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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문화' 속에서 탈춤에 이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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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문화' 속에서 탈춤에 이끌리다

[탈춤과 나] 18. 박현경의 탈춤

무엇 하나 진득이 앉아 끝을 보고야 마는, 그런 성격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내가 어떻게 그리 시도 때도 없이 진종일 장구 장단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때는 1972년 봄 학기가 다 끝나가는 어느 날 문리대 연극부 박미해 선배의 제안에 백귀순, 이혜경 등 같은 과 친구들과 호기심 반, 재미삼아 서울대 탈춤패(민속가면극연구회)가 놀고 있다고 하는 우중충한 창고를 찾았다. 그 전에 이미 사전 탐색이나 모종의 교섭이 있었겠지만, 나는 저간의 사정을 알 길 없으니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무작정 따라 나선 것이다. 처음 맺어진 이 끈은 그리 튼튼한 것은 아니었던 같다. 그런데, 호기심에서 출발한 발걸음이 점차 잦아지면서 알음알음 모여든 식구가 불어나고 막연한 기대는 의무감, 사명감으로 변해 갔다. 장구 장단이 어느새 몸에 배이기 시작하여, 이제 탈춤과 맺어진 끈은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정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렇게 거의 반세기가 되어 간다.

우중충한 창고는 당시 동숭동 문리대에서 법대로 넘어가는 육교 옆에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기나 하는지 모를 이 간이창고는 항상 어두컴컴했고, 장구 채 소리 따라 오르고 내리는 발에 밟힌 먼지가 갈 곳을 몰라 항시 중천에 머물고 있었다. 무슨 큰 자력이라도 있는지 우리는 수업만 끝나면 그 회색빛 공간에 끌려들어 갔다. 1년여를 들었어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 신동수 형의 장구 장단, 무슨 말을 하기는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채희완 형의 변함없는 바디랭귀지가 뿜어내는 자장 등은 여린듯하면서도 강렬하여 아직도 그로부터의 이탈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1973년 5월 30일 이화여대 버들마당, 민속연구회 제 1회 봉산탈춤 공연 ⓒ박현경
▲1973년 5월 30일 이화여대 버들마당, 민속연구회 제 1회 봉산탈춤 공연 ⓒ박현경
▲1973년 5월 30일 이화여대 버들마당, 민속연구회 제 1회 봉산탈춤 공연 ⓒ박현경

처음 연습은 보통 봉산탈춤 기본 동작으로 몸을 푸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수업만 끝나면 뭉쳐서 달려가곤 하는 성의가 대단하였던 것인지, 아니면 이화여대에 제2의 가면극 연구회를 설치하기 위한 모종의 ‘기획’ 하에 열성적인 지도가 이루어졌던 때문인지, 누가 크게 앞장선 것도 아닌데 어느새 기본 동작만이 아니라 탈춤의 전 과장으로 진도가 진전되었다. 그런데 각 과장을 맡을 사람을 정하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재주나 적성도 문제지만 절대적 연습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열심히 연습했던 친구로 기억에 또렷이 남는 이를 꼽으라면, 백귀순, 강정례, 김은주, 김남수, 정영숙, 안경례, 전연숙, 홍성원, 백미서 등이다. 본격적으로 춤은 추지 않았지만 큰언니로서 든든한 빽이 되어 준 국문과의 김순진 선배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각 과장을 연습하며 헤매고 있을 때 먼저 봉산탈춤 시험을 통과했다고 과외선생님을 자처했던 서울대 가면극회의 선배님들, 채희완, 진홍순, 윤대인, 박성주, 강철구, 김덕중 등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연습하는 데는 모범생이 있고 선수가 있다. 모범생으로 첫째는 백귀순이다. 그리고 선수로서는 한 해 후배 강정례가 단연 으뜸이다. 백귀순은 그 많은 대사를 어찌 그리 술술 풀어내는지, 말뚝이 역은 따 논 당상이다. 아마 말뚝이 역할을 하기 위해서 몇날 밤을 새웠음에 틀림없다. 후배 강정례는 마부 역할을 맡았는데, 모두들 감칠맛 나는 그 춤에 넋을 잃고 볼 정도였다. 춤 사위가 유난히 멋졌던 김남수도 훌륭한 선수였다. 이렇게 수많은 시연과 반복되는 연습 속에서 각자가 맡아야 할 역할이 주어졌다. 이두현 선생이 채록하여 정리하신 두툼한 4.6배판의 [한국가면극연구]라는 책자도 하나씩 집에 갖추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탈춤 전 과장에 나오는 개별 춤사위가 펼쳐질 때에는 지명된 사람이 나가서 따라 하고 나머지는 뒤에 서서 구경을 하였던 것 같다. 진도가 잘 나갈 리 없었고, 이때 별도로 빠지면 서울대 선배?들의 개인교습이 뒤따랐다.

▲사상좌춤(김은주, 백귀순, 안경례, 한은섭 출연) ⓒ박현경
▲취발이춤(취발이 :박현경, 소무 : 김남수) ⓒ박현경
▲봉산탈춤 ⓒ박현경
▲양반춤(말뚝이 : 백귀순, 도령 : 백미서) ⓒ박현경
▲공연을 마치고; 왼쪽부터 박미해, 강정례(마부), 본인(취발이), 차옥덕(문리대 학생회장) ⓒ박현경

그렇게 한 여름이 가고 가을 학기에 접어들었다. 틈틈이 연습은 지속되었지만, 결정적으로 이화여대생들의 ‘공연’이 가시화된 것은 10월 하순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 할 일이 없어지게 되면서부터일 것이다. 밤낮 없이 춤만 출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공연 팜프렛을 보니 이화여자대학교 민속극연구회와 문리대 학생회가 1973년 5월30일, 개교기념일 축전 전야에 봉산탈놀이로 민속잔치를 마련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내가 취발이춤을 추었고, 기획자로 나와 있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지금은 다 고인이 되셨지만 춤 지도에 열성이셨던 인간문화재 김선봉, 김기수 선생님, 반주를 맡아주셨던 박동진 선생님 등의 단아하면서도 굳센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선한 모습들은 요즈음 여간해서는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민속극연구회의 제1회 봉산탈춤 공연은 여러 면에서 나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낙양동천 이화정!” 어디서 이런 소리가 나오는지. 어릴 적부터 꿈이었던 ‘현모양처’는 물 건너 간 듯하지만, 무슨 일이 생겨도 크게 걱정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힘도 붙었다. 졸업하고는 취발이가 필요한 곳에 가끔 불려다니기도 하였는데,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중간집단 모임이나 노동자 모임, 지역축전 모임 등이 기억난다. 직장 일을 끝내고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조금 늦게 참석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밤늦도록 진행되는 모임 끝에 함께 벌이는 탈춤판은 피로를 날리고 모두를 하나되게 했다. ‘새벽같이’ 집에 들어와 옷 갈아입고 직장에 나가는 모습을 어머니는 어떻게 보셨을지? 아뜩한 느낌이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한 일, 대학원 전공(사회복지)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여성, 가족, 문화복지 분야에서 아직까지도 일을 놓지 못하고 있는 데에는 학부시절 겁없이 달려들었던 탈춤에서 갖춘 기초체력이 톡톡히 한 몫 한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처음 탈춤을 시작할 당시는 통기타 문화가 대세를 이루던 때라 우리의 모임은 매우 특별하다고 할 수 있었다. 탈춤에 이끌린 특별한 이유를 짧게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우리의 가락과 몸짓을 찾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이었다. 이러한 의기투합이 ‘한마당’, ‘한두레’로 이어지고, 그 끈이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이라.

박현경 : 이화여대 민속극연구회 1972년 회장, 현 서초여성가족플라자 대표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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