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13년 4월 중앙 언론사 보도·편집국장들과 오찬 간담회를 가졌다.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기자도 그 간담회에 참석했다. 당시만 해도 박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시점이었고, 이제 막 출범한 정권의 국정 운영 방향에 대한 질의와 응답이 오간 자리였다.
이날 간담회에서 유독 필자에게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었다. 한 보수 성향 인터넷매체 편집국장은 간담회 말미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해 질문했다. 이승만과 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 내용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는 이후 보수진영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그 편집국장은 박 전 대통령에게 '<백년전쟁> 다큐멘터리를 보았냐'며 이 다큐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박 전 대통령이 역사 문제에 관심을 갖고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박 전 대통령은 매우 진지하게 귀기울여 들으며 '알았다'고 호응했다.
박근혜 정권은 다른 정권보다 짧았던 임기 동안 유독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 교과서로 전환시키는 일에 집착했다. 물론 실패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16년 4월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뒤 가진 중앙 언론사 편집국 간담회에서도 국정 교과서 전환에 대한 고집을 드러냈다.
당시 기자가 20대 국회 선거 결과 다수당이 된 야당이 '국정 교과서 폐기' 법안을 내겠다고 밝힌 것에 대한 입장을 묻자 박 전 대통령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어떤 역사교육을 받고 자라야 우리나라의 미래가 잘 되겠냐, 자기 나라에 대한 자긍심과 긍지를 갖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거듭 국정 교과서에 대한 의지를 강조했다. 검인정 교과서의 "이념 편향성"에 대해서도 문제를 지적했다.
박근혜의 '국정 교과서'를 추억하게 만드는 트럼프의 "문화 전쟁"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해 미국 대선에서 패한 뒤 물러났지만,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광적인 지지자들을 바탕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정치 상황에서 최근 핫이슈로 등장한 '역사 교육 논쟁'을 보며 박근혜 정권 당시 '국정 교과서 논란'이 떠올랐다.
여전히 공화당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도 지난 11일 텍사스에서 열린 '보수정치행동회의(CPAC)' 2차 대회에서 "비판적 인종 이론을 무찌르겠다"고 본격적으로 불을 지피고 나섰다.
'비판적 인종 이론(Critical Race Theory)'은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가 개인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포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근간을 이룬다. 'CRT'와 관련해 가장 주목 받았던 것은 <뉴욕타임스>의 '1619 프로젝트'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 니콜 한나 존스가 2019년 시도한 이 장기 기획 프로젝트는 '노예제의 결과와 흑인들의 공헌을 중심에 놓고 미국의 역사를 다시 보려는 시도'였다. 1619년은 흑인 노예가 미국 땅에 처음 도착한 연도다. 미국도 초등, 중등, 고등 교육과정에서 노예제, 아메리카 원주민, 흑인 등 유색인 학살 사건 등 '어두운 역사'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다인종 사회가 되어 있는 학교 현장에서 '다름'이 '차별'이나 '소외'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 인종차별, 사회정의, 인권 등에 대한 교육의 요구가 커졌다. 이런 현실적인 필요성은 자연스레 교육 과정에 녹아들었다.
그러자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리전'을 치루고 있는 일부 공화당 주지사들(텍사스, 플로리다 등)이 '비판적 인종 교육'을 막겠다고 나섰고, 트럼프 전 대통령과 <폭스뉴스> 등 보수 언론은 장외에서 논쟁에 기름을 붓고 있다. 급기야 지난 6월 22일 버지니아주 라우던 카운티의 교육위원회 회의에서 CRT 교육과 트랜스젠더 정책에 반대하는 학부모 수백명이 몰려와 난동을 부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어 텍사스주 상원에서는 지난 20일 흑인,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등 민권운동 역사를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는 법안이 통과됐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KKK(Ku Klux Klan)'나 백인 우월주의 집단이 "도덕적으로 잘못됐다"는 내용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지점이었다. 또 이 법안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 미국 원주민 역사 등에 대해서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규정했다.
트럼프 진영과 공화당 내에서는 이런 흐름을 "문화 전쟁(Cultural War)"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들이 CRT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국정교과서 추진'을 밀어붙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논리와 유사하다. 이들은 인종차별의 역사에 대한 교육, 백인 우월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교육, 민권운동 역사에 대한 교육이 "미국에 대한 자긍심을 부정하고 사회주의에 물든 이론"이라고 문제 삼고 있다. 공화당 상원의원 조시 할리(미주리)는 CRT 교육을 금지하는 내용의 "미국 사랑 법"을 발의하겠다고 24일 밝혔다. 그는 자신의 법안이 미국이 "체계적으로 사악한" 인종차별 국가라는 "좌파가 퍼뜨리고 있는 잘못된 정보"에 대항할 것이라고 말했다. 할리 의원은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로 4월 통과된 아시아 증오범죄 관련 법안인 '코로나19 증오범죄법'을 유일하게 반대(찬성 94명, 반대 1명)한 의원이기도 하다.
역사를 '승리', '자긍심', '애국' 등 지배자들의 키워드로만 채우기 위해 피억압자들의 고통을 지워버리고 이를 자라나는 미래세대에 세뇌시키려는 시도는 권위주의적 정권의 공통적인 속성이다. 일찍이 박근혜 정권에 앞서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도 2012년 집권 뒤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고 한국에 대한 식민지 수탈의 역사를 지우려는 '우익 교과서' 채택률을 높이려 애썼다.
아직은 트럼프와 그 추종자들이 선전포고한 "문화 전쟁"이 어떻게 결론날 지는 모른다. 이들이 '전선'을 그은 일차적 목표는 2022년 중간선거, 2024년 대통령선거다. 선거를 앞두고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려는 목적을 위해 활용하기 좋은 수단으로 보인다. 현재로선 물리력까지 행사하는 트럼프 진영의 힘이 더 세보인다. 그러나 한때 '선거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으로 물러났다. 결국 그 나라의 역사는 '각성된 국민들'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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