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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 이름 아닙니다...다시 현장으로 간 '구동파' 그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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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 이름 아닙니다...다시 현장으로 간 '구동파' 그 언니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 ② 구로동맹파업투쟁의 김준희 님을 만나

지난 40년간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바뀐 것도 있으나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은 6월 5일 전설의 투쟁을 했던 여성노동자들을 모시고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 이야기마당을 개최한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삶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그녀들이 해왔던 투쟁과 현재의 고민을 연재한다. 편집자.

0. 연재 순서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① 동일방직 해고자 김용자 님을 만나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② 구로동맹파업투쟁의 김준희 님을 만나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③ 기륭전자분회의 유흥희 님을 만나

*행사 참여 링크 http://bit.ly/21바람후원행사신청

▲김준희 사무금융 보험설계사지부 한화생명지회장 ⓒ사무금융노조 보험설계사지부

"'구동파'가 뭐에요? 무슨 조폭 이름 비슷한데 조폭은 아닐 테고."

전설적인 투쟁을 했던 여성노동자들이 함께 모여서 여성노동자의 삶과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더니 대번 나오는 질문이 '구동파'가 뭐냐는 것이다. 36년 전 사건이니 사실 운동사를 공부하지 않으면 생소할 수 있다. 구동파는 1985년 구로 지역에서 벌어진 '구로동맹파업투쟁'을 줄인 말이다. 해방 정국 이후의 최초의 정치적 동맹파업이라고 평가받는 투쟁이다.

1980년대 중반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서슬 퍼런 독기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제하던 시대다. 노동조합이 지금처럼 산업별로 묶여있지도 않은 때이니 단위 사업장을 넘어 동맹파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시작은 '대우어패럴'이라는 사업장의 노조간부 구속으로 촉발됐지만 정권의 노조탄압에 맞서려는 지속적인 노력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85년 6월 22일 경찰은 대우어패럴 노조사무실에 들어와 김준용 노조위원장, 강명자 사무국장, 추재숙 여성부장 등 3명을 연행했다. 노동쟁의조정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파업투쟁을 처벌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22일 오후에 바로 작업을 중지하고 농성을 벌였다. 대우어패럴 외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청계피복 등의 사업장 노조 간부들이 모여 회의를 열어 동맹파업을 결의했다. 하루반 동안 준비한 24일 대우어패럴이 파업에 먼저 들어가고, 다른 사업장도 동맹파업에 들어갔다. 동맹파업 기간 동안 '구속자 석방, 민주노조활동보장, 노동3권 보장, 근로기준법 준수' 등을 함께 외쳤다. 그 후에도 파업에 동참하는 노조가 늘었으며 여러 민중운동단체들이 가리봉에서 거리투쟁을 하고, 학생들이 연대투쟁도 하였다. 그러나 구사대와 경찰의 탄압으로 6월 30일 해산됐고 43명이 구속되고 2000명 가까이 해고됐다.

사라지지 않은 투쟁의 감각

36년 전의 구동파에 관심을 갖게 만든 이는 김준희 사무금융 보험설계사지부 한화생명지회장이었다. 김 지회장은 구동파에 함께 했던 대우어패럴 노조의 교선부장이었다. 단지 그녀의 과거 투쟁 이력이 나를 이끈 게 아니었다. '과거를 팔아 현재를 사는' 추억팔이 때문이 아니다. 나를 매혹한 건 김 지회장이 한화생명 보험설계사 노조 투쟁에서 보여준 몸을 사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실천력과 조직력 때문이었다.

특히 그의 매력에 빠진 건 3월의 투쟁이었다. 한화생명 여의도 본사 앞에 천막 농성을 방해하려고 회사는 화단을 설치하려고 시도했다. 화단에 흙이 부어지고물이 부어지더니 36개의 화단은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결국 무거운 관 만한 화단을 직접 엎던 중 허리까지 다쳤다. 초기라 조합원들이 경험이 없으나 비상연락망을 돌려 구조요청을 했다. 조합원들이 올 때까지 버텨야 했다. 그걸 온몸으로 막아냈다. 농성장에 지지방문을 한 우리에게 그날의 일을 이렇게 말했다.

"아, 이대로 오늘 죽을 수도 있겠구나."

정말로 죽을 각오로 싸운 것이다. 농성천막을 설치하지 않으면 안정적인 싸움의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니 이후 싸움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의 "한발 떼기에 목숨을 걸어라"시구가 떠올랐다. 한화생명이라는 대기업과의 싸움이 아닌가.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생계가 걸린 싸움이 아닌가. 하나의 투쟁을 딛고 가지 않으면 다음 투쟁이 없기에 매순간 사력을 다하는 모습은 나를 끌어당겼다.

일상적인 학습과 투쟁으로 일구어낸 구로동맹파업

김 지회장의 저력은 어디서 나온 걸까. 80년대 노동운동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어떻게 싸웠는지 듣고 싶었다. 여의도 농성장을 찾아갔다. 녹색 천막에는 <한화생명지회 임시사무실>이라고 쓰여 있었다. 농성장에는 김미정 사무국장과 오세중 지부장 등 몇 명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먼저 김 지회장에게 어떻게 대우어패럴에서 노조 활동을 하게 되었냐고 물었다. 우연이라고 했다. 원래는 자신도 고등학교도 가고 싶고 대학도 가고 싶어서 검정고시 준비만 했다고 했다. 새벽이면 방통고를 다녔고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김 지회장의 표현에 의하면 "노조 하기 전에는 계층상승 욕구가 있었다."그래서 혹자는 김 지회장에게 '회사편이니 노조 간부는 어렵지 않겠냐'는 말도 들어야 했다. 주말이면 도서관에 가고 평소 조장 일도 '너무 열심히'하는 모습은 회사 편이라 여겨질 법했을 수 있다. 더구나 당시에는 노조는 빨갱이라는 말을 대놓고 하는 시대였으니 쉽게 노조가입을 생각하지는 못했다.

"1공장 2층에는 1.2.3과가 있는데 중앙2과로 금요일에 QC(품질관리)교육을 한다며 모이라는 거예요 당시만 해도 1공단만 800~900명이라 컸어요. 좀 늦게 갔는데 미싱은 치워져 있고 관리자가 마이크로 연설을 해요. 뒤쪽에 축구부 수십 명이 배치해있고요. '노조는 빨갱이고 노조간부는 돈을 주고 되는 거다.'그런데 내가 노조에 가봤으니까 알잖아. 빨갱이도 아니고 돈도 안 주고. 노조에 대해서 악선전을 하는데 저건 아니다 싶어서, 그거 사실 아니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남자직원들이 뒤에서 잡고 확 끌어내요. 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썼어요. 다음날이 야유회였는데 저한테 메가폰을 주더라구요. 당시 제 모습을 봤나 봐요. 다른 사람들은 산선이나 어디 가서 공부도 하다가 노조 간부를 했는데 저는 완전 생짜 초보였거든요."

80년대도 남성노동자들에게 더 큰 권한을 주는 성별화된 노동통제는 이어졌다. 특히 회사는 구사대(회사편에 서서 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조직된 모임)를 남성노동자들로 만들었다. 대우어패럴은 축구부라는 이름으로 용역깡패들을 모았다.

당시에는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서 몰래 운영되는 학습모임이 많았다. 학습모임은 공장과 지역에 상관없이 만들어졌고 이른바 학출로 불리는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현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함께 했다. 구로동맹파업이 가능했던 것도 이러한 학습모임의 역할이 크다. 지속적인 노동운동과 정세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뜻을 모으고 실천을 결의했다. 단위사업장 노조에도 여러 소모임이 있었으며 교육도 활발했다.

해방세상이 열리는 거 같았어

김 지회장은 구로동맹파업은 70년대 노동운동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계획된 것이라 했다. 각자 싸우다 각개격파당하지 않기 위해 민주노조들이 똘똘 뭉쳐야한다는 학습을 일찌감치 한 결과라고 했다. 실제 대우어패럴만이 아니라 다른 사업장의 노조간부들에게도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상태였다. 군부독재정권에 맞서 함께 싸워야 노동권도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단결된 힘으로 막아야 했다.

"민주노조 선봉에 섰던 대우어패럴 간부 3명이 구속되자마자 우리 조합원들은 민주노조 탄압을 막아내야 한다고 직감하고 공동대처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어요. 주말에 모여 서로 연락해서 준비에 들어갔어요. 동맹파업을 하자고 결의했어요. 월요일에 출근해서 체조시간이 지나고 생산1과에 일제히 모여 파업 신호탄을 올렸어요. 우리가 파업농성에 들어가고 다음날 효성물산에서 고함 소리도 나더라구요. 꽹과리 소리도 나는데 정말 감동이었어요. 해방세상이 열리는 거 같았어. 노동3권이 모두 쟁취될 것 같았죠."

스물네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경찰과 구사대와 싸우는데 무섭지 않았냐고 물으니 왜 안 무서웠겠냐고 반문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들한테 배워 형광등도 깨기도 했다.

"파업 농성을 벌이는 3일째 되는 날은 아주 힘들었어요. 전기도 끊고 물도 안 주고. 그러니 화장실도 쓸 수 없고. 동료 중에 공고생도 있어서 형광등은 겨우 밝혔는데 나머지는 어떻게 해? 여자조합원들은 생리대가 없어서 난리였어. 사무실 뒤져서 찾고. 밥은 옥수수차를 푹 끓여서 불려서 먹었어. 간부라 난 그것도 못 먹었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제단식 했지. 싸우는데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는 거야. 아 구속되겠구나 생각을 했지, 6일째 되는 날 서울대생이 미숫가루 주는데 감동이었어. 그런데 미숫가루를 반입하려고 올라온 서울대생들을 마치 준비를 했다는 듯이 부모형제들이 농성장 앞에 와서 울면서 집에 가자고 해서 내려지기도 했어. 회사 앞 바리게이트 사이에서 면회하고, 그 후에 끌어내고. 삼국지 보면 가족들 동원해서 교란을 시켜내는 방법이 있는데 그걸 쓴 거지. 마지막 날에는 구사대랑 경찰이 소방호수를 뿌렸어. 엄청 세요. 벽돌을 날릴 정도였지. 밖에는 닭장차(전경차)가 있었고. 벽돌에 맞고 소방호수에 맞아 쓰러진 조합원들을 닭장차에 실어 2공장 운동장으로 데리고 가서는 인간무덤을 만들듯이 던져 넣었어. 분노에 부들 떨며 서로 껴안고 울부짖었어요. 그렇게 우리는 남부경찰서에 끌려갔어. 경찰은 당시 대우어패럴에 있는 학생출신 심상정을 부르라며 고문도 했어."

집행유예 1년 6월. 그렇게 감옥에서 꼬박 10개월을 살다 나왔다. 누가 먹여살려줄 사람이 없는 노동자이니 일을 해야 했다. 가능한 한 현장에 들어가서 돈을 벌려고 했다. 블랙리스트가 있는지 수습 3개월을 마치고 이력서를 내면 해고가 됐다. 다시 대우어패럴 해고 싸움에 집중했다. 해고자들을 비롯한 운동권에게 방을 선뜻 내준 분이 있어서 거기서 생활도 하고 학습도 했다.

비혼은 노조활동도 어려웠지

김 지회장은 몇 년간 현장에 들어갈 때마다 노조를 만들어보거나 어용노조를 바꾸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노조에 대한 탄압과 편견도 심한데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결혼하지 않은 여자에 대한 편견도 늘어갔다.

"사회에서 결혼을 안 하면 이상하게 보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비혼주의였어요. (조직 선배) 위에서 어떻게 결혼을 안 하고 사냐 그러고. 베비라에서 일할 때 어용노조를 어떻게 바꾸어보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회사에 항의할 때마다 저보고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했어요. 노조활동을 하려고 해도 같은 조건이 아니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아이를 낳고 같이 뭘 해야지 남편이나 육아라든지. 얘기가 되겠구나. 그래서 34세에 결혼을 했어요."

그렇게 여러 현장을 다니다 마음 맞는 친구와 봉제사 업을 몇 년 했다. 빚만 떠안았다. 다시 생계를 위해 뭘 할까 하는데 우연히 보험설계사를 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한화생명의 보험교육을 받았다. 2012년의 일이다. 보험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구로동맹파업이 민주화운동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알리는 활동은 이어갔다. 민주화운동정신계승연대 활동을 했다. 현재는 구로동맹파업에 대한 국가폭력을 인정받기 위해 준비 중이다. 2001년 구로동맹파업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였으나 국가폭력에 대한 진실규명을 아직 덜 됐기 때문이다.

▲한화생명 보험설계사들의 투쟁 편장. 한화생명은 보험설계사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판매 수수료를 삭감했다. ⓒ사무금융노조 보험설계사지부

다시 현장투쟁의 전면에 서다

얼마 전까지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조금씩 기여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기업은 보험설계사의 노동을 남김없이 뽑아내려했다. 한화생명금융의 보험설계사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판매 수수료를 삭감했다. 기본급이 없는 특수고용노동자인 보험설계사의 급여는 수수료다. 임금삭감인 셈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한화생명은 보험판매 전문 자회사를 설립해 보험 상품의 개발과 판매를 분리하는'제판분리'가 추진 중이었다. 단체카톡방에 노조를 만들자는 이구동성으로 나왔다.

"카톡방에 난리가 난거예요. 그런데 노조를 만들자가 아니라 노조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하자는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노조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직접 만드는 거라고 했어요. 결국 노조 해본 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죠."

1월 21일 설립된 한화생명 보험설계사 노조는 한 달 만에 2천명이 조합원이 가입할 정도로 조합원의 지지로 만들어졌다. 제판분리가 되어 한화생명금융서비스로 바뀌었다. 현재는 조합원이 더 늘어 3000명이다. 대단하다고 감탄하면 김 지회장은 한화생명이라는 대기업과 싸우려면 그만큼 조합원도 많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보험설계사는 노동자성을 인정받고 있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다. 회사는 개인사업자라고 주장하지만 출퇴근도 업무량도 회사의 관리와 통제를 받고 있다. 80년대 공단의 여성노동자들처럼 보험설계사도 노예라고 말했다. 급여체계 때문에 자기 돈으로 보험에 든 설계사가 많고 그러다보니 일도 그만두지 못할 정도라 했다.

김 지회장은 오늘도 수수료 삭감을 원상회복하고 자회사형 보험대리점의 영업규정과 수수료규정을 바꾸기 위해 거리에서 잠을 청하며, 화단설치를 막아내던 날의 환희를 곱씹는다. 조합원들이 도착했을 때 느꼈던 안도감과 함께 막았던 승리의 기쁨을! 화장실 가기투쟁, 천막설치투쟁에 이은 세 번째 승리를 하며 투사로 거듭나는 조합원들을 생각한다. 현재의 투쟁이 전설의 투쟁을 소환한 것처럼, 어쩌면 한화생명 보험설계사들의 투쟁은 새로운 전설을 기록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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