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세월호 기억 및 안전전시공간(기억공간) 철거를 예고한 26일, 기억공간 주변에는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펜스가 둘러쳐져 있었다. 펜스 안에는 철거를 막기 위해 찾아온 시민과 유족이 35도를 넘나드는 날씨에도 검은 가림막 한 장에 기댄 채 더위를 견디며 앉아있었다.
펜스가 소리까지 막지는 못했다. 이날 유족들은 서울시의 기억공간 철거 결정 때문에 다시 한 번 혐오 발언에 노출됐다.
광화문역 7번 출구에서 광화문광장으로 건너가는 횡단보도에는 확성기를 든 사람이 "추모공간 철거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주변에는 태극기 모양의 스카프를 두른 사람과 가방에 성조기를 꽂고 선 사람 등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시민과 유족이 펜스 사이 횡단보도 방향 하나 남아있는 출입구로 방문객을 맞기 위해 자신들 쪽으로 가까이 올 때, 소리를 질렀다.
전날 밤 유경근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오늘 밤... 밤새 온갖 수모를 당하는 밤이 될 것 같습니다. 초저녁부터 몰려온 보수 유튜버들이 여태 기억관 펜스 너머로 카메라를 들이밀고 확성기로 온갖 모욕언사를 퍼붓고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기억공간 지키기 위해 한여름 1인 시위 나선 시민들
기억공간 주변에 유족에게 적대적인 시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철거를 막기 위해 찾아온 시민도 있었다. 이들은 광화문광장 주변에서 "오세훈 시장과 서울기는 세월호 기억관 철거를 중단하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고 간격을 둔 채 서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세월호가 철거된다는 소식을 보고 찾아왔다는 최보민 씨는 "전에도 4월 16일에 세월호를 추모하기 위해 왔는데 그때 많은 걸 느꼈었다"며 "어떤 협의도 없이 세월호 기억관을 철거하는 걸 보고 뭐라도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밝혔다.
최 씨는 "광화문광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세월호 투쟁과 함께한 역사가 깊다"며 "이곳이 그런 흔적을 아예 찾아볼 수 없게 바뀌는 건 저는 상상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삼풍백화점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사회적 참사들이 하나씩 지워져 가는 상황에서 이런 기억공간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23일 기억공간 철거 소식을 듣고 매일 광화문광장을 찾았다는 박도형 씨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데 화가 났다"며 "용산참사도 책임지지 못한 오 시장이 시민의 생명을 외면하고 안전을 소홀히 하는 행동을 또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 씨는 "유가족은 대체 공간이 마련되면 광화문광장 공사 기간 세월호 기억관을 임시 이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오 시장이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며 "세월호 기억공간을 팽목항에 두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오 시장에게 그렇다면 왜 기억공간이 광화문에 있으면 안 되는지 오히려 묻고 싶다"고 말했다.
자녀들이 세월호 단원고 피해 학생들과 같은 나이라고 밝힌 권광선 씨는 "부모의 마음으로 나왔다"며 "세월호 참사는 국가적 재난이고 세세손손 잊혀지지 않아야 할 하나의 역사이기 때문에 세월호 부모님뿐 아니라 국민이면 누구나 기억하고 참사의 재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유족에게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힘드시겠지만 많은 시민이 함께하고 있으니 힘을 내시면 좋겠다"고 전했다.
대안 위한 협의 요구하는 유족들...거부하는 서울시
기억공간 철거를 둘러싼 서울시와 유족의 대치는 지속되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5일 광화문광장 재조성 공사를 앞두고 유족에게 기억공간 철거를 통보했다. 이어 지난 23일에는 기억공간 물품을 정리하겠다며 직원들을 보냈다. 시민과 유족이 이에 반발해 물품 정리는 무산됐다.
전날인 25일, 서울시는 다시 한 번 유족에게 '26일 오전 9시 이전 철거작업을 시작하겠다'고 알렸다. 이날 오전에도 김혁 서울시 총무과장이 철거 협조공문을 전달하려 했으나 유족이 만남을 거부해 공문 전달은 이뤄지지 않았다.
세월호 관련 단체들은 지난 23일부터 세월호 기억관 철거를 막기 위해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이들은 "광화문광장이 아니더라도 서울 시내에 시민이 오가며 볼 수 있는 곳에 세월호 참사를 기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달라"며 서울시에 기억공간 존치나 대안 마련을 위한 논의를 할 수 있는 협의체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시는 이날 오전 입장문을 내고 "세월호 기억공간을 다른 장소로 이전 설치하거나 광화문 광장 조성 공사 후 추가 설치하는 것은 협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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