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2030세대는 '공정'을 중시하는 세대로 인식된다. 공정이라는 프리즘으로 많은 정치적, 사회적 사안들이 해석되고 논란이 된다. 이 세대에 속하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공정이라는 화두를 전면화하면서 이른바 '이대남'의 소외와 사회적 불만을 쟁점화하고 있고 여성가족부의 폐지 주장까지 나아갔다.
이준석의 신선함과 한계
여성할당제 폐지, 여가부 폐지, 통일부 폐지 등의 여러 사안에 대해, 나는 이준석의 입장에 대해 비판적이다(여가부 폐지에 대한 입장은 다음 참조). 그러나 기성세대와 달리 기존의 고정화된 인식 프레임에 구애받지 않고 '쿨'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예컨대 나중에 입장을 번복하기는 했지만 선별복지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당내 분위기에도 전국민재난지원금에 선뜻 합의하거나, "도쿄올림픽을 양국 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자는 제안을 하거나, 경제적 대국화에 대응하는 유연한 외교를 주장하기도 한다. 당내 보직도 기성 정치인이 나눠 가지던 관행에서 벗어나 나름의 방식으로 공정한 경쟁 방식을 도입했다.
이렇듯 기성세대가 부여한 고정 관념에 구애되지 않고, MZ세대의 시각으로 ‘경계’들을 넘나드는 시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점이 있다. 그러나 이준석 대표 역시 정치에는 지지 확대를 위한 ‘득표 정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사회를 향한 ‘가치정치’도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87민주화체제의 전환적 위기, 혁신교육의 전환적 도전
나는 이 글에서 '공정과 평등'의 관계를 통해 우리 사회의 진보가 보수적 공정 프레임을 넘어서는 더 높은 평등 프레임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려 한다. 이 논의를 위해서는 먼저 지난 30여 년 간 지속되어져 왔던 이른바 '87 민주화체제'가 '전환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을 함께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위기에는 민주화체제가 전제하고 있었던 '평등프로젝트'의 한계가 놓여 있다. 진보가 이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은 2030세대가 제기하는 '더 높은 절차적 공정'과 '더 높은 기회의 공정'에 대한 ‘절규’까지도 포용해내는, 한 단계 높은 '평등프로젝트'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육영역에서는 지난 10여 년간의 '혁신교육 1.0시대'에서 '혁신교육 2.0시대'로 이행하는 전환적 도전을 맞고 있다. 지난 10여 동안 혁신학교를 포함해 다양한 교육주체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아이들을 성적으로 줄 세우는 교육, 협력보다는 경쟁을 가르치는 교육, 권위주의적 문화 대신 민주적 문화가 꽃피는 학교를 위한 혁신교육의 새로운 길이 개척되었다.
그러나 혁신교육의 성과가 '8부 능선'을 바라보는 시점에 이르러 새로운 도전들이 등장하고 있다. 혁신학교에 대한 일부 학부모들의 반발,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혁신의 지체, 혁신의 보편적 확산의 정체, 대안적인 대입제도가 도입되지 않고 학벌체제가 여전히 견고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학부모들의 이중 부담, 인공지능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혁신 더하기의 부족, 혁신교육의 노력에도 여전한 교육격차와 양극화의 심화 등이 그 예다.
성찰적 시각으로 본 전환적 위기의 양상들
이러한 전환적 도전들을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87년 이후 민주체제의 전환적 위기'와 궤를 같이한다. 알다시피 우리 사회는 8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서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주의 시대로 바뀌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민주화체제, '87년 체제', '87년 민주화체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체제는 민주주의라는 시대정신을 배경으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이 주도하는 시대였고,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원리에 따라 다양한 정치개혁, 검찰개혁, 사회경제적 개혁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었다. 그 성과로 한국은 이미 아시아에서는 대표적인 민주주의 선진국이 되어 있고, 글로벌 민주주의가 퇴조하는 흐름에서도 촛불 시민 혁명을 이루어 내는 나라로 존중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시대 역시 다양한 전환적 위기의 양상들을 노정하고 있다. 민주화운동 세력 주체들의 문제점(이른바 ‘내로남불’)이나 체제의 부분 정책들이 대안적인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문제점(LH사태나 부동산 문제처럼 모든 민주정부에서 부동산가격이 폭등하는 위기에 직면하는 것 등)을 드러내고 있다.
‘사물은 변화·발전한다’는 고전적인 명제에 비추어 보더라도, 한 시대는 그 지배 정신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민주주의를 시대정신으로 하는 민주화 시대라고 하더라도 모든 국민이 동일한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계급‧계층별로, 세대 간에, 남녀 간에, 지역 간에 이해관계가 다르다.
60~70년대에는 다양한 차이들이 '조국 근대화라는 지배적 정신'에 의해 헤게모니적으로 통합된 것이었고, 80년대 이후에는 정반대의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에 의해 헤게모니적으로 통합되었을 뿐이다. 전환적 위기를 겪게 되면 이러한 차이들은 다시 새로운 헤게모니 구성을 둘러싼 각축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 시대는 구조적, 주체적, 우연적 요인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변화한다.
80년대 이후 민주화 시대도 그렇다. 그 시대를 대표했던 86세대가 이제는 기득권세력인 것처럼 보이면서 많은 비판을 받는 것이 단적인 징후다. 물론 이런 비판이 모두 진실은 아니지만, 우리가 어떻게 전환적 위기를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
2030세대의 공정담론의 눈으로 보면 새로운 평등프로젝트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해답이 보인다. 87년 체제를 이끌었던 86세대는 이제 5060세대가 되었다. 이 집단은 이미 우리 사회의 주류이고 기성 체제의 중심에 있다. 그 옛날 거리에서 화염병을 던지던 청년들이 지금은 교수, 대기업 간부, 벤처기업 사장, 대기업의 노무관리자, 변호사, 정치인 등이 되어 있다. 젊은 세대의 눈으로 보면 86세대는 정치적으로, 혹은 사회경제적으로 '힘 있는' 기득권으로 위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혜택받은 세대와 기회와 공정이라도 집착해야 하는 세대의 사이에서
이러한 변화의 근저에는 당연히 사회경제적 조건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5060세대가 된 86세대는 60~70년대 산업화의 ‘성공’에 뒤이은 산업의 팽창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대졸 출신들의 경우에는 취업에 애로를 느끼지 않았다. 86세대들은 2~3개의 좋은 직장을 놓고 어느 직장으로 들어갈까를 고민했던 운 좋은 세대이기도 하다. 이와 동시에, 87년 민주혁명에 뒤이은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민주노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86세대는 산업의 팽창 시대이자 민주노조 확대의 시기를 살았고 그런 조건에서 비교적 쉽게 취업하고 승진할 수 있었다.
이런 상태는 90년대 후반 경제위기를 계기로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역전된다. 신자유주의적 원리와 지향이 우리 경제와 기업, 국가정책에 깊게 내습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생겨났다. 86세대는 민주노조의 힘을 방패 삼아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따라 운영하던 기업의 공세에 저항했다. 덕분에 자신들의 노동조건이나 처우가 급격히 악화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은 86세대 대신 신규 진입자, 즉 포스트 86세대들(지금의 2030세대도 포함된다)에게 불이익을 강요하거나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조건을 강요했다. 그 결과 많은 젊은 세대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하지도 못하거나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한 조건에 놓이게 되었다(여기서는 86세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통상 386세대라고 하고, 현재는 586세대가 된 세대를 지칭한다).
더구나 자본은 산업의 고도화를 위한 이른바 ‘생력화(省力化)’의 과정, 즉 자동화를 더욱 빠르게 진행했다. 이에 따라 신규 첨단 혹은 선진 산업 분야의 경우 일자리가 늘어났지만, 전통적인 노동시장은 축소되거나 비정규직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는 86세대와 젊은 세대의 현격한 차이를 만든 노동시장의 이중화로 나타났고 사회 양극화 심화의 중요한 기반을 형성했다.
물론 이것이 민주화 세대가 의도했던 결과는 분명 아니다. 86세대는 나름의 위치에서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뿐이다. 그러나 86세대의 의도와 무관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기성세대의 보호막이 청년 세대의 희생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직시해야 한다.
2030 젊은 세대들은 86세대나 기성세대와 비교하면 '스펙'도 훨씬 좋다. 이것은 아주 많은 노력을 통해 힘들게 쌓아 올린 것이다. 그러나 이전 세대와 달리 많은 청년들이 정규직으로 취업하지도 못하거나 불안정한 노동 상황에 놓여 있다. 86세대들은 좋은 조건의 취업 기회와 취업 이후 근로조건의 악화를 막는 노조의 혜택이라는 이중의 혜택을 받았지만, 젊은 세대는 그런 혜택과 너무 먼 조건에 놓여 있다.
이런 '구조적' 조건 속에서 젊은 세대들은 이 구조가 강요하는 방식대로 기회의 공정과 절차의 공정에 더욱 집착하는 방식으로 고통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젊은 세대가 더 높은 수준의 기회의 공정, 더 투명한 절차의 공정을 요구하는 것은 타당하다. 문제는 정치적 주류세력인 86세대가 젊은 세대의 타당한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이들이 수용할 수 있는 더 근본적인 구조적 평등을 실현하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구조개혁 없이 그 구조 내에서 기회의 공정과 투명한 절차만을 보장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해결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2가지 혜택'을 받은 86세대와 '기회의 공정'에라도 집착해야 하는 2030 젊은 세대의 사이에 서 있다. 물론 86세대 중에서는 기득권에 편입되지 않고 노동 현장으로 간 이들도 있고, 시위 현장에서 죽은 이들도 있다. 그리고 90년대 대학생이었던 세대들은 현재의 2030 세대보다 더 심각한 IMF 위기를 겪기도 했다. 2030 세대 내의 편차도 크다. 그럼에도 86세대의 사회적 담론은 기득권의 담론으로, 2030 세대의 담론은 기회와 절차의 공정이라는 담론으로 등장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집값이 너무 올라 집 사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2030세대에게 분양과정에서의 ‘작은’ '기회의 불공정'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심지어 약자를 배려하는 쿼터제가 자신의 이익을 불공정하게 침해한다고 느끼기도 한다. 심각한 고용불안과 사회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자신의 자식들에게 부모의 크지 않은 자리라도 물려주고 싶어 하는 '안타깝기까지 하는' 일부 대기업 노조의 '고용세습' 단체협약은 젊은세대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불공정행위로 인식된다.
나와 관련된 사인인데, 자사고-외고 폐지를 주장하는 개혁 주체로서의 교육감의 자녀들이 외고를 다닌 것에 대해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시선을 갖는다(이에 대해, 나는 3주년 회견에서 "비록 교육감이 되기 8~9년 이전이고, 현재로부터는 15년여 전의 일이지만, 자사고-외고 폐지를 주장하면서 자녀들이 외고에 다녔다며 '내로남불'이라고 하는 비판에 대해서, 스스로 부족한 점이 있었음을 겸허하게 수용하고자 하며, 저를 돌아보는 계기로 합니다. 바로 그렇게 완전하지 못한 존재로서의 조희연 교육감이 자사고 개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주기를 바랍니다. 자사고를 보내는 학부모들의 마음도 이해합니다. 돌을 던진다면 죄송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프레시안에 쓴 2019년 칼럼에서도 이 점을 언급한 바 있다. 바로가기).
우리 자신의 ‘기득권적 위치’까지 성찰하며 대안적인 사회경제적 개혁으로
우리가 위기에 빠진 구조를 넘어 한 단계 더 높은 개혁의 단계로 나아가려면, 진보적 지향을 가진 모든 세대와 개인, 집단 간의 연대와 협력이 필요하다. 특히 이미 정치적 주류의 위치에 이른 86세대나 진보를 지향하는 기성세대들이 젊은 세대의 요구를 반성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화 시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평등프로젝트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혁신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미 주류가 된 86세대가 세대를 관통하는 진정한 지지를 얻으려면, 비록 결과론적인 것일지라도 자신의 기득권적 위치를 성찰하면서 자기희생적이고 대안적인 사회경제적 개혁방안을 만들고 선도하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 젊은 세대가 요구하는 더 높은 절차적 공정을 반성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 절차에 갇히지 않는 더 높은 평등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한다.
교육의 예를 들어보자. 그동안 초중등 교육은 다양한 혁신적 개혁이 이루어져 왔고 그 성과가 누적되어 있다. 그러나 혁신적 개혁만으로는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엄존하는 대학 입시경쟁은 여전히 초중등 교육을 억누르면서 학부모와 학생들을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과거형 줄 세우기 경쟁에 기반하는 교육이 초등학교 수준에서는 극복되고 있지만,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가게 되면 다시 줄 세우기 입시경쟁의 블랙홀로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정작 초중등교육을 규정하는 대학입시 및 학벌 체제, 나아가 대학(서열화) 체제의 변화는 여전히 요원하다. 초중등교육의 개혁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학부모의 바람과 학생의 고통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대입제도에 대한 학부모의 불만을 배경으로 ‘수능 확대’라고 하는 역진적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제 개혁은 이제 뒤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혁신학교도 근본적으로는 학교'민주주의'운동의 성격으로 출발했다. 이제 학교민주주의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바를 더 높은 교육체제 개혁을 통해 실현해내는 단계로 이행해야 한다.
전진이냐 후퇴냐 : 전환적 위기의 미래를 둘러싼 각축
4.7보궐선거 이후 2030세대의 투표경향을 보면서 일부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해체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보수와 진보의 내포와 외연’, 그리고 여기에 포함되는 주체들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 보수와 진보 자체의 해체라고는 볼 수 없다.
87년 민주화체제가 민주주의를 핵심 개념으로 86세대가 중요한 주체로 참여하는 보수와 진보의 구도였다면, 우리는 이미 포스트-87년체제로 이행하는 큰 전환적 흐름에 와 있다. 거시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는 86세대와 2030세대를 포괄할 수 있는 포스트-87 민주화체제 진보의 내포와 외연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전환적 위기를 해결하는 경로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공정 역시 어떤 공정이냐, 혹은 공정이냐 평등이냐를 둘러싼 쟁투와 각축이 존재한다. 기회의 공정은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과정의 정의로움을 의미한다. 평등은 그 승자와 패자의 소유와 분배, 삶의 구조적 차이의 정의로움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는 전환적 위기를 해결하는 경로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컨대 공정 역시 쟁투와 각축의 대상이다. 어떤 공정이냐 혹은 공정이냐 평등이냐를 둘러싼 각축이 존재하는 것이다. 기회의 공정은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지는 과정의 정의로움을 의미한다. 평등은 그 승자와 패자의 소유와 분배, 삶의 구조적 차이의 정의로움을 의미한다. 최근 부각되는 것처럼, 2030대가 기회의 공정, 절차의 공정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도 유의미한 것이지만, 민주화시대를 뛰어넘는 한단계 높은 평등프로젝트를 통해 근원적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등의 좌절에 따른 분노에서 제기되는 공정에의 희구를 더큰 평등의 희망으로 연결되느냐 않느냐를 둘러싼, 즉 전환적 위기의 미래를 둘러싼 각축이 존재한다(최근 윤희숙 의원이 ‘귀족노조 타파’를 1호 공약으로 내건 바가 있다. ‘귀족노조가 죽어야 청년이 산다’라는 식으로 청년의 분노를 귀족노조 혹은 노조문제와 연관시키고 있다. 이것 역시, 청년의 분노를 특정한 방식으로 프레이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가기).
2030세대가 강조하는 기회의 공정, 절차의 공정성은 그 자체로서도 유의미하지만, 한 단계 높은 평등프로젝트와 통합해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평등의 좌절에 따른 분노에서 제기되는 기회적, 절차적 공정에 대한 요구를 더 큰 평등에 대한 희망으로 연결하는 문제는 전환적 위기의 미래를 둘러싼 각축의 대상이 될 것이다.
새로운 희망의 깃발, 기표, 그리고 대중화
한국은 이제 정치적 전환기로 들어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새로운 희망의 깃발을, 새로운 희망의 기표를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대중화해야 한다. 나는 각각의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단서는 이미 다양한 정책적 제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예컨대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신복지라는 이름으로, 전 국민 고용보험이라는 이름으로, 또 보수진영에서는 안심소득이라는 이름으로 제기되고 있는 정책 담론은 이미 87년 민주화체제를 넘어서는 원리를 담고 있다. 지금은 후퇴했지만, 한때 국민의힘이 1호 공약으로 기본소득을 제시했던 일도 있었다.
교육영역에서 보면, 보편복지의 최대 성과는 모두가 인정하듯 '친환경 무상급식'이고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와 있다. 나는 마지막 영역으로 '유아 무상급식'을 고민하고 있으며, 식단선택제 도입도 고려하고 있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다음 침공은 어디?’에 보면 프랑스 무상급식 사례가 나오지만, 나는 프랑스의 일부 무상급식보다 우리가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개개인의 선호를 존중하는 식단선택제만 도입하면 세계 최고 수준의 완벽한 무상급식이 가능하다. 채식선택제는 이미 도입단계에 와 있다.
지난 7월 6일 3주년 기자회견에서는 이런 구상을 포함해 혁신교육 다음 단계의 목표로 '2025 교육체제'를 수립하는 교육희망 프로젝트를 제기했다. 고교학점제, 자사고 및 외고의 일반고 전환, ‘2022국가교육과정’이 중등교육에 전면화되는 해인 2025년을 전환기로 삼고자 한다.
이처럼 이제 우리는 더 높은 공정의 요구에 주목하면서도, 더 높은 평등의 희망까지도 담보할 수 있는 다양한 희망의 기표를 만들어가야 한다.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이런 목표는 '더 높고 더 깊고 더 넓은' 민주주의일 수도 있다. 물론 다른 언어와 담론을 통해 이 희망을 구체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87 민주화체제의 상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평등프로젝트의 구상과 대중화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지난 7월 1일 서울시 의회 본회의에서 이호대의원이(구로구)이 '이준석의 공정프레임'에 대해 질의한 것에 대한 답변을 기초로 재구성하고 보완한 것이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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