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를 좀 일찍 마치고 퇴근하는 길은 항상 즐겁습니다. 이제는 해가 많이 길어져서 저녁에도 거리는 햇빛으로 반짝이고 신록에서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들과 할미꽃, 엉겅퀴꽃, 매발톱, 개망초 꽃이 수풀과 어우러져 심드렁하니 피어 있고, 수줍게 봉우리를 내민 덩굴장미가 담장을 휘감기 시작합니다.
이제 다섯 살 된 개 재롱이를 키우는 어르신과 인사를 나눕니다. 원래 관절이 안 좋기도 하고 체중이 많이 나가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던 어르신은 재롱이를 키우면서 운동을 시작하셨고, 그러면서 체중도 좀 조절되고 다리 힘도 좋아지셨습니다. 퇴근길에 종종 만납니다.
저는 운동삼아 30분 정도 걸어서 버스를 타는데 철길 옆으로 난 작은 공원길을 통과합니다. 길과 철길 사이로 구청에서 분양한 도시텃밭이 있는데 가끔 거기서도 병원에 오시는 어르신들이나 장애인분들을 만납니다.
이런 소소한 얘기들도 나눕니다. 동네 편의점 테이블에서는 이런 일도 있습니다.
저랑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는 분은 저희 병원 단골이신 지적 장애인입니다. 담배를 태우시다 제가 지나가니 후다닥 담배 피던 손을 등뒤로 숨기시다가 걸렸습니다. 그래도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 제 잔소리가 싫지는 않으신가 봅니다.
작년 6월 첫번째 글을 시작으로 왕진과 방문진료의 필요성을 알리고자 오늘까지 스무개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 동안에 저는 많은 환자들을 집에서 만나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 되었죠.
발달 장애 청소년을 위해 탄원서를 쓰기도 했고, 길에서 만난 어르신들 리어카도 밀어 드리기도 했습니다. 장애인 주치의 방문 진료를 나갈 때마다 새벽부터 간식거리를 만들어 주시는 어르신 덕에 쑥떡에 미나리 파전 만드는 방법도 배웠지요.
자매나 다름없이 꼭 붙어 다니는 지적장애인 두 분이 그동안 서로에게 화가 났을 때에는 어르고 달래어 다시 둘을 웃는 모습으로 돌려보내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어르신들이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의료관련 문제가 아니더라도 저에게 상담을 하십니다. 관공서에서 온 편지 읽고 해석도 해드리고 아들며느리 흉보시는 것도 들어드립니다.
며칠 전에는 아들이 스마트폰 사줬는데 사용법을 알려 달라며 가지고 오신 어르신도 있습니다.
충청도 사투리로 '이물 없다'는 '허물없이 편하다'는 뜻입니다. 예전엔 의사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사람의 건강은 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으니 감당해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마음과 사회적 관계의 문제에서도 아픔이 생기고 실제로 아파지기도 하니까요. 저 나름대로는 ‘이물 없는’ 의사가 된 것은 저의 자산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저의 변화의 뿌리에는 환자의 삶 속에 직접 들어가 본 방문진료의 경험들이 있습니다. 환자를 볼 때 질병만 보는 것이 아닌 삶 전체를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 약 이외에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 도움을 어디서 받을 수 있는지 흐름을 알게 된 것들이 수확이라면 수확입니다.
얼마전에도 지적 장애 어르신의 집에 가서 이분이 왜 당뇨조절이 안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경제적인 문제가 생기면서 식사를 제대로 챙기기가 힘들게 되었고, 식사를 잘 못하시니 당뇨약을 챙겨 드시지 못하셨던 것이죠. 만약에 이런 분을 외래에서만 만났다면 과연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약 드시는 것은 환자 책임이니 약을 제대로 못 챙겨 드시고 혈당 조절 못하셨다고 환자를 비난했을 것입니다. 실제 이 분의 삶이 어떤 상황인지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 것이죠. 지금의 저와 민들레 의료사협은 약을 제대로 드실 수 있도록 정리하고, 주민센터를 통해 식사지원이 가능한지를 알아보고, 경제적인 조언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을 연계합니다.
아직도 저와 민들레 의료사협이 가야할 길이 멀고 험합니다. 그리고 저희 뿐 아니라 방문진료를 하고 있는 다른 의료기관들도 나름의 고민과 실천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쓴 글들이 다른 분들이 방문 진료로 향하는 문에 올라서는 작은 디딤돌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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