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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비'들은 아직도 국회에 있다...우리가 기억해야할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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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비'들은 아직도 국회에 있다...우리가 기억해야할 이름들

[프레시안 books] <조작된 간첩들: 침묵하지 않을 의무>

고문은 지배의 논리가 반영된다. 한 개인을 짓밟아 뭉개고 파괴하며 굴종의 규율 속에 가둔다. 고문은 조작이 이뤄지는 과정이다. 심문이나 수사의 기술이 아닌 거짓을 증언하도록 강제하는 수단이다. 고문은 죽어가는 상태에 있는 고통이다. 억압과 테러를 통해 육신은 갈기갈기 찢기고 인격은 말살된 채 소멸되어 간다. 끝없는 절망 속에 '거짓 자백'만이 악몽 같은 고문실을 빠져나올 수 있다. 고문은 철저히 야만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인간에 대한 상실과 분노, 격정과 두려움으로 한 장 한 장 써내려간 책이 있다. '함석헌 연구의 권위자' 김성수의 신간 <조작된 간첩들: 침묵하지 않을 의무>(드림빅 펴냄)이다. 이 책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벌어진 조작 간첩 사건을 다루고 있다. 양심적인 학자,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학생, 민족 정체성을 찾고자 한 재일동포, 가난한 삶을 일구던 평범한 가장의 어부들이 국가 기관에 의해 어떻게 간첩으로 둔갑했고, 사건이 조작됐는지 그 실태를 파헤치고 있다.

광기의 폭력과 고문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인내와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저자는 끊임없는 거짓과 악몽을 들춰내면서도 결코 침묵하지 않을 의무에 대해 강조한다. 그것은 살아있는 이들의 책무이며, 살아남은 이들의 용기임을 거듭 일깨운다.

▲ <조작된 간첩들: 침묵하지 않을 의무>(김성수 지음, 드림빅 펴냄) ⓒ드림빅

'남조선해방전략당'부터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까지

김성수의 이번 신간은 1968년 8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부터 1991년 5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까지 모두 14건의 고문 조작 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러 형태의 고문 사건과 배경, 그리고 '사건일지' 등을 별도로 제시함으로써 관련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과거 군사정권 하에서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정권에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것이 빌미가 돼 어딘가로 끌려갔고, 온갖 고문과 협박을 당해야 했다. 필요에 따라 일부는 공안 사건으로 조작돼 간첩 협의가 씌워졌다. 1968년 8월 박정희 정권은 통일혁명당 사건을 수사하면서 또 하나의 간첩조작 사건을 발표한다.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이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모진 고문과 가혹행위 등으로 자백 받은 허위 진술을 토대로 사건은 철저히 조작됐다. 사건 피해자 이일재는 당시 고문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때 함께 연행된 분들 중 노중선이 고문으로 팔이 부러진 모습과 김봉규가 고문으로 겨우 걷는 모습, 본 사건의 주범격인 권재혁이 머리카락이 뽑히고 온 얼굴에 피 멍이 든 모습을 보고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수사관들에게 '우리에게 만일 더 이상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강요하면 죽어버리겠다'고 격노해서 항의하니 양팔에 수갑을 채워 책상 다리에 묶어두고 신문과 조서를 작성했다"(<조작된 간첩들> 26쪽)

1970년대 이방인이라는 설움에도 불구하고 민족 정체성을 찾기 위해 조국으로 온 재일동포 유학생들은 당국에 의해 쉽게 간첩으로 조작됐다. 말도 서툴고,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던 이들은 정보기관에 의해 흔하게 빼먹는 곶감이 됐다. 재일교포 유학생 김정사도 1977년 4월 서울대학교 재학 중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에 의해 체포된 뒤 북한 간첩이 됐다. 서빙고실에서 이뤄진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가혹행위는 치 떨리는 공포였다. 그로인해 왼쪽 고막이 파열됐고, 현재까지도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하다. 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와 엮은 김정사 사건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평범한 이들이 거짓 누명을 쓰고 간첩이 된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특히 조업 중 풍랑에 휩쓸려 북한 해역에 넘나들기 쉬웠던 어부들은 조작 간첩의 좋은 '재료'였다. 배운 게 부족하고, 가진 게 없었던 어부들은 자기방어 능력이 월등히 약했다. 군사정권은 정치적인 긴장이나 위기가 있을 때마다 수시로 공안 사건을 발표해 국면 전환용으로 활용했다. 1980년 8월 '진도가족간첩단 사건'도 군사정권을 위한 소모품으로 쓰였다. 사건 피해자 석달윤은 당시 고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200~300와트 밝기의 전구를 눈앞에 켜놓고 전구를 계속해서 쳐다보게 했다 …… 담뱃불로 무릎 아래에서 발목 위까지 지져대기, 송곳으로 허벅지 찌르기 같은 고문을 했다 …… 자필진술서를 매일 오전과 오후에 한 벌씩 써내고 한 자라도 틀리면 사정없이 몽둥이세례를 받았다."(<조작된 간첩들> 102쪽)

독일의 사회학자 볼프강 조프스키는 저서 <폭력사회>에서 "고문은 고문 받는 인격체를 단순한 유기체, 즉 살아있는 고깃덩어리로 전락시켜 도구로 사용하거나 마음대로 조작한다. 그 이후 진행되는 모든 절차는 바로 이 같은 대상화(對象化) 혹은 물화(物化)를 기반으로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피심문자가 항상 하는 일이란 오로지 그의 대답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되는지에 대해 판단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미리 그려놓은 기획 안에서 거짓 자백을 만드는 과정이 곧 고문이라는 것이다. 조프스키는 그러면서 "인간이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안이 인간을 잠식하는 형국"이 된다고 고문이 갖는 인격의 파괴성을 설명했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가해자들의 이름

▲심진구 씨가 그린 안기부 고문 수사관들의 몽타주. 왼쪽 커다란 그림이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단장 정형근이다. 그 외 위쪽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여우', '불독', '곰', '독사'의 모습.(<조작된 간첩들> 239쪽)

법비(法匪)는 비적 중에서도 가장 악독하고 잔인하다. 간첩조작 사건에는 익숙한 이름의 법비들이 적잖이 등장한다.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당시 대법원장은 민복기였다. 진보경제학자 권재혁의 사형확정 판결을 내린 그는 1968년부터 박정희 정권 마지막까지 10년간 대법원장을 지냈다. 사법부를 군대의 법무감실 정도로 여긴 박정희 정권 하에서 온갖 추잡한 사건의 뒤치다꺼리를 했다.

박근혜 정권 당시 사법농단의 주범 양승태는 1976년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인 김동휘 사건을 비롯해 모두 6건의 간첩조작 사건에서 유죄판결을 내렸다. 관련 사건은 이후 재심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양승태는 박근혜 정권 하에서 국가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를 6개월로 단축했다. 이로 인해 과거사 사건의 피해자들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도 국가배상을 받지 못했다. 1980년 진도가족간첩단 사건 당시 죄 없는 어부들에게 사형과 무기징역 등을 선고한 판사는 전 국민의힘 국회의원 여상규였다. 여상규는 2018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1심 판결로 한 분의 삶이 망가졌다. 책임은 느끼지 못하나?"라고 묻자 "웃기고 앉아있네, 이 양반 정말!"이라며 버럭 화를 낸 채 전화를 끊었다.

1986년 12월 공장노동자 심진구가 안기부에 의해 남산으로 끌려갔다. 당시 야만적인 고문 조사를 진행한 사람은 정형근 전 한나라당 의원(1986년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을 비롯해 심진구가 훗날 몽타주를 그리며 이름 붙인 '여우', '불독', '독사', '곰' 등 안기부 요원들이었다.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의 수사 검사는 박근혜 정부에서 민정수석을 지낸 현 국민의힘 국회의원 곽상도다. 곽상도는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발표 후 언론 인터뷰를 통해 "문제가 있었다면 당시 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느냐. 지금 와서 유서대필이 아니라는 것은 난센스 아니냐"고 뻔뻔함을 드러냈다.(<조작된 간첩들> 257쪽)

2014년 1월 16일 서울고등법원 재심판결에서 강기훈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이날 최후 진술에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누구에게 욕을 해야 할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면서 사건 책임자인 강신욱, 신상규, 송명석, 안종택, 남기춘, 임철, 곽상도, 윤석망, 박경순, 노원욱, 임대화, 부구욱, 박만호, 전재기, 정구영, 김기춘의 이름을 하나하나 읊었다. 사건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던 김기춘은 박근혜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고, 서울지검 강력부장이었던 강신욱은 대법관을 지낸 뒤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활동했다.

국가의 실체는 폭력이다. 막스 베버는 국가의 본질이 '폭력의 독점'이라고 했다. 정권 유지를 위해 국가 권력은 철저히 국민을 수단화했다. 간첩조작 사건은 국가 권력의 속성과 폭압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인간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다. 그 피 위에 서 있는 지금, 더 이상 이런 억울한 분들이 생겨선 안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가해자의 이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가폭력 사건의 가해자를 정리·평가하기 위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의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인 김성수의 이번 신간은 그런 측면에서 더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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