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똥!" 배달부가 한 권의 책을 문 앞에 놓고 갔다. 이창봉의 <미국이라는 나라 영어에 대하여>(이창봉 지음, 사람in 펴냄)이다.
젊은 날 시국 탓으로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나는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간 분들을 보면 부럽다. 나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분들을 만나면 만나자마자 미국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배운다.
어떤 이는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그렇게 말했다. "한국인들도 엘리베이터를 만들 줄 아나?" 1961년 미국에 갔고, 건너간 지 35년 만에 돌아온 1996년 어느 날이었다. 하도 한국인의 문화가 개판이라고 하길래 나는 거꾸로 물었다. "미국인의 문화는 뭐가 좋은가요?" 나는 심오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헐…. "미국인들은 끼어들기를 하지 않아요."
1981년 미국으로 망명한, 5.18 광주민중항쟁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은 달랐다. 미국에서 망명 생활하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혁대를 풀지 않는다'라고 다짐하였다. 이런 다짐은 나도 할 수 있다. '영어를 쓰지 않는다'고 다짐하였다. 이승만처럼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어떻게 영어를 쓰지 않고 사나?
윤한봉 선생은 1994년도에 귀국하였고, 2007년 타계하였다. 2016년 나는 영어로 윤한봉의 평전을 집필하였다.
"2007년 6월 27일 한 영혼이 하늘나라로 갔다"고 쓰고 싶었다. "June 26 of 2007, a soul of a man went up to heaven"로 옮겼다. 나의 서툰 영어를 다듬기 위해 두 언어 구사자(bi-lingual)에게 감수를 맡겼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초·중·고교를 다닌 그는 "a soul of a man went up to heaven"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틀린 문장은 아니지만 미국인들이 쓰지 않는 표현이란다. 간단히 말하여 나의 영어는 '콩글리시'라는 것이다. 대신 그는 "Yoon passed away on June 27, 2007"로 고쳤다. 나는 후끈거렸다. 그때 겪은 열패감이 잊히지 않았다.
그런 데다 나는 오늘 <미국이라는 나라 영어에 대하여>를 열자마자 5년 전 겪은 일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이창봉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주체의 문제의식에 따라 대상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말일 것이다. 이창봉에 의하면 'go to heaven'은 결코 콩글리시가 아니었다. 서구인의 문화와 역사에 뿌리를 둔, 족보가 있는 영어였다. 이내 나의 영혼은 <미국이라는 나라 영어에 대하여>로 빨려 들어갔다. 아니 사로잡혔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왜 'The devils'라고 옮기지 않고 'The possessed'라고 영역하는지 나는 까닭을 몰라 어리둥절한 적이 있었다. 이창봉은 또 말한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창봉에게 붙들린 것이다.
이창봉은 미국의 차 문화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배우자와는 이혼해도 차 없이는 못 산다." 재미있는 안내였다. 미국인들은 누구의 신세도 지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와 자립을 주는 자동차를 중시하게 된 것이라고 그는 중계하였다. 이어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이창봉의 영어도 좋았지만, 이창봉의 균형 잡힌 역사관도 좋았다.
이창봉은 대학원 수학 기간과 교수 재직 시절, 단어 학습을 위해 flash card를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까지 만든 카드의 숫자가 1000장 이상이 된다나? 학습에는 비법이 없다. 꾸준하고 우직하게 단어 공부를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게 모은 표현들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That's the way the cookie crumbles(나쁜 일은 연달아 일어난다)"이라고 하면서 cookie crumbles을 설명해 나갔다. 그러면서 이창봉이 이 표현을 처음 접한 것은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전임강사로 재직하던 1998년 4월 23일이었다고 회상했다. 나는 돌이켜 보았다. 그때 내 나이 마흔이었다. 나는 그때도 배움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여 꿈속에서 미국 유학을 가곤 했다.
내가 만일 새라면, 나는 이창봉의 강의실로 날아가고 싶다. 날아가 창가에 앉아 이창봉의 젊은 날 형설의 노력을 기울여 습득한 앎을 따라 배우고 싶다. 깨달음만큼 영혼을 들뜨게 하는 것도 있던가?
<미국이라는 나라 영어에 대하여>는 고급 영어 학습서이다. 뜻도 모르고 달달 암기만 하던 청소년 시절의 영어 학습서와 달랐다. 하나의 단어가 새로운 뜻을 갖게 되는 은유의 구조를 낱낱이 밝혀 주었다. 나는 하루 종일 기쁜 마음으로 이창봉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그의 강의는 누에 똥구멍에서 나오는 비단실처럼 하염없이 이어졌다. 인상적인 팁 10개만 추려 본다.
이창봉은 영어만 말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 문화를, 정확히 말하여 미국 문화와 한국 문화의 차이를 말하였다.
나는 한국인의 음주 문화에 대한 이창봉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밤늦도록 술 한 잔 기울이면서 한국인의 음주 문화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 단, 폭탄주는 사양한다.
한국인의 Avoiding Uncertainty 성향을 영어로 표현하고자 시도한 이창봉의 성실함은 인상적이었다. 외국인을 만나 한국 문화를 어떻게 설명할지 좋은 표현을 찾지 못해 답답할 때가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 영어에 대하여>를 읽으면 외국인에게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정돈된 문장들이 좌르르 나온다. 주저할 것이 없다. 그냥 이창봉이 차려준 영어 밥상에서 숟가락 하나 들면 된다.
이창봉은 한국인의 문화 정체성에 대해서도 뼈있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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