앞에 서 있는 이방인 안의 신성”을 주목하자(278쪽). 카니의 핵심 메시지다. 이방인 환대를 향한 움직임을 위해 흔들림 없는 견결함과 옹골찬 품성만 요청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서로를 향한 개방은 때로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낙담하고 후회하는 가운데, 거절당하는 과정에서 초라해지고 괴로워하는 가운데, 불안함이 닥쳐와 서성거리는 가운데 이루어지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카니가 언급한 “경전을 횡단하는 독해”(103쪽)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한 가지 사례(엘리야의 여정)만 살펴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히브리 성서[열왕기]에서 엘리야는 당시 압제적인 지배 질서[정치-종교 동맹]에 맞서 우상타파적으로 항의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결기 있는 공적 면모 이면에 엘리야를 맞이하는 현실은 두려움과 초라함으로 가득했다. 이후에 아무도 없는 황량한 바위산 기슭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물어오는 음식으로 연명해야 했을 때. 마실 물이 떨어지자 땔감 줍는 과부를 찾아가 취식을 요청해야 했을 때. 자신이 머무는 집 여주인의 아들이 위독해진 상황, 그리고 마침내 싸늘하게 시든 아들을 부둥켜안고 부르짖어야 했을 때. 그때마다 엘리야의 몸 안에 새겨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까마귀는 바위산에 여분의 음식을 저장하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운반된 음식 안에는 상한 고기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음식 저장소 근처에 머물면서 먹을 만한 음식을 추려 보는 엘리야. 그마저도 없을 때는 다른 까마귀가 물어 오는 인근 저장소를 찾아 나서야 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허탕 치기를 반복하면서 음식을 섭취했을지도 모른다.
시냇물마저 말랐을 때 엘리야가 보냄 받은 장소는 시돈 땅. 그곳에서 만난 과부를 대하는 엘리야의 언행을 보면 그는 당당함을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의연하게 신적 돌보심과 약속을 신뢰하라는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엘리야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보냄 받은 예언자는 걸식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허약성을 배워야 했다. 그렇게 기적을 일으켰던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는 자신이 뭐라도 된 양 시혜를 베푸는 존재가 아님을 알아 갔다. 독불장군이 될 수 없음을, 그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배워 갔다.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혼돈을 마주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깊은 상처 속에서 중단할 수밖에 없는 외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반복되는 거절과 실패 속에서 마음이 상할 때도 있다. 만남을 생각해 본다. 그 시절 그렇게 깨어지는 경험이 없었다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쳤을 만남들이 있다. 각자에게 아프게 찾아온 사건들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신과 세계, 그리고 느슨하지만 우정 어린 만남. 이런 만남 안에는 웃음과 미소, 서로의 아픔을 끌어안는 그 무언가가 있다. 아직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연약한 우리는 그 안에서 상처를 주고받는다. 실패와 낙하를 반복한다. 그렇게 이웃됨의 의미를 확장해 가고, 인간됨의 의미를, 성스러움의 의미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배워 간다. “우리에게서 출발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간” 속에서 “낯설면서도 소중한”, 성스러움이 깃든 타자와 함께 여정을 지속한다(305쪽). 길은 계속된다.
[추신]
1. 다양한 분야를 횡단하면서, 신-담론을 이끌어 내는 <재신론> 은 여러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원래는 더 깊게 숙고할 부분도 함께 준비했지만, 분량 관계상 덜어 냈다. (덜어 낸 주제는 다음을 포함한다. 통치자로서의 신 개념에 대한 대안적 이해가능성[억압하고 수탈하는 폭군이 아닌, 약자와 이방인을 돌보고, 마땅히 지켜야 할 성스러움을 보존하는 존재로서의 성군]. 문화정치 맥락에서, 세속 헌법질서 안에서 특정 종파의 공동체적 실천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물음. 깊은 상흔의 경험과 그 여파로 향후 선택에 미치는 영향 등). 필요하다면, 향후 별도의 지면을 통해 다룰 예정이다.
2. <재신론>을 매개로 여러 상이한 독자군에서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를 희망한다. 이 책은 종교 간 대화뿐 아니라 문학과 종교, 종교와 정치, 철학과 신학 등 여러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다양한 분과 학문에서 다루어지는 표현들을 세심하게 번역하고 상세한 역자 주석을 제공해 준 번역자와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카니는 성숙한 대화를 위해 필요한 공동 자원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설익은 방식으로 차이를 은폐하거나 서둘러 봉합하려 들지 않는다.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라면, 배울 만한 이방인도, 자기 집으로 들여 환영할 외인도 없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차이를 환영하는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105쪽). 카니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들도 그의 도전을 진지하게 고려하면서 대화에 참여해 보기를 바란다.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치열하게 경합하는 공간이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