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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친생부모의 존재, 나는 '비밀 입양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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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친생부모의 존재, 나는 '비밀 입양인'입니다

[입양 당사자들이 바라는 입양제도] ① 입양을 통한 이익 추구 행위는 사라져야 한다

기고를 시작하며

입양은 어떤 일인가? 사회복지의 측면에서 보면 양육이 포기된 아동을 원가정을 대신하여 새로운 가정에서 양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아동 이익 최우선의 원칙' 중에서 최선책은 원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입양은 차선책으로 아동에게 양육 가정을 찾아준다는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입양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입양인, 친생부모, 입양부모, 즉 '입양삼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입양은 살아가는 일 자체이며, 입양인을 중심으로 이들은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 입양이 삶이기 때문에 그 안에 항상 좋은 것만도, 항상 나쁜 것만도 아닌, 희로애락이 모두 들어있다.

이번 연재는 '입양삼자'가 가슴 속에 담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내려고 한다. 이를 통해 알려지지 않은 입양의 도전적 측면과 어려움, 그것을 넘기 위한 노력과 제도적 필요성 등을 살펴보려 한다. 이 글들이 입양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국내입양인, 해외입양인, 입양을 보낸 친생부모, 입양부모, 양육미혼부모의 입장에서 경험하는 입양에 대한 글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나는 비밀 입양인이다. 나는 만1살에 입양이 됐다. 가난한 나의 친생부모는 나보다 2~3살 많은 누나를 부산으로 입양 보내고, 그 다음 날 나를 입양 보냈다고 한다. 나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 시골의 노부부에게 비밀 입양됐다. 친구들의 부모에 비해 나이가 많은 것이 약간은 부끄럽기는 했지만 나는 입양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두 분은 자신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나에게 보여줬고, 그 사랑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고, 주변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13살 이전까지 나는 입양사실을 몰랐다. 부모님의 철저한 비밀 유지 속에서 자랄 수 있었다.

중학교 1학년에 갑자기 맞닥뜨린 입양사실은 나를 우울하고 어두운 중2병의 말기를 심하게 겪는 아이로 변하게 했고, 어른들이 건네는 모든 말에 의심을 품게 했다. 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입양이라고 하는 사실과 연결지어 의미부여 하게 됐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 그 질문에, 내 스스로 그 답을 찾아야 했다, 나의 친어머니가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때 잠시 나를 보러 왔다가 쫓겨났다는 이야기를 기억해내고, 그 운동회의 모든 장면과 모든 참석자들의 얼굴을 기억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야 했다.

그런 혼란기를 거치면서 나는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스스로 포기하고 직업훈련소를 택했다. 나는 군대와도 같은 직업훈련소에서, 형들과 어른들의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험악한 환경에서 힘겨운 공장 노동을 하면서 얼마간 입양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공장 생활에서 한쪽 팔을 잃었고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다.

다시 공부해 대학을 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나는 입양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어느 날 어린 셋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러 멈추지 않았다. 감춰왔던 내 안의 입양과 관련된 고민들이 폭발했다. 나를 찾아야 했고 나의 흔적을 찾아야 했다. 어머니으로부터 어렵게 알아낸 조각난 몇 가지 이야기로 내가 태어났다는 동네를 찾았고, 젖은 눈으로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도서관을 찾아 과거의 흑백사진을 보며 나의 친생부모의 험난했을 법한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분노의 대상이었던 얼굴도 모르는 그들이 처음으로 안쓰럽다고 생각되었고,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2021년 여름 나는 내가 태어나고 1년을 살았던 그곳을 10년 만에 다시 찾았다. 10년 사이에 그 동네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고 젖은 눈으로 과거를 상상하며 헤매던 골목도, 허름한 집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새로운 길이 생겼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찾아 헤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위로를 주었던 추억의 흔적조차 이제 사라져가고 있다. 49년 전 'A'라는 사회적 존재인 태어났던 나는 1년을 그 존재로 살았고, 나머지 48년은 'B'라는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출생기록의 왜곡이나 출생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출생기록의 보존과 유지는 소중하다. 보존하지 못한 출생기록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출생기록을 알지 못하는 누군가는 그 삶이 다할 때까지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한 싸움을 이어갈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모든 아동은 원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우선시 돼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모든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그동안 우리 사회와 국가는 그 의무에 충실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정상가족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미혼부모의 아이들이 원가정에서 자라는 것에 대해 삐뚤어진 차별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미혼부모와 아동의 분리를 암묵적으로 조장하였다. 국가는 원가정에서 분리되어 보호받아야 하는 아동을 민간 기관의 임의적 처분에 맡겨두고 제대로 감독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동안 많은 당사자들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과거보다는 원가정을 보호하려는 노력과 미혼부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원가정에서 아이가 자라날 수 있도록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원가정에서 양육이 포기되는 아동은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이들에게 가정을 찾아주는 것 또한 국가와 사회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 의무를 실행하는 노력으로 2013년 입양특례법 전부 개정을 통하여 아동을 입양보내기 위해서는 친생부모가 의무적으로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는 조항을 넣어 나와 같이 친생부모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일을 막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또 입양의 최종판단을 가정법원에 맡김으로써 국가의 의무와 책임을 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입양업무는 입양기관이 하고 있다. 더 이상 민간입양기관이 입양업무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첫째, 입양기관은 입양을 통해 이익을 보고 있다. 우리나라 해외입양은 1950 ~ 60년대 우리나라에 복지라는 개념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전쟁고아와 혼혈아동의 복지를 위한 차원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1980년대에 연간 최대 9000명 가까이 해외입양을 보내면서 입양기관의 이익 산업이 됐다. 이제 입양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둘째, 현재까지 입양기관은 아동을 입양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 입양 이후 입양인의 안전 문제는 소홀했다. 해외입양인이 해당국가의 국적을 제대로 취득했는지를 확인하지 않아 약 2만 명의 해외입양인이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 추방당하기도 했다. 2021년 양천 입양아동 학대 사망 사건이나 화성 입양아동 학대 사망 사건과 같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어도 입양기관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이들은 입양을 보내는 기술자들이지 친생부모, 입양인, 입양부모를 세심히 살피는 입양전문가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공적 책임하에서 공적기관이 입양업무를 직접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2013년 입양특례법 개정 이전에 진행된 모든 입양에 대한 과거사 정리가 이뤄져야 한다. 과거사 정리의 최우선의 과제는 모든 입양인에게 자신의 기록에 대한 열람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입양인이 입양기관에 자신의 입양관련 자료를 요청할 경우, 제한된 자료만을 주는 경우가 많고 이마저도 받기 어렵다. 각 입양기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입양기록은 모두 국가기관으로 이관돼야 하며, 국가 기관은 입양인의 요청이 있을 때 원본 형태로 제공해야 한다. 이 기록은 입양인 본인의 것이지 입양기관이나 국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불법적인 입양관행에 대한 조사와 연구도 필요하다. 실종아동을 부모가 없는 아이로 둔갑시켜 해외입양을 보내지는 않았는지, 친생부모의 동의 없이 가족들에 의해서 강제로 입양을 보내지는 않았는지, 입양 후 입양인들이 잘 살고 있는지를 제대로 살폈는지 등을 확인해야 한다. 이는 누군가를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과거의 오류를 조사하고, 그 당사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과거사 정리는 국가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지금까지 방임하고 있었던 국가부터 나서서 반성하고 미래를 위해 올바른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입양특례법을 개정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번 법안에는 나의 소망이 잘 담겨져서 "아동 최우선 이익의 원칙"이 잘 실현되었으면 한다. 2019년 중앙입양원이 '아동권리보장원'으로 확대 개편됐다. 아동을 위한 행정이 아직은 어설프지만 이런 노력이 그나마 다행스럽다. 법안이 개정되어 조만간 그 결과로 아동 최선의 이익이 우리사회에 빠르게 자리잡기를 희망한다. 

"아동 최선의 이익"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지금의 어른들이 무엇을 해야 할까? 국제적인 차원에서 아동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있다. 한국은 유엔아동권리협약에는 가입했지만,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엔 가입하지 못했다. 가입하기 위한 전제 조건(중앙정부나 지방정부 등 공적 기관에서 입양 과정을 책임져야 한다)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이런 국제협약에서 명시하고 있는 사항을 준수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그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 아닐까 생각한다.

▲ 1950년대 홀트씨양자회가 마련한 전세기를 타고 미국으로 이동하는 입양 대상 아동들. 100명이 넘는 아동들을 한꺼번에 이송하기 위해 종이로 만들어진 박스에 아이들을 태워 보냈다. ⓒ홀트아동복지회 5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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