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우리 사회의 주요 화두 중 하나가 기본소득이다. 갑자기 등장한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은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의 촉매제가 되었고 기존의 복지정책의 일상적 절실함을 새삼 자각하게 했다. 다가오는 20대 대선을 앞두고 이 화두는 예비후보 간 정책대결 및 언론에서 빈번하게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른 각종 산업의 자동화로 인간의 일자리는 감소하게 마련이고 인구의 증가에 따라 구태의연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고용불안과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결과적으로 개인 간 소득격차가 심화되어 부족한 소득을 보충하는 것은 저소득자층에게는 불가피한 실정이다. 그러나 이를 반드시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해결하는 것이 타당할까? 기본소득제는 사려 깊지 못한 면이 있다. 경제만이 아니라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저마다 생존 나아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물자가 필요하며 이를 구입하기 위해 소득이 필요하고 소득을 얻기 위해 일자리가 필요하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사회적 작동원리이다. 노동을 제공한 대가로 소득이 반대급부로 제공되기 때문에 일자리는 누구에게나 필수적이다. 일자리의 상실은 일상을 영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심하게는 개인에 따라 생존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대두될 수 있다. 생존권이 위협받을 정도가 일상화되면 이는 사회적으로는 인권의 문제로, 개인적으로는 생존과 자존심의 문제로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 개인의 능력이나 일자리를 찾으려는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진단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국가 차원에서 책임지고 풀어야 할 과제이다.
자본주의의 한계와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른 일자리 부족 현상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구조적으로 아무리 피하기 어려운 현상이라도 이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짊어지고 가야할 멍에가 아닐까? 일자리의 유무는 각자도생이나 복불복의 문제가 아니다. 당연히 동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구성원 모두가 일자리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 국가는 일자리를 국민들에게 제공할 책무가 있으며 국민들은 일할 권리이자 의무가 있다. 헌법에서도 노동권이 보장되는 이유이다. 일하고 싶은데도 일자리가 없어서 생존권이 위협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전시나 경제적 난국이 아닌 한 어떤 경우에도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적어도 생존을 위해 제도적으로 일자리가 제공되어야 한다. 이를 '기본일자리'라 칭하고 싶다. 오늘날 4차산업혁명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일자리 또한 지속적으로 진화되고 다양화되고 고도화될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이러한 추세에 맞춰 국민들에게 주도면밀한 직업교육을 시켜서 새로운 일자리에 대처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아이디어와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프랑스나 네덜란드 등 유럽의 국가들처럼 1일 근무시간 내지 주당 근무일 수를 탄력적으로 축소조정해서 일자리가 모든 국민들에게 공유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하고도 당연한 조치가 아닐까? 1일 8시간이 아니라 6~7시간 내지 4시간으로 또는 주 5일이 아니라 4일로 줄여서라도 일자리가 확보되고 공정하게 제공되는 것이 고용의 민주화를 기하는 길이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정의당 대선 예비후보 심상정 및 진보당 대선 후보 김재연은 주 4일제 실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사실 일자리가 줄더라도 자동화에 따라 생산량은 불변 내지 더욱 확대될 수도 있다. 개인별 근로시간 내지 근무일 수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비례해서 소득을 감소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며 감소되더라도 증세를 하고 확대된 조세수입으로 복지를 확대함으로써 감소된 소득은 보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복지확대 및 소득불평등의 완화란 측면에서 일석이조이며 매우 바람직한 대안이다. 물론 개인적 심신의 장애, 가정 사정 및 일시적 실업 상태로 일할 수 없을 때는 적절한 지원이 제공되어야 하며 이러한 조치는 기본소득이 아니라 복지의 차원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개념에서 추진되고 있는 '광주형 일자리'는 임금을 줄이고 복지의 확대적 공유를 통해 축소된 임금을 보충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미래지향적 일자리 정책 내지 복지정책으로 간주된다. 그 성공적 결과가 확인되면 전국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 제도는 국제사회에서 우리 제품의 가격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도 주효할 것으로 기대된다.
설사 농어민의 소득을 보충해주는 등 특수한 부문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더라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논제가 보편적이냐 선별적이냐의 문제이다. 사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소득 및 자산 불평등도가 가장 심한 나라들 중 하나이다. 화려한 거시적 통계에 기준하면 경제 선진국이라 할 수 있으나 복지 면에서는 후진국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 현상은 대한민국의 최대 적폐 중 하나로 이를 방기한 채 보편적 기본소득을 운운하는 것은 부적절도 모자라 비양심적이기까지 하다. 보편적 기본소득을 주장하려면 먼저 극심한 소득 및 자산 불평등을 인정하고 이를 어느 정도 해소한 후 먼 훗날에나 제도화되어야 한다. 분별없이 불로소득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기본소득을 무조건적 보편적으로 지급하는 것은 시기상조이자 사실상 포퓰리즘에 가깝다. 기본소득의 조기 도입은 오히려 우리 사회를 비생산적으로 변질시킬 수 있으며 노동의 가치가 경시되고 건강하고도 역동적 사회 조성에 반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혹자는 복지 내지 선별적 기본소득의 수혜 대상을 선정하는데 소요되는 행정비용 때문에 기본소득의 보편적 지급을 주장하기도 하나 중요한 것은 행정비용이 아니라 목적이기에 설득력이 없다. 더구나 우리나라처럼 발달된 IT/AI 시스템이라면 능히 해결할 수 있는 과제이다.
고소득자들에게는 많지도 않은 기본소득은 쌈짓돈이나 푼돈에 지나지 않으며 경기 진작에도 별 의미가 없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소액의 기본소득 정도는 사절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경제민주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한 태도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비정상적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일반적으로 천민자본주의는 물질이나 인간의 이기심에만 집착하여 공정한 경쟁, 개인의 창의성 발휘, 경제적 혁신, 일에 대한 헌신적인 노동윤리를 상실해 버린 타락된 자본주의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 결과 극심하게 중첩된 불평등, 경제력의 과도한 편중과 독점과 불로소득 등 불공정한 경제 행위, 복지의 빈곤과 반도덕적 과소비 문화가 혼재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실정상 이 지점에서 과연 기본소득과 복지 중 어느 편이 바람직한가를 보다 현실적, 양심적으로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단언컨대 복지가 훨씬 바람직한 것으로 판단된다. 세계 최대급의 불평등, 최고의 자살률, 최고의 노인빈곤율, 최저 출산율, GDP 대비 최대 대학등록금 등 '헬조선'을 대변하는 낯부끄러운 생존권 관련 통계들이 말해주듯 우리의 복지 사각지대는 우리 주변에 너무도 흔하게 널려있다. 이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 이러함에도 기본소득을 운운하는 것은 정책적 사치이다.
기본소득을 정부가 현금으로 지급하는 것보다 기본적으로 일자리가 주어지고 일을 통해 그 대가로 소득이 주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인간의 바람직한 삶의 방법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속에서 소속감과 연대감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심신의 건강상 유익하고 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이상적일 것이다. 노동은 만물의 영장인 존엄한 인간의 건강한 삶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어떤 사람은 일자리가 있어서 일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정부가 주는 기본소득에 의존하여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곤란하다. 혹평하자면, 마치 애완동물처럼 사는 것이 어찌 행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어떤 사람은 주인공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조연을, 어떤 사람은 단역을 맡는다는 것은, 그것도 혹자는 거의 일생을 그렇게 산다는 것은 반인륜적이요 비민주적이다. 이러한 현상을 방기하는 것은 무책임한 제도적 폭거이다. 여기에서 기본소득의 한계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본소득이라는 현금지원은 기존의 복지제도의 대체재가 될 수 없으며 기본소득과 상호 보완재로 작동해야 한다. 기본소득과 복지제도는 철학적으로도 다소 다른 차원과 의미를 갖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사회의 대원칙은 민주주의이다. 적어도 한 국가의 모든 국민은 공존 공유해야 한다. IT/AI의 발달에 따른 최악의 경우라도 이러한 기본적 원칙적 삶의 수단은 동일해야 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할 필요가 없을 때를 상상하기란 아직 까마득히 먼 훗날의 얘기이다. 평소의 복지정책을 노르딕 5개국 내지 OECD 평균 수준만으로라도 격상시키려면 우리도 사회적 대타협을 하고 불평등을 근원적으로 해소해야 한다. 대한민국에게 준비되지 않은 보편적 기본소득의 전면 시행은 구태의연한 불평등의 천민자본주의를 인정하고 방기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현재의 소득과 자산의 극심한 불평등의 대폭 축소는 보편적 기본소득제를 실시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필요조건이다. 기본소득보다 기본일자리가 인권과 평등의 정신에 더욱 복무한다고 할 수 있다. 기본일자리가 민주적 사회를 지향하는 보다 합리적 도덕적 방편이다.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최고로 귀히 여기는 인권적 보편적 가치관에서 볼 때, 현실적으로 보편적 기본소득보다는 선별적 기본소득이, 기본소득보다는 기본일자리가 더욱 우선시되며 결론적으로 기본일자리와 집중적 복지의 혼용이 최선이라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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