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육군은 어떻게 패배했는가!
일본은 국력과 전력의 한계를 초월하여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예상 밖의 상대와 마주한 일본 육군은 구체적이고 명료한 전략을 갖고 있지 못했고, 이는 일관성을 상실한 전쟁지도로 나타났다.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신감과 상대에 대한 적확한 인식의 결여는 무모한 구상으로 이어졌고, 이에 따른 작전 계획은 조령모개와 같이 수시로 바뀌었다. 도그마에 안주하는 경직된 조직은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고, 퇴폐적인 전술은 그 상징이었다.
일본 육군은 전략, 작전, 전술이라는 전쟁의 모든 층위에서 정보의 가치를 경시했고, 이는 현재 직면한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방해했다. 무형적 요소인 정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유형적 요소인 물질에 대한 무시를 낳았다.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항상 대립했고, 이에 따른 극단적인 비효율은 결국 전쟁을 패배로 이끈 핵심적인 원인이었다.
태평양전쟁 전 기간에 걸쳐 일본 육군의 중추에서 근무한 저자가 반성적 고찰을 담아 지은 이 책은 1951년 출간 이래 70년간 38쇄를 거듭했다.
책 속으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래 일본은 선진국과 대등한 국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부국강병과 문명개화文明開化가 제창되었고, 문명개화의 주된 목적은 부국강병에 있다는 발상에서 정치에 대한 국방의 우위가 자리 잡았다. 만주사변 이후 소련과의 교전을 상정하고 세계열강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일독이日獨伊삼국동맹을 맺었으나 이후 급변하는 정세 속에 미영美英과의 전쟁도 고려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과는 교섭을 하면서도, 작전 준비를 진행하는 화전和戰 병행의 자세로 임했다. 1941년 9월 6일 어전회의에서는 ‘일본은 자존자위를 완수하기 위하여 미영란美英蘭을 상대로 전쟁을 불사하기로 결의하고, 대략 10월 하순을 목표로 전쟁 준비를 완정完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본영은 개전일을 12월 8일로 결정했다.
대본영은 남방작전에 착수했고, 남방작전에서 육해군의 항공부대가 긴밀히 협력하여, 작전 기간 동안 제공권을 확보한 것이 성공의 주요 요인이었다. 당시 미군은 본국에서 동아시아의 전장으로 병력을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지 못했기에 일본군은 어려움 없이 연합군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2년 후반기부터 태평양전쟁의 중심이 과달카날섬 방면으로 옮겨졌다. 미군은 과달카날 방면에서 반격을 개시하여, 일본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대본영은 미군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판단했고, 과달카날섬의 공방전이 향후의 작전 지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의 미드웨이 작전은 미드웨이섬을 공략하여, 하와이 방면에서 일본 본토로의 미군의 기동작전을 봉쇄함과 동시에, 공략 시에 출현할 가능성이 있는 미 기동함대를 격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한편 미드웨이섬 부근의 미군은 이일대로以逸待勞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일본 해군의 항모 세력은 미드웨이섬 근해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치키지대一木支隊가 상륙하기도 전에 이미 승패는 결정되었다. 항모 세력의 현격한 감소는 제공권의 상실로 이어졌고, 이는 곧 제해권의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남태평양 방면에서 일본군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획득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일본은 미드웨이, 알류샨 작전, 과달카날섬 작전에서 연이어 실패했다. 실패의 첫 번째 원인은 남방 제1단작전의 종료 이후, 대본영이 공세종말점攻勢終末點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던 점, 두 번째 원인은 보급이 지속되지 못했던 점에 있었다. 구축함으로 육군 병력을 급파하는 상황에서 병기의 휴행이 극도로 제한되었고, 이치키지대의 비행장 공격 실패는 이에 기인한 부분이 컸다. 반면 일본군의 비행장을 점령한 미군은 이를 기반으로 제공권과 제해권을 획득하여 일본군의 보급·수송을 완전히 두절시켰다.
대본영은 1944년 1월 7일 남방군 총사령관에게 버마 방위를 위해 당면한 적을 격파하고, 임팔Imphal 동북부에 있는 인도의 요역을 점령·확보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일본군은 상대를 경시하고 보급을 무시한 작전을 펼쳐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 본토 공격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오지마硫黄島도 미군의 공격에 무너졌다. 6월 19일에 일본 해군이 전세를 만회할 마지막 기회로 생각한 마리아나 해전, 즉 아고작전ア號作戰이 개시되었으나 연합함대는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했고, 사이판섬의 지상전은 격렬하게 전개했지만 전력 대부분을 상실했다. 마리아나諸島의 상실로 일본은 중부 태평양 방면의 절대국방권絶對國防圈에 큰 구멍이 생겼다. 반면 루손섬Luzon Island의 격전과 병행하여 미 해군은 필리핀 점령을 개시했다. 이 무렵 태평양전쟁의 초점은 오키나와로 옮겨졌고, 오키나와의 작전 역시 막바지에 접어든 상태였다. 이에 일본은 본토에서의 전쟁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본토의 방비 강화로 육군과 해군은 여러 영역에서 치열하게 경합했다. 한편 전황의 부진, 공습의 격화, 식량의 부족 등으로 군에 대한 불신은 염전厭戰 분위기로 이어졌다. 1945년 7월 더욱 격화된 공격에 이어 미국은 8월 6일 08:00경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8월 9일 두 번째 원자폭탄을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결국 8월 14일 열린 어전회의에서 종전의 결단이 내려졌다. 이로써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패전으로 막을 내렸다.
<하야시 사브로 지음, 최종호 옮김, 논형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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