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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아들 독립운동가 윤현진, 100주년 추모 특별기획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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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아들 독립운동가 윤현진, 100주년 추모 특별기획전

오는 17일부터 12월 12일까지…독립운동 자료 대거 공개

경남 양산시립박물관이 윤현진 선생의 서거 100주년을 맞이해 오는 17일부터 12월 12일까지 약3개월 동안 윤현진 선생 추모 특별기획전을 연다.

‘대한의 빛을 비추다' 주제로 펼쳐지는 이번 특별기획전은 총 5부로 구성된다.

윤현진 선생의 일생을 통해 그가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는 구성으로  기획됐다.

▲양산시립박물관에 전시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단체사진(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윤현진 선생님).ⓒ양산시립박물관

신용철 시립박물관장은 이번 특별기획전에 대해 “윤현진 선생의 일생과 독립정신을 되돌아보고 추모하고자 이번 전시를 마련했다"며 “많은 시민들이 오셔서 전시실에서 들려오는 선생의 독립정신을 되새겨 보는 귀중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특별기획전 1부에서는 ‘윤현진과 가족들’로 윤현진 집안의 가계도, 결혼 등 집안의 가풍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

2부에서는 ‘근대학문을 배우다’로 유년시절 구명학교 입학부터 일본 메이지대학 입학 후 유학 시절의 독립운동 등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3부에서는 '국내외독립운동'라는 주제로 일본 귀국 후 민족정신 고취와 독립사상을 후배들에게 양성하기 위한 국내의 독립운동과 상해로 망명 후 초기임시정부 탄생을 위한 활동 등을 알린다.

4부에서는 ‘윤현진과 교류한 사람들’로 서예가 석재 서병오, 국회의장 신익희, 경주 최부자 최준 등과의 인연을 살펴본다.

마지막 5부에서는 윤현진 서거 후 양산춘추공원에서 거행된 추모식, 대전현충원 안장 등대한민국임시정부 최초 국장관련된 각종 자료를 소개한다.

▲양산시립박물관에 전시된 윤현진 선생님 훈장·훈장증.ⓒ프레시안(석동재)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메이지대학 조선학생동창회 명부(1942)'를 최초 공개해 윤현진의 메이지대학 졸업여부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한다.

또 윤현진 서거 후 자신의 땅을 담보로 독립운동자금을 대출했던 '조선시보(1923)'의 ‘부동산경매 매물목록’에서 토지금액과 규모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말 서화가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가 우산에게 직접 그려준 묵죽도와 2·8독립선언에 참여한 김철수가 윤현진을 기리기 위해 작성한 추념사도 최초 공개한다.

이들 자료는 향후 초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될 것이라는 양산시립박물관 측의 설명이다.

이외에도 지난 1959년께 양산 춘추공원 추모비 제막식 당시 불렀던 '추도가'에 곡을 붙여 특별전 개막식에 맞춰 양산시립합창단이 재현할 예정이다.

양산시립박물관는 이번 전시의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특별전과 연계해 어린이교육, 윤현진 유적 답사를 펼친다.

더불어 내달 8일 시립박물관 대강당에서 (사)양산항일독립기념회와 함께 “윤현진서거 100주년 기념 위한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다.

또한 시민참여를 통해 서훈등급 향상을 위한 서명운동도 벌인다.

양산시립박물관는 윤현진 서거일인 오는 17일 박물관 입구 야외에서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 방역수칙에 따라 40명 이내로 개막식을 가진다.

▲윤현진 선생 흉상.ⓒ양산시

양산출신인 윤현진은 자는 명구 호는 우산 이며, 일제강점기 상해임시정부(임정)에서 내무위원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7세때 만성제서숙에서 한학을 익히고 15세 때 구포의 사립학교인 구명학교을 졸업 후 1914년 도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해 김성수, 신익히, 송진우 등과 조선유학생 학우회와 조선광복동맹결사단을 조직해 항일눈동에 앞장섰다.

그후 그는 1916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양산으로 돌아와 대동청년단을 가입하면서 많은 독립투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이어 그는 1917년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해 후진을 양성했고 사재를 털어 경남은행을 창립해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윤현진은 경남은행 마산지점장 시절 3.1운동이 일어나자 마산에서 만세운동을 적극 지원했고 일본의 탄압을 피해 3월말 상해로 망명했다.

이후 김구, 안창호, 이시영, 이규식, 여운형, 신익희, 이승만 등과함께 대한 임정을 조직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됐다. 재무차장에 선임된 그는 임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위해 고향의 사재 30만원(현재 300억)을 헌납했다.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는 1921년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해 활동했고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해 중국과 함께 항일운동을 결의 하기도 했다.

이처럼 구국투쟁의 일선에서 활약했던 윤현진은 상하이에서 30세로 요절했다.

일본아사히신문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형극(荊棘)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으로 그의 사망은 임정패망이라고 논평했다.

임정부는 윤현진 공로를 높이 평가해 국장으로 치루고 상하이 정안사의 묘지에 안장했다. 양산에서는 1959년 국민의 이름으로 춘추공원에 기념비를 건립해 추모했으며, 그는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에 추서됐다. 유해는 1995년 대전국립묘지에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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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동재

경남취재본부 석동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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