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6일(월) 서울 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에서는 이국땅에 유배된채 평생 독립운동과 한반도 평화통일, 반독재 운동에 헌신해 한국 현대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한 독립애국 지사의 특별한 추모식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시절 18살 때 고향 땅을 떠나 미국에서 언론을 통한 조선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해방 뒤에는 민족자주론에 입각해 중립화 통일운동을 펼치고, 60년대에는 남북지도자에게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담은 공개서한을 여러차례 보내 남북한 평화공존 방안을 모색한 귀암(歸庵) 김용중(1898~1975) 선생.
서거 25년만인 2000년에야 뒤늦게 독립유동자(건국훈장 애족장)로 서훈된 선생의 업적과 얼을 기리기 위해 서훈 22년만에 열리는 첫 추모식이다. 귀암김용중선생 기념사업회쪽은 코로나 19 상황이 엄중해짐에 따라 극소수 관계자만을 초청한 가운데 조촐하게 첫 추모식 행사를 열기로 했다.
귀암은 박정희의 3선개헌 반대투쟁에도 앞장서 미국에서 '한국민족자주통일촉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결정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는 바람에 18살 고향 금산을 떠난 뒤 78살을 일기로 1975년 9월6일 타계한 뒤에도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고국의 비무장지대에 내 뼛가루를 뿌려달라. 한반도의 수호신이 되어 조국 땅이 다시는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게 하겠다"는 유언도 당연히 오랜세월 실현되지 못했다. '암자(고향)로 돌아간다'는 뜻의 아호에도 선생의 절절한 염원이 담겨 있는 듯하다.
재미 독립운동사 및 민주화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인 김용중 선생의 업적은 여전히 국내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나마 그의 이름이 알려져 서훈을 받기까지에는 그 후손의 30년 넘게 지속된 집념어린 '김용중 알리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귀암 김용중선생 기념사업회 김성희(78) 이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김용중 선생이 국내 언론에 본격 알려지는 계기가 됐던 <한겨레신문> 1990년 9월14일치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김용중편 기사도 사실상 선생의 외손녀인 김씨의 작품이었다.
김씨는 송건호 당시 한겨레신문 사장을 찾아가 할어버지에 대한 관심과 취재를 부탁하자 송 사장은 "내가 존경하는 분이 김용중 선생이다. 유가족이 찾지못해 아쉬웠는데 손녀가 나타나니 너무 반갑다"고 반색을 표시하며 취재지시를 내렸다. 해방정국 현대사에 정통했던 언론인 송 사장은 김용중 선생이 당시 <한겨레>에 연재중인 '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에 실릴 인물로 손색없는 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였던 필자는 당시 김씨가 당시 수집한 김용중 관련 신문스크랩, 그가 발간했던 월간 영자신문 <보이스 오브 코리아> 등 자료와 관련자의 증언 등을 토대로 김용중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을 재구성했다. 필자는 지난 8월 25일 21년만에 김씨를 다시 만났다. 2000년 기념사업회 관련 일로 시내 출입처 지하 카페에서 잠깐 만난 것에 이어 31년에 걸쳐 세 번째 만남이었다.
필자는 지난해 9월말 한겨레를 정년 퇴직해 비록 현직 언론인 신분은 아니지만 귀암 선생의 첫 추모식 행사를 모른체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할아버지 알리기에 인생을 건 김성희 이사장의 남다른 의지도 알리고 싶었다. 때론 개인적 불행과 어려운 형편에 부닥쳐 할아버지 알리기 활동이 중지된 시기는 있었지만, 30년 넘게 그 활동이 면면히 이어진 것은 단순히 귀암의 외손녀라는 친족관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굴의 시간’이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로 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 이사장은 개인적 아픔을 떨쳐 일어선 참이었다.
4년전 할아버지 알리기 활동의 소중한 동반자이었던 외동딸 임세연씨를 48살의 이른 나이에 혈액암으로 잃었다. 임세연씨는 한국유기견연합회 회장으로 버려진 개 수천마리를 간호하고 돌보는 동물사랑 운동을 실천하다 정작 본인의 몸은 돌보지못한채 병마에 쓰러진 것이다.
"딸이 죽은 뒤 다 포기한 상태였어요. 정신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요. 딸이 영어학원을 하면서 재정적으로도 많이 도와줬어요. 딸은 동물이든 사람이든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전자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도 딸에게 많이 의지했고요." 그러면서 그는 인터뷰 현장에 동석한 이를 가르키며 "집안 조카가 딸 대신 뒷바라지를 해줘 많은 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말이 있듯이, 딸 죽은 것만 애통해 할 시간이 없어요."
김씨가 1989년부터 3년간 미국 전역을 다니며 귀암의 활동을 증언해줄 수 있는 재미인사들을 찾아다니고 관련 각종 자료를 발굴하는 등 '맨땅에 헤딩하기'식으로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로스앤젤레스, 워싱턴 등 미국 전역을 헤맬 때마다 딸이 동반했다.
그가 낯설고 물선 이국 땅으로 할아버지의 행적을 찾아 나서겠다고 하자 미국 유학파였던 남편 임익빈(1937~1999)씨는 "미국이 얼마나 큰 나라인줄 아느냐.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게 낫겠다"며 처음에는 부인과 딸의 미국행을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가 김용중 선생의 외동딸이었던 어머니의 가슴앓이와 할머니의 한을 너무도 잘 알기에 학자도 정치인도 아니지만 적극 나서지 않을 수 없었어요."
1980년대말 귀암을 많이 취재했던 동아일보의 사장을 찾아갔더니 "국내에 김용중 선생 유가족이 있습니까"라고 반색하며 워싱턴 미국 국회도서관 한국문제연구소 직원인 양기백 박사를 찾아가라며 귀뜸했다. 양 박사는 김씨를 만나자마자 "살아계실 때 오지 왜 이제 오느냐"며 자기집에서 몇 개월 머물게 하며 자료수집을 도와줬다고 한다. 양 박사는 부인에게 김성희씨를 소개하며 "귀한 분을 모시고 왔다. 김용중 선생님이 대통령이 됐다면 우리나라에도 벌써 통일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용중 선생이 김일성 주석에게 보낸 편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나중에 선생의 유해를 보관했던 재미음악가 로광욱 박사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귀암은 다른 독립운동가와 달리 사업에도 수완을 발휘, 축적한 재력을 바탕으로 조국의 가족들에게도 적지 않은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용중은 복숭아와 자두를 접붙인 렉트린이라는 과일을 재배해 큰 돈을 벌게 되고, 이 돈으로 캘리포니아 다뉴바라는 곳에 농장을 마련해 큰 경제적 기반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발굴 한국현대사인물-김용중편' 기사 중 고 손보기 단국대 교수 증언)
또한 미국행을 도왔던 고향선배 송철과 청과물도매상을 하면서 재력을 불려나간 선생은 고향에 남은 부인 김현성 앞으로 정기적으로 적지 않은 돈을 보냈다. 이 덕분에 딸 김영보는 도쿄 유학를 마치고 고향에서 금산여중고를 설립해 교장선생님으로 오랫동안 교육계에 몸담았다. 그러니까 강보에 쌓인채 헤어져 얼굴도 보지못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한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된다.
"제가 할아버지 기념사업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어머니 덕분이에요. 어머니는 김용중 선생을 알리는 데 여기저기 돈을 받지 말라며 적지않은 돈을 물려주셨어요."
김 이사장은 기념사업회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46년 동안 운영해왔던 예원유치원을 처분해 운영자금을 추가로 마련했다.
김씨의 남편 임익빈씨도 김용중 알리기의 숨은 주역이다. 남편은 살던 집을 팔아서 3년간 부인과 딸의 미국 체류 및 자료 수집 경비로 사용하도록 힘을 보탰다고 한다.
그는 또 부인의 도미행 직전에 "김용중 선생의 손녀, 남편 임익빈 경기고 52회 졸업, 서울대 15회 졸업"이라고 쓴 용지 여러장을 건네주며 미국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명함 대신 나눠주라고 권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 투박한 용지가 김용중 선생의 서훈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91년 남편의 고교 동창인 안영주라는 분이 용지를 보고 연락해왔어요. 할아버지의 모든 자료가 그가 수학했던 콜롬비아대학교에 기증돼 있다고 내용을 알려주었어요. 그래서 콜롬비아대학교에서 김용중 관련자료를 담당하고 있던 이혜경 박사가 관련자료를 다 복사해서 보훈처에 제공했어요."
전달된 자료중에는 61년 남북 최고지도자에게 보낸 편지도 포함돼 있는데 그 내용으로 인해 '친북인사‘라는 낙인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고 김씨는 주장했다.
"할아버지는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는 나는 공산주의가 아니다. 민족주의자이다. 남과 북이 전쟁으로 가는 통일은 옳지 않다."
1996년 한호석 미주평화통일연구소장이 발표한 '김용중의 민족자주 통일운동’이란 논문에 따르면 김용중의 통일론에서 가장 중요한 결산은 그가 1964년 11월12일 남북의 최고 지도자들에게 보낸 제2차 공개서한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김용중 선생의 2차 서한은 유엔이나 비동맹국가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하고 통일위원회 구성을 제의해 민족 자주적인 성격을 명확하게 했다는 점과,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군축 조처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 정치군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전단계로서 남북 사이의 비정치적 교류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을 이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점이라고 한 소장은 평가했다.
귀암이 재미 독립운동사의 거목으로 우뚝 서기까지는 김씨 집안의 또다른 여성 김현성의 헌신과 희생을 빼놓을 수 없다. 충남 금산 출신인 귀암은 15살 때에 한 살 위인 김현성과 결혼했다. 그는 백일을 갓 지난 어린 딸과 19살의 어린 부인을 남겨둔채 1916년 10월 18살 때 집안 어른들에게 "서울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훌쩍 집을 떠났다. 부인 김현성은 남편에게서 이미 "독립운동하러 간다. 집안을 부탁한다"는 당부의 말을 듣고 조용히 남편의 뒤안길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 이후 두 사람은 다시는 생전에 해후하지 못했다.
김용중은 상하이에서 1년을 보낸 뒤 1917년 미국에 있던 고향 선배 송철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얼마 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트레지노라는, 당시 조선이주민 1세들이 많이 살던 곳에 자리를 잡는다. 오렌지 농업이 발달돼 있던 그곳에 벼농장이 생겨 조선사람 2천 여명이 일자리를 얻었는데, 그도 이곳에서 하루 16시간씩 일하면서 조선인을 상대로 '한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곳에서 그는 김형군, 김원용, 김호 등 당시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조선이주민 1세들을 만나 경제적 도움을 받아 일을 해가며 하버드 대학, 남가주 대학, 조지워싱턴 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나중에 그가 언론 등을 통해 유창한 영어와 수준높은 문장력을 구사하며 일제의 학정을 고발하고 방송연설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국내 명문대에서 쌓은 학업 덕분이었다. 그가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도 대학공부까지 할 수 있었던 데는 "너는 똑똑하니까 공부를 열심히해 우리나라 독립에 기여하라"는 도산 안창호의 당부가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5년 9월6일 선생이 이역 만리 땅에서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잿가루를 조국의 3.8선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타계했으나 그의 소원은 1990년대 말에야 이뤄졌다. 미국에 교환교수로 나가 있던 여동생 김성옥씨 등이 유해를 국내에 들여와 일부를 비무장지대와 임진강에 뿌리고 나머지는 부인 김현성의 유해와 합장했다. 나라를 빼앗긴 탓에 10대에 헤어져야 했던 부부는 80여년 만인 백골이 진토되어 해후한 것이다. 고향 금산 선산에 합장된 부부의 유해는 1999년 12월27일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김용중 부부가 생전에 만날 기회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귀암은 1947년 6월16일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의 조국 땅을 31년만에 밟았다.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 등을 만나 극심한 좌우대립속 난마처럼 얽힌 시국을 풀어갈 해법을 논의했다. 고향 금산에 남아 있는 아내 김현성도 만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7월19일 몽양이 귀암을 만나고 돌아가던 차 안에서 흉탄에 맞아 암살된 뒤 "다음은 선생님 차례입니다"라는 암살범의 위협을 받은 끝에 미처 부인과 재회하지 못한채 쫒기듯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김씨가 어머니 김영보에게 들은 말이라고 했다.
귀암은 7월22일 "여운형 선생은 오늘날 조선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며 우리 인민의 벗이었습니다. 이런 지도자를 잃은 것은 우리 민족과 국가의 막대한 손실입니다"라는 메시지를 기자들에게 남기고 김포공항을 떠났다. 정적 제거를 위한 암살이 난무하는 좌우의 극심한 혼란이 계속되던 해방정국에서 어느 한쪽에 크게 쏠리지 않은 중도파 민족주의자가 끼어들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채 이국땅으로 쓸쓸히 재망명 길에 오른 것이다.
귀암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서 그로부터 민족주의에 눈을 뜨게 됐다.('발굴 한국 현대사인물' 기사 중 재미언론 <신한민보> 발행인 김운하씨 증언) 귀암은 귀국 전인 1945년 9월부터 1946년 12월까지 몽양에게 네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몽양에 대한 존경심과 해방정국의 혼란상을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민족자주 정신에 입각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제시했다.
무주의 유명한 한학자의 딸이었던 귀암의 부인 김현성은 상하이를 거쳐 미국에 건너간 남편과 소식을 주고받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등 현명한 신여성이었다고 김성희씨는 전했다. 또한 딸은 물론 조카까지 일본유학 시키고 시동생(귀암 남동생)의 방탕한 생활로 날려버린 남편의 생가를 경매를 통해 되찾는 등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대들보 노릇까지 했다.
"미국에서 20여년 동안 홀로지내며 경제적 기반을 다진 김용중 선생은 할머니에게 미국으로 건너오라고 했대요. 그러나 할머니는 집안 식구들을 건사하느라 남편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결국 귀암은 1934년 4월2일 메리안 김이라는 여성과 현지에서 동거를 시작하게 됐을 때에도 김현성은 "내 걱정하지 말고 메리언과 살며서 독립운동에 이바지하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미안한 마음에서 '당신도 금산집 다 버리고 개가하라'고 했는데 할머니는 끝까지 금산 생가를 지켰어요. 생각하면 할머니가 너무 안쓰럽고 불쌍해요. 할머니의 유일한 낙이 우리 4남매에게 맛있는 것 먹이고 사랑해주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볍씨를 얻으러오면 다 퍼줄 정도로 인자한 분이었어요."
김씨는 "할머니는 오늘 김용중 선생을 만든 숨은 히로인"이라고 평가했다.
김 이사장에게는 독립운동가 외할아버지말고도 민주화 운동가 남편과 독립운동가 시아주버니도 있다. 지금은 그들의 활동과 업적이 어느정도 보상으로 돌아왔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손녀이자,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실직자의 아내라는 만만찮은 세월을 견뎌야 했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 졸업 뒤 미국 오레곤대학에서 유학까지한 남편 임익빈씨는 1968년 대한재보험공사에 입사해 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국내재보험 업무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꼽힌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을 반기를 들고 비판하다 입사 7년만에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쫒겨났다. "실직 끝에 삶을 자포자기 하다시피한 끝에 화병(심근경색증)을 얻은" 그는 62살의 이른 나이로 숨졌다. 부인 김성희씨는 남편의 전 직장 동료 등을 상대로 남편의 해직이 민주화운동과 관련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2012년 2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로부터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
남편 임익빈의 형인 시아주버니 임원빈(1923~1945) 선생도 그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임원빈 선생은 경기중학교 5학년 때인 1940년 11월3일 조선인해방투쟁동맹(CHT)이란 비밀결사 조직을 송택영 선생 등 15명과 함께 결성해 체포돼 고문을 받은 끝에 정신병을 얻어 해방을 4개월 앞둔 1945년 4월6일 타계했다.
김씨는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뒤 1974년 서울에서 예원유치원을 설립해 가계의 살림을 도맡아 꾸리다 할아버지 알리기 일에 뛰어든 뒤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47살의 늦은 나이에 숭실대 통일정책대학원에서 3년간 국제정치와 남북관계를 공부했다. 학교당국은 학부의 전공 때문에 입학원서도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김용중 선생의 손녀라는 점과 공부에 대한 열의를 강조해 어렵게 합격했다고 한다. 또한 대학원생 60명중 유일하게 여성이었던 김씨는 정책대학원 학생회장에 출마해서 "전쟁이 일어나면 어머니와 아이들이 가장 피해를 보지 않느냐. 남북 문제에 대해서도 어머니들이 참여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연설해 1표 차이로 학생회장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는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은 할아버지를 닮았나봐요"라며 웃었다. 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임진각에서 통일음악회를 여는 게 그의 꿈이다.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 할아버지의 뼛가루가 뿌려진 임진각에서 할아버지가 사주신 피아노로 음악공부를 한 제가 통일음악회를 여는 것은 운명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6.25 때 전쟁 70주년을 기념해서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때문에 무기한 연기되면서 그의 소망은 더 커진 듯 하다.
그는 음악 전공을 살려서 순국선열기념사업회 산하 대한독립군가선양회 합창단의 지휘자로 4년간 활동한 바 있다. 또한 2000년 이후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로도 재직중이며, 평통자문위원, 동북아평화재단 이사(미국 화와이 소재) 등 국내외 굵직한 독립운동 및 평화 관련 단체의 직책을 맡고 있다.
"단체 일을 하면서 독립 유공자의 후손들이 많이 배우지 못해 참 어렵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런 면에선 저는 참 행운아인 셈이죠. 할아버지 덕분에 음악도 전공하고...그래서 제가 아파도 슬픔에 겨워 있을 새가 없어요."
남편의 실직과 이른 사망, 딸의 돌연한 사망 등 잇따른 개인적 불행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랫동안 준비한 할아버지의 첫 추모식을 여는 김 이사장의 목소리에는 여든에 가까운 나이가 무색하게 에너지가 넘쳐났다.
애국지사 김용중 선생 약력
-1989년 3월2일 충남 금산에서 태어남
-1913년 김현성과 결혼
-1916년 딸 김영보 태어남
-1916년 10월 상하이로 출국 뒤 여운형고 만남
-1917년 여운형이 도움으로 도미
-1920~1930년 고학으로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조지워싱턴대, 남가주대학에서 수학. ''너눈 똑똑하니까 공부열심히 해서 우리나라 독립에 기여하라‘’는 도산 안창호의 가르침에 큰 힘이 됐다고 함.
-1927년 고향선배인 송철과 과일 위탁상 시작
-1928년 <보스턴선데이> 의견광고란에 일본의 조선강탈을 비판하는 글을 실음
-1939년 1월 미주사회의 사회지도자로 첫 등장
-1939~1940년 일본으로 송환될 한인 유학생들을 미국 상하원에 청원해 구해냄
-1940년 한국광복군의 조직을 대내외에알림
-1941년 4월20일 재미 한족위원회의 6인의 임시위원 및 선전과장이 됨
-1941년 12월 워싱턴에서 선전, 홍보활동 개시
-1943년 9월 한국사정사를 워싱턴에 설치함
-1943년 11월22일 반영자신문인 <한국의 소리>(The Voice Of KOrea) 간행
-1944~1945년 해방전까지 재미한족연합회의 선전부장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선전활동
-1947년 6월16일 31년만에 조국 방문
-1947년 여운형의 암살, 살해위협으로 출국
-1948년 5월 한국의 중립화통일방안 첫 제시
-1950년 5월 유엔사무총장에게 다시 한국 중립통일방안 제시하며 한국전쟁 발발 경고
-1952년 여름 부산정치 파동 이후 반이승만 및 민주화 활동을 한국내와 서방세계에 알림
-1955년 6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한반도 중립화 통일 방안을 호소함
-1956년 12월 워싱턴을 방문한 인도수상 네루에게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제시함
-1960년 4월19일 이전까지 꾸준한 반이승만 활동과 한반도 중립화통일방안 제시
-1964년 박정희와 김일성에게 공개편지를 보내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지 재미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며 국제여론에 호소
-1975년 9월6일 미 남가주대학병원에서 타계
-2000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에게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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