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제적인 ESG 공시 의무화에 반대한다."
"ESG 공시 의무화는 '선도'가 아닌 '신중한 추종 전략'이 바람직하다."
"불가피하게 공시제도를 강제하게 되는 경우라도 충분한 준비 기간을 두고 최소한으로 도입, 적용되어야 한다."
'ESG 공시 의무화'에 대한 한국상장회사협의회가 최근(8월 23일) 밝힌 공식 입장이다. ESG는 환경·사회·지배구조를 의미한다. 상장협은 보도자료를 통하여 이 입장이 단순히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ESG의 국제적인 동향을 면밀히 검토한 후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고려하여 내린 결론이라는 점을 분명히 내비쳤다. 보도자료에 "ESG 규제화, 특히 공시 의무화에 대한 바람직한 정책 방향을 논의하고자 'ESG ATOZ'라는 부제목으로 매주, 총 10편의 이슈 페이퍼를 발간"하면서 내린 "구체적인 입장"이라는 문구를 담았다. '열심히 공부했다'(열공)는 말이다.
그러나 '열공' 끝에 정부에 요구하는 내용은 너무 근시안적이며 시대착오적이다. 규제를 회피하거나 최대한 지연시키고자 할 때 기업 협회들이 취하는 상투적인 논리는 통상 자율론, 기업 부담론, 시기상조론 등이다. 이 논리는 전가의 보도(傳家의 寶刀)와 같다. 상장협의 입장문은 사실 이 낡은 레코드판에 불과하다. 그나마 의미를 부여하자면, 'ESG 공시 의무화'를 국제적인 대세로는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뿐이다. 이조차 부인한다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정도로 ESG 시대가 성큼 다가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상장협이 입장문의 무게 중심을 'ESG 공시 의무화 최대한 지연'과 '공시의무화 항목의 최소화'에 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상장협은 숨기고 싶었던 '시대착오성'을 결국 드러내고야 만다.
더 빠르고 더 강해진 ESG 정보공개
올해 1월, 금융위원회는 ESG 공시 로드맵을 발표한 바 있다. 우선 2030년까지 전(全) 코스피(KOSPI) 상장사에 E와 S 즉 환경과 사회 관련한 정보공개를 의무화하되, 2025년부터 자산총액 2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부터 단계적으로 확대 적용한다. 그 이전까지는 한국거래소가 제시한 'ESG 정보공개 가이던스'를 활용하여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자율공개를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자산규모 2조 이상의 코스피 상장기업에 2019년부터 적용되고 있는 지배구조(G) 의무공시는 2026년에는 전(全) 코스피(KOSPI) 상장사에 확대된다. 금융위가 추진하는 ESG 공시는 '법률'이 아닌 한국거래소의 '유가증권시장 공시규정' 개정을 통하여, 주류 보고서인 '사업보고서'가 아닌 '별도 보고서'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추진 중이다. 따라서 코스피 상장기업들은 '지배구조 보고서' '환경·사회보고서'를 별도로 제출하다가 2025년부터는 자산규모 2조 원 이상 기업부터 단계적으로 이를 통합한 'ESG 보고서'를 제출하게 될 전망이다.
필자는 정부의 ESG 정보공개 의무화 시간표 제시는 긍정적이지만, 국제적인 ESG 타임라인과 비교하여 상당히 느리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리고 지배구조 보고가 전(全) 코스피 상장사에 의무화되는 시점인 2026년을 마지노선으로 설정하여 환경·사회 정보공개도 일치시켜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래야만 투자자를 비롯한 이해관계자들이 ESG를 정보를 통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보고 수단도 투자자들이 주로 사업보고서를 메인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는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ESG와 관련한 국제사회의 진행 속도는 ESG에 투신해 온 필자도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로 상당히 빠르다. 그만큼 자본주의의 패러다임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얼마나 숨가쁘게 이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잠시 살펴보자.
EU는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서 룰 세팅(rule setting)을 주도하고 있다. 2014년 비재무보고지침(NFRD), 2018년 지속가능금융 액션플랜, 2019년 유럽 그린딜, 2020년 녹색분류체계 발표, 2021년 유럽 기후법 채택, 지속가능금융공시(SFDR) 실시, 기업 지속가능성보고 지침(CSRD) 등 ESG 제도를 가장 선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공급망의 ESG도 강화하기 위하여 역내 소재 기업의 공급망에 대하여 ESG 실사를 의무화하는 지침을 2024년 시행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공급망 실사법이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일부 국가에서 개별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독일도 최근 채택했다. EU는 ESG 정보공개 의무화와 관련하여 비재무보고지침인 NFRD를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인 CSRD로 강화하여 개정하면서 적용대상의 확대와 보고 표준 도입, 공시에 대한 감사, 지속가능성 정보의 디지털화 등을 포함시켰다. 2022년에 채택하여 2024년부터 적용한다는 계획인데, 적용대상 기업이 기존 1만1000개에서 약 4만9000개사로 늘어날 전망이다.
영국은 기후 관련 재무정보공개 테스크 포스인 이른바 TCFD의 요구사항을 2025년에는 영국 경제 전반에 걸쳐 의무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당장 런던 증권거래소(LSE) 프리미엄 부문에 상장된 기업(premium listings)들을 대상으로 2022년 봄까지 TCFD의 요구 사항을 '재무보고서'를 통하여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하였다. 올해 6월 열린 G7 재무장관들은 TCFD에 따른 기후 보고 의무화에 합의했다.
TCFD에 이어 세계 환경의 날(6월 5일)에는 자연 관련 재무정보공개 태스크포스인 TNFD도 공식 출범하였다. 프레임워크는 UNEP FI, UNDP, Global Canopy, WWF가 공동 개발하여 2023년에 내놓을 계획이다. G7 정상들도 TNFD를 지지했다.
프랑스는 어떤가. 2015년 '에너지 전환법'을 통과시켜 상장기업, 은행, 연기금, 투자기관 모두에 기후변화 관련 재무리스크를 연차보고서를 통하여 공시하도록 규정하였다.
미국도 증권거래위원회(SEC)에서 규정 또는 지침을 제정하여 상장기업들의 ESG 공시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또 의회가 나서 상장기업의 ESG 정보공개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지난 6월 하원에서 통과시켰다. 이른바 'ESG 공시 및 단순화법(The ESG Disclosure and Simplification Act)'이다. 이보다 앞서 5월에 바이든 대통령은 '기후 관련 금융리스크에 관한 행정명령(Executive Order on Climate-Related Financial Risk)'을 발표했다. 미국도 후발주자지만 ESG 의무공시와 관련하여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신중한 추종 전략'은 '눈치 보기 전략'
국제사회는 이처럼 ESG 경쟁우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분주하다. 이 과정에서 'ESG 정보공개의 조기 의무화'가 필수다.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한 생태계 구축에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선결 정책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장협은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통일된 기준이 마련되고 미국을 포함한 주요국들이 이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까지 선제적으로 ESG 공시를 '법률'로 의무화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과도한 기업부담과 불필요한 전환 비용 야기가 명백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주류 보고서인 사업보고서를 통한 ESG 정보공개 의무화를 반대한다는 말이다. 또 이미 ESG 공시 의무화가 도입 결정된 부분에 대해서는 기업 준비 기간을 충분히 고려하여 자산총액 기준 이행 시기가 겹치지 않도록 지속가능경영보고서 일정을 연장 조정해 달라고 제안했다. 금융위원회가 제시한 전(全) 코스피 상장사 의무 적용 시점인 2030년도도 빠르니 그 이후로 설정해 달라는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ESG 공개의무항목의 최소화를 요청하고, 공시정보에 대한 '선제적인 외부감사(보증) 의무화'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EU는 CSRD에서 기업의 ESG 보고 정보에 대한 외부감사(보증)을 요구한다.
ESG 공시 의무화를 대하는 상장협의 태도는 매우 수동적이다. 이를 '신중한 추종 전략'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레토릭(rhetoric)일 뿐 사실 '눈치 보기 전략'에 다름 아니다. 국제적으로 통일된 기준이 마련되고 이 기준이 미국 등 주요국에 도입되기 전까지는 ESG 자율공시를 할 테니 정부는 ESG에 대한 정보의 체계적 지원, 금융과 세제 등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여 기업을 지원해 달라는 입장이다. 이 요구 속에는 기업 부담론, 시기상조론, 자율론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ESG 정보공개 의무화를 골자로 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제18대 국회인 2010년 7월 최초로 발의된 이후, 제19대 국회에서 2건, 제20대 국회에서 3건 그리고 이번 제21대 국회에서는 현재 1건이 발의된 상태다. 그러나 번번이 무산되었고, 그 이유는 모두 상장협 등 기업단체의 반대 때문이었다. 매번 등장하는 반대 이유는 기업 부담, 시기상조, 자율론이었다.부담이 없는 새로운 법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또 ESG가 대세가 된 지금도 의무화가 시기상조라면 도대체 언제가 적기라는 말인가. 자율적으로 하겠다고 말해왔지만 그 사이에 기업이 ESG와 관련하여 한 일이 얼마나 있는가. 최근에야 ESG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담조직도 만들고 있다. 그런데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던 2006년과 2007년에도, 그리고 CSV(공유가지창출)이 유행하기 시작하던 2012년에도 이러한 행태가 있었다. 지배구조 공시는 상장협이 말하는 '자율'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2017년 3월 금융위원회는 기업지배구조 공시제도를 기업 자율로 적용한 바 있다. 그러나 공시 기업은 9.3%에 불과했다. 반면 자산총액 2조 이상 기업의 지배구조 공시 의무적용 발표 이후, 2018년 200개, 2019년에는 211개로 대폭 증가했다.
ESG, 룰 세터의 관점 가지자
'자발'과 '자율'은 분명 필요하지만 유예기간이 지체된 시간이 되지 않도록 조속한 ESG 정보공개 의무화가 필요하다. 의무화 시점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전략이라고 하더라도 상장협의 2030년 이후 주장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이다. 전 세계의 ESG 시계를 확인하고도 그런 주장을 했다는 자체가 놀라울 정도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상장협이 ESG 관련 법과 제도를 단순히 '원 오브 뎀'(one of them)의 규제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SG 공시 의무화 등은 단순한 법과 제도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열쇠다. 즉 기업과 금융기관이 돈을 벌고 쓰는 '게임의 룰'을 바꾸는 전환기의 키워드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신중한 추종 전략'이 아니라 ESG 시대를 이끄는 '선도 전략'을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우리 기업의 ESG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이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ESG를 선도할 능력과 잠재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 기업도 그렇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선진국의 눈치 보기로 일관하는 ESG 공시 의무화에 대한 입장문은 과도한 피해의식의 발로이자 우리 기업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결과물이다. ESG는 '선도'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이다. 상장협의 입장문은 ESG 공시 의무화와 관련하여 룰 팔로워(rule-follower)가 아닌 룰 세터(rule setter)의 관점에서 다시 쓰여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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