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의 연구보고서 '국민의 건강 수준 제고를 위한 건강 형평성 모니터링 및 사업 개발-노동자 건강 불평등'에 따르면 업무상 사고 발생률은 사업체 규모가 커질수록 낮았다. 5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인구 1만명당 115명으로 가장 높았고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는 30명으로 가장 낮았다. 업무상 사고로 인한 사망률 역시 5인 미만 사업장에서 가장 높았다."(☞ 관련 기사 : <연합뉴스> 5월 18일 자 '5인 미만 사업장 사고발생, 300인 이상의 3.8배…건강편차 심각')
이런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혹시 처음 들은 사람이라도 놀라지는 않을 터. '업무상 사고' 또는 산재가 불평등하다는 것은 '상식'이라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보고서는 사업체 규모를 불평등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 개인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물으려는 것은 '이 불평등을 당연하게 여기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이다. '공정(fairness)'의 문제라 할 수도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더욱 목소리를 높이는 주장을 따르면(그것을 '공정'이라 부르든 '능력주의'라 부르든 또는 '형평'이라 주장하든), 이런 불평등은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문제가 있지만 불가피한 정도.
개인적으로는 유감이지만, 아예 사정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노력해서 대기업에 취업하면 될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그런 불평등이 없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는 '보편성'과 한국의 경제와 기업을 고려해야 한다는 '상황론'까지 보태면, 그런 곳에 취업해 위험에 노출된 사람은 뭘 잘 모르거나 능력이 모자란 '루저'가 되기에 십상이다. 지금 분위기는 '운'이 작용하는 데 동의하는 사람조차 '운도 능력'이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창 문제가 되는 세계적인 백신 불평등은 어떨까? 우리는 개인이나 집단 차원을 넘어 국가 간의 '역사적' 불평등을 목격하는 중이다.
"일부 서구 국가에서 백신을 최소 1회 이상 접종한 인구 비율은 50% 이상. 그에 반해 아프리카는 고작 2%대." (☞ 관련 기사 : <TBS뉴스> 6월 18일 자 '[백신 불평등 ③] 돕겠다면서...부자 나라들, 또 '백신 싹쓸이'')
이를 두고도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또는, 한국처럼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경제적 성취를 이룬 국가에서는(그리고 '모두가 피땀 흘려 노력'했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그런 불평등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를 떠도는 공정과 능력주의 담론과 얼마나 다를까.
다시 확인하지만, 우리는 원칙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순위가 높은 과제라고 생각한다. 공정과 능력주의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코로나19와 백신까지 생각하면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불평등만큼 중차대하며 시급한 과제가 없다고 판단한다.
또 한 가지, 불평등이 심하면 사회적 불안이 심해지고 경제가 성장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평등과 불평등을 다른 무엇인가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니다. 경제성장이나 사회불안, 분쟁과 국가 안보와 무관하더라도, 불평등은 인간 삶과 사회의 궁극적 의미와 관련된 가치라 여긴다. 도구와 수단이 아닌 이른바 '내재적' 또는 '본질적' 가치.
'2등 국민'이나 '흙수저'는 그냥 물질적 조건이 어렵거나 지위가 어떻다는 수준을 넘어 '어떤 삶인가?'와 '어떤 공동체인가?'를 묻는 근본 질문과 연관이 있다. '저학력', '비정규', '장애인', '지방' 등도 마찬가지, 그냥 개인 특성을 넘어 한 인간의 전체이고 정체성이 된 지 오래가 아닌가. 그러니 불평등이 차별과 낙인, 무능감과 자기 비하, 불안과 불안정 등을 통해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연결하자면, 공정과 능력주의는 이런 불평등에 대응하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아야 한다. 어떤 불평등은(예를 들어, 연고주의가 원인인) 제도가 공정하면 나아질 수 있지만, 어떤 불평등은 제도적 기회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그나마 능력주의에 기댈 수 있는 것은 일부 중 일부일 뿐이다.
제 손으로 돈을 벌어 학교에 다녀야 하는 사람에게 학력 성취의 가능성이란? 시간급으로 임금을 받는 '시간 빈곤' 노동자에게 건강보험이라는 의료 이용의 기회란? 사회경제적 조건이 불리한 가정의 자녀에게 인지발달은 어떻게 가능할까. 가사와 보육 부담을 진 여성이 직장에서 더 높은 성과를 올릴 가능성이란?
그래도 지금 시비가 긍정적인 점은 한국 사회에서 공정, 능력주의, 평등과 불평등, 분배 정의, 기회인가 결과인가 등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논의할 '기회'라는 것이다. 한참 전부터 우리는 불평등을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지금까지 경과는 그렇지 못했다.(☞ 관련 기사 : '서리풀 논평' 2014년 7월 21일 자 '폭주하는 의료 영리화, 피케티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의제화가 중요한 것은 학술과 이론 차원의 정치철학, 사회윤리, 정의론을 넘어 공정과 정의가 '사회화'하고 '정치화'해야 우리 사회와 공동체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도 그렇다. 최저임금이나 비정규직 전환 문제가 공정과 능력주의 논의의 기폭제가 된 것이 우연이 아니다.
이 기회를 살리자. 이번이야말로 우리는 공정과 능력주의 시비가 불평등 논의로 전환되고 또 확대되기를 바란다. 무엇을 위한 공정인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 능력주의인가를 열심히 따져야 한다. 모든 것이 불평등과 연관이 있다고 얼버무리는 것은 금물, 유행에 따라 흔들려 지나갈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공정과 능력주의 논의가 각자도생의 무기가 아닌, 불평등을 이기는 '공생'과 '공영'의 원리로 뻗어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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