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선생님은 <녹색평론>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생태주의의 지평을 열고 녹색사상의 씨앗을 뿌렸다. 선생님은 생태주의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생태주의 담론과 실천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기후위기, 먹거리 위기, 산업주의와 성장주의의 위기,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에너지와 식량 위기 등 현실의 문제에 대해 개입하고 발언했다. 이러한 과정은 독창적인 생태사상으로 결실을 맺는다.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1999), <간디의 물레>(1999),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2008), <땅의 옹호>(2008), <발언 I·II>(2016), <대지의 상상력>(2019),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2019) 등 유작들을 살펴보면 심층생태학에서 출발하여 사회생태학을 거쳐 정치생태학으로 전개되어온 생태사상의 궤적이 드러난다. 생태주의 사회사상가로서 김종철 선생님을 전체적으로 돌이켜 보는 일은 이 글의 과제를 넘어선다. 대신에 여기에서는 기본소득에 관한 선생님의 발언들을 간추려보고자 한다. 기본소득론은 김종철의 생태사상을 이루는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이다. 김종철의 기본소득론은 한국에서 생태주의 기본소득론의 출발점이며, 운동과 실천의 관점에서는 김종철 선생님을 농민기본소득운동의 개척자였다.
김종철 선생님은 소농 중심의 생태적 순환경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기본소득에 대한 김종철 선생님의 관심은 농민기본소득과 같은 특정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김종철 선생님의 주장은 농민기본소득만 도입하자는 것이 아니었고, 우선 농민기본소득부터 먼저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김종철 선생님은 모든 개별적인 사회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부여되는 보편적 기본소득에 의하여 생태사회로의 전환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기본소득이 성장주의의 압박을 완화하고 사람들에게 생각의 힘을 부여한다고 말한다.
생태적 전환은 김종철 선생님의 기본소득론을 관통하는 가장 중심적인 문제인식이었다. 선생님은 특히 노동 여부와 상관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이 가져올 주체의 변화에 대해 주목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기본소득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직결된다는 인식, 기본소득의 재원은 공유부라는 인식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경향신문> 칼럼 '김종철의 수하한화' 중 2014년 3월 5일 자 ''기본소득'이라는 희망'은 기본소득론의 기원을 토마스 페인의 공유부 개념에서 찾는다. 페인은 토지를 개간한 사람이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고 인공적 소유권을 획득한다고 하더라도 토지 그 자체를 창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토지 그 자체는 원래 개별적인 모든 인류의 공동소유였으므로 인공적 소유자가 토지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독차지해서는 안 되며 10% 정도는 공유부로 간주하여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귀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대목에서 강조해야 할 점은 김종철 선생님에게 생태적 전환이란 동시에 사회적 전환, 곧 자본주의 넘어서기였다는 것이다. 생태적 전환은 단순히 생태적 기술개발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사회적 전환과 함께 추진될 수밖에 없다. 김종철 선생님은 기본소득에서 사회적 전환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발견했기에 기본소득을 생태적 전환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처음으로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를 접했을 때 그는 스스로 매우 "흥분했다"고 말하지만, 기본소득론과 전통 좌파의 문맥이 어떻게 다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러한 발언에는 장기 전략의 관점이 함축되어 있다.
유형적으로 볼 때, 김종철 선생님의 전환 전략은 에릭 올린 라이트(E. O. Wright)가 말했던 '자본주의 침식'(eroding capitalism) 전략과 비슷하다.
혁명적 사회주의의 '자본주의 파열' 전략이나 사회민주주의의 '자본주의 길들이기' 전략과 구별되는 '자본주의 침식' 전략의 핵심은 대안적 경제조직과 기본소득 도입을 통한 새로운 주체성의 등장이다. 이처럼 기본소득 도입, 노동시간의 단축과 임금에 얽매이지 않은 다중 활동의 등장,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 민주주의 문제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김종철 선생님의 생태사상은 앙드레 고르(André Gorz)의 정치생태학에 접근한다.
그런데 기본소득에 관한 김종철 선생님의 관점은 앙드레 고르의 기본소득론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 훨씬 더 멀리 보는 시야에서 제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김종철 선생님은 은행의 부분지급준비금 제도와 신용 창조에서 성장 강박을 읽어냈고 이로부터 경제를 해방하는 것이 생태적 전환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종철 선생님은 일찍이 2009년부터 <녹색평론>을 통하여 사회신용론 및 주권화폐제를 재원으로 하는 기본소득론을 소개해 왔다.
기본소득 재원과 관련하여 조세 기반 모델에 대한 연구가 주류라고 말할 수 있고, 요즘 공유부(사회부) 기금이나 공유지분 모델이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럼에도 주권화폐 발행에 의한 기본소득 재원 조달은 여전히 논의 지평 위에 올라서지 못한 실정이다. 이 점에서 김종철 선생님이 주권화폐론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한국에서는 선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2008년 이후 주요국 정부의 양적 완화로 균형재정 이데올로기에 파열이 생기고 최근에는 현대화폐이론(MMT)이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현실은 기본소득과 연동된 주권화폐론도 조만간 큰 관심을 받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2009년 이후로 김종철 선생님이 꾸준히 제기해 왔던 화폐신용의 근본적 개혁에 의한 기본소득 도입에 대해 앞으로 보다 풍부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전체적으로 김종철 선생님에게 기본소득은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을 위한 핵심 수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첫째, 기본소득은 생태적 소농의 기반이 될 수 있으며, 둘째 임금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내며, 셋째, 경제를 성장 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며, 특히 주권화폐 방식의 화폐신용 개혁은 부채 의존 성장의 관성을 깨뜨린다. 김종철 선생님의 기본소득론은 한국에서 기본소득과 생태주의의 만남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으로 얼마만큼 더 풍부하고 창조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고 사회적 생태적 전환에 얼마만큼 실질적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인가는 이제 온전히 후세대들의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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