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5일 식목일에 대형 산불이 나 강원도 양양과 고성 일대를 태웠다. 낙산사원장·원통보전·일주문·낙산사홍예문 등 주요 전각이 불타고 국가 보물로 지정된 낙산사 동종이 완전 녹아내려 보물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당시 이해찬 총리는 포천의 한 골프장에서 오후 2시 골프를 시작했다. 잠시 잡혔던 불길이 다시 번져 인근 17개 지역에 주민대피령이 내려진 시각이었다. 이어 2시32분엔 양양군수가 재난경보를 발령했다. 이 총리가 골프를 중단했을 3시45분엔 막 낙산사로 불길이 옮아붙고 있었다. 대형 산불이 발생했음에도 계속 골프를 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공분을 샀다. 이 총리는 ‘산불 대응보다 골프가 더 중요한 것이냐’는 비판에 결국 사임해야 했다.
2010년 4월 20일 미국 멕시코만에서 영국 BP의 석유시추시설 딥워터 호라이즌이 폭발했다. 5개월 동안 대략 7억7천만 리터의 원유가 유출된 최악의 해양사고이자 <딥워터 호라이즌>이라는 실화 영화로도 우리에게 낯익은 사건이다. 미국 멕시코만 원유 유출 사고로 불리는 이 재난으로 11명의 시추 노동자가 사망했고 18명이 부상당했다. 이틀 뒤 시추시설은 침몰했다. 5월 1일에는 루이지애나주 등 4개주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6월 이 사고 관련 청문회가 미국에서 열렸다. BP의 최고경영책임자인 토니 헤이워드는 무성의한 답변으로 의사진행방해죄로 고발까지 당했다. 여기에다 사건 당시 아들과 함께 요트 경기를 관전하는 장면이 포착된 영상이 청문회에서 공개되면서 그는 미국인의 공분을 샀다. 그에게는 대형사고 수습보다 아들과의 시간이 더 중요했다. 결국 7월 27일 그는 경질됐다. 경영계에서 생명이 다할 것만 같았던 그는 2016년 9월 6일 담배회사인 브리티쉬 아메리칸 토바코 코리아(BAT 코리아)의 신임 사장으로 부활해 한국에 왔다.
이해찬, 박근혜, 영국 BP의 헤이워드, 위기 대응 실패로 추락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경 전남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경기도 안산시의 단원고등학교 학생 등 승객 476명을 태우고 인천을 출발해 제주로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복되어 침몰했다. 이 사고로 시신 미수습자 5명을 포함한 304명이 사망하였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사고 발생 초기 전원 구조됐다는 보고를 받은 뒤 이것이 오보이고 실은 대부분이 구조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난 오후 1시 이후 상당 시간 동안 별다른 대응 지시를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승객 생명과 안전보다 머리 매무새가 더 중요했다. 승객의 가족들과 국민은 대통령의 이런 안이한 대응을 질타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국정 운영 난맥상과 측근 농단이 드러나면서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2021년 6월 17일 새벽 이천 쿠팡물류센터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사흘간 계속된 화재로 수천억 원의 재산 피해가 났고 불을 끄던 소방관 한 명이 숨졌다. 화재 당시 쿠팡에 근무한 직원 200여명은 무사히 대피했다. 이재명 경기도 지사는 이날 오전 11시 경남도와의 협약식에 참석하느라 경기도에 없었다. 오전 한때 잡혔던 불길은 오후 1시께부터 다시 살아나 크게 번졌고 이 과정에서 소방관 한 명이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 지사는 계속 경남 지역에 머물면서 경남교육감 접견,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 현장방문 등 예정 일정을 소화했다. 저녁에는 마산에서 황교익 맛칼럼니스트가 운영하는 유튜브 매체 황교익TV의 먹방 녹화촬영을 하느라 황씨와 함께 떡볶이 식당과 팥죽집을 전전했다. 그 뒤 화재 현장으로 출발해 다음날 새벽 1시 32분께 현장에 도착했다. 이 지사의 이런 재난 대응 자세를 여야 대선 후보들이 19일 일제히 비판하자 경기도는 즉각 “화재 발생 즉시 현장에 반드시 도지사가 있어야 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과도한 주장이고 억측입니다. 애끊는 화재사고를 정치 공격의 소재로 삼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랍니다.”라는 해명성 논평을 냈다.
불에 기름 끼얹는 경기도 논평, 떡볶이 식당이 재난 지휘소 될 수 없어
경기도의 이런 논평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다. 재난이나 대형사고 발생 현장에 기업의 CEO나 도지사·총리·대통령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런 고위층의 현장 방문이나 상주가 외려 구조·구난에 방해가 될 때가 많다. 하지만 사태가 심각함에도 재난 대응보다 더 중요하지도 않은 현장에 계속 머무는 것은 책임자로서 결코 있을 수 없는 행위다.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다.
앞서 국내외 위기 대응 실패 사례에서도 보았듯이 골프장, 요트 경기장, 청와대 개인 집무실이 재난 현장이나 재난 대응을 지휘하는 곳보다 더 중요한 장소는 아니다. 이 지사가 화재 재난에 잘 대응할 수 있는 곳은 결코 경남교육청,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 사무실이 아니다. 더더군다나 떡볶이 집은 아니지 않은가.
경기도의 이런 해명은 외려 이 지사를 더욱 곤경에 처하게 만들고 사지로 모는 지름길이다. 그 어떤 이유를 대면 안 된다. 이는 하수 중 하수다. 무조건 잘못한 판단, 잘못된 행보였다고 시인하고 사과하는 것이 모범 답이다. 위기 대응 소통 원칙 중 하나가 ‘잘못을 했을 때는 즉각 사과하고 두 번 다시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것이 있다. 지금은 이를 실천할 때이다.
황교익 인사 터널 빠져 나오자마자 다시 터진 황교익 먹방
경기도가 “애끊는 화재사고를 정치 공격의 소재로 삼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 부분도 반박 메시지로서는 빵점이다.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를 가지고 7년 넘게 정치 공격의 소재로 삼고 있지 않은가. 그 어떤 재난이나 참사든 역사적 교훈으로서 부적절한 처신을 한 사람에 대한 책임을 강조할 수 있는 일이다. 이를 정치 공격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사태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지사는 황교익 경기관광공사 내정과 관련해 한 차례 내상을 크게 입었다. 쿠팡물류센터 화재 참사 대응도 공교롭게 황교익 씨와 먹방 유튜브 방송을 찍는 일로 현장을 늦게 찾는 일이 벌어졌다.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위기 탈출을 한 이 지사가 다시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다. 황교익이라는 이름 석 자를 국민 대중한테서 하루빨리 지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이 지사가 직접 언론인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해서 쿠팡 화재 때 있었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해 사과하는 것밖에는 달리 헤어나갈 길이 없다.
우리 사회, 잘못한 언행 제때 통 크게 인정하는 지도자 없어
인간은, 보통사람이든, 기업 경영 책임자이든, 국가 지도자이든 자신이 한 언행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원초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 황교익 경기관광공사 내정과 관련해 빚어졌던 ‘친일 음식평’ 논란도 거의 갈 데까지 간 뒤에야 민주당 이낙연 후보와 황교익 씨가 서로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반 시민은 이미 봉합하기 며칠 전부터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사건 당사자인 그들만 모를 뿐이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시원하고 통 크게 인정하는 지도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재벌 총수든, 국회의원이든, 당대표든, 대선 후보든, 장관이든, 시장·도시사든, 대통령이든 모두 그렇다. 하지만 진정한 지도자(아직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라면 열 번이고 백번이고 잘못을 했을 때마다 사과하는 품성을 지녀야 한다. 사과의 방법과 시기도 중요하다. 지금 바로 모든 국민에게 각인되는 방식으로 사과하는 게 정답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