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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의 우리말 바로 알기] ‘비싸다’와 에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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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의 우리말 바로 알기] ‘비싸다’와 에누리

초등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에 고 서영춘 씨의 노래 <기차놀이>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제목은 가물가물하지만 가사는 잘 기억한다. 그런데, 친구들이 그 노래를 부를 때면 뭔가 이상한 내용이 있었다.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에, 차표 파는 아가씨와 승강이하네, 이 세상에 메누리 없는 장사 어딨어?”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어린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냥 친구 따라 부르기는 했지만 “세상에 며느리 없는 장사”가 왜 없겠는가? 총각이 장사할 수도 있고, 결혼을 했어도 아들이 장가를 안 갔으면 며느리가 없을 텐데, 어쩌자고 저런 말이 다 나왔을까 하고 혼자 고민했던 적이 있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메누리’가 아니고 ‘에누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물건을 팔 때 이미 깎아 줄 요량으로 더 불러 놓고 조금 깎아주면서 생색을 낸다는 말이다.

지금이야 대중교통 타고 다니기를 권장하지만 과거에는 돈 있으면 자가용 타고, 과시하기를 좋아했다. 비싼 것이면 무엇이든 다 좋다는 의식을 갖고 살았다. 또한 외제면 무조건 좋다고 생각했다. 현대인은 참으로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 이제는 한국산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세계 사람들이 다 안다. 가격도 싸고 물건의 질도 좋다. 비싼 외국의 유명 제품과 비교해서 뒤질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비싸다’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원래 ‘비싸다’는 말은 ‘상품 값이 너무 높다’는 뜻이 아니었다. 중세국어나 근대국어의 얼마 동안은 약간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15세기 문헌에는 ‘빋ᄉᆞ다’로 나오고, 16세기 문헌에는 ‘빋ᄊᆞ다’로 나타나 있다. 그러니까 원래 시작은 ‘빋ᄉᆞ다’에서 유래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빋ᄉᆞ다’는 ‘빋’과 ‘ᄉᆞ다’가 결합된 어형이다. ‘빋’의 의미는 값(價)과 빚(債)의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중세국어에서는 주로 ‘값’의 뜻으로 쓰였다. 예를 들면 ‘빋디다’는 ‘값싸다’의 뜻으로, ‘빋디우다’는 ‘값을 낮추다’의 의미였으니 일반적으로 ‘빋’이라 하면 주로 ‘값’을 뜻하였다. 그러던 것이 근대에 접어들면서 ‘값’의 의미가 남아 있는 것은 ‘비싸다’에만 남아 있고, 대부분의 경우 ‘빚’으로 바뀌어 채무의 뜻만 강하게 남아 있다.(이상 조항범의 <우리말 어원이야기>에서 요약 정리함) ‘비싸다’의 원래의 의미는 “그만한 가격이 있다”는 의미였다. ‘싸다’라는 말은 현대어에서는 ‘적당하다, 그럴 가치가 있다는 의미’로 쓰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그 놈은 맞아도 싸다.”라고 했을 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원래 ‘비싸다’의 의미는 ‘그 물건의 질에 비해 가격이 적당하다’라는 뜻이었는데, 현대어에 오면서 ‘가격이 높다’로 바뀌게 되었다. 지금은 완전히 ‘가격이 지나치게 높다’라는 뜻으로 굳어져 있다.

다음으로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냐?”는 말이다. 내용상으로 볼 때 물건을 팔 때 깎아주는 일을 일컫는 것처럼 들린다. “세상에 깎아주지 않는 장사가 어디 있느냐?”라고 알아듣는 사람이 많다. 사실 ‘에누리’라는 단어는 ‘물건을 팔 때 받을 값보다 더 많이 부르는 것’을 뜻한다. 고객이 깎을 줄 미리 알고 그만큼 가격을 보태서 말하는 것이 ‘에누리’다. 미리 깎을 것에 대비해서 많이 붙이는 것이 현대에 와서는 ‘어떤 말을 더 보태거나 축소시켜 이야기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다음사전) ‘에누리’의 옛말은 ‘에히다(어히다)’에서 비롯되었다. ‘어히다’는 ‘베어내다(割), 잘라내다’의 뜻이다. ‘어히다>어이다’로 변했다가 다시 ‘에다>에이다’로 변했다. ‘에+ 누리(덩어리) = 에누리(잘라낼 것을 알고 미리 떼어낸 덩어리?)’로 완성되었다. 고객이 잘라낼 것을 미리 알고 덧붙여 부르는 가격이다. 가격을 덧붙인 줄 알고 있으니 조금만 깎아달라고 흥정하는 중에 나오는 말이 ‘에누리 없는 장사 없다’로 정착한 것이다. 요즘은 QR코드로 읽고 흥정할 기회도 없이 카드에서 돈이 빠져 나간다. 이제는 ‘에누리’라는 말도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언어는 늘 변하는 것이지만 요즘은 변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노인들은 현대어에 익숙하지 못해서 아이들과 세대차를 느낀다. 소통하기 위해서 가능하면 표준어를 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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