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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분할 통치를 넘어

[프레시안 books] 서평 <일본인 위안부, 애국심과 인신매매>

▲ⓒ논형

다음은 <일본인 위안부, 애국심과 인신매매>(논형 펴냄)에 대한 이지은 문학평론가의 서평이다.

매춘부니까 피해자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과 시민사회 및 학계의 노력은 ‘위안부’ 피해를 여성의 ‘수치’가 아니라 전쟁범죄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론화되지 못한 존재가 있다. 바로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다. “왜 일본인 ‘위안부’는 줄곧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을까?”(4쪽)

최근 한국에서 번역‧출간된 『일본인 「위안부」-애국심과 인신매매』(논형, 2021)의 첫 문장이다.

이 책은 일본인 ‘위안부’라는 담론의 공백에 문제의식을 지닌 연구자들의 글을 모은 것으로,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징모 방법, 위안소에서의 처우, 전후의 생활 등 세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필자의 글을 수록하고 있는 만큼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하나의 시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본인 ‘위안부’에 덧씌워진 편견을 걷어내고, 학계의 연구와 시민사회의 관심을 촉발하고자 하는 의지는 공통적으로 읽힌다.


일본인 ‘위안부’에 덧씌워진 편견이 무엇이길래 지금까지 논의되지 못했던 것일까.

편집자는 「저자 서문」에서 “일본인 ‘위안부’에게는 어느새 창기, 예기, 작부 등 공창제도 하의 매춘부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매춘부니까 피해자라고 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4쪽)이 생겨났다고 지적한다.

‘매춘부니까 피해자가 아니다.’ 간단해 보이는 이 문장은 많은 논점과 역사적 사실의 왜곡, 그리고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여기엔 여성을 창녀와 부녀로 나누어 차별하는 오래된 여성혐오가 전제되어 있다.

그 누가 되었든 간에 신체가 구속된 상태에서 원치 않는 일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문장은 좀 더 복잡한 의미 연쇄를 따라 익숙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일본인 ‘위안부’를 ‘매춘부’로 규정하고 나면,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지원했다는 논리가 뒤따르고, 따라서 위안소는 업자가 운영한 것이자, 일본군과 무관한 시설이 되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오랫동안 일본인 ‘위안부’를 보이지 않게 했던 이 문장과 대결하면서 『일본인 「위안부」』를 읽어보자.

가난한 집 ‘딸’에서 유곽의 여성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일본에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한 이들 가운데는 매춘생활을 하다가 전차금을 받고 위안소로 간 경우가 있다. 참전 군인이나 위안소 관계자가 쓴 기록물에서도 일본인 ‘위안부’를 화류계의 여성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이러한 탓에 그간 일본인 ‘위안부’는 엄밀한 진상조사 없이 매춘부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매춘부였다는 사실은 거듭 강조되었지만, 이들이 왜 매춘부가 되었는지에는 관심이 닿지 않은 듯하다. 오노자와 아카네(小野沢あかね)의 「일본인 ‘위안부’의 징집과 근대 공창제도」는 일본인 ‘위안부’가 징집된 여러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엔 매춘생활을 하다 위안소로 간 이들의 내력도 있다.

오노자와가 제시한 여성들의 경우, 적게는 일곱 살, 많게는 열일곱 살에 게이샤집이나 유곽에 팔려갔다.

놀랍게도 미성년 여성들이 유곽에 팔려가는 장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아버지다. 가난한 집의 ‘딸’들은 아버지에 의해 매춘 시설로 ‘팔려’ 가고, 선지급된 ‘몸값’인 전차금은 여성을 구속하는 덫이 된다. 더하여 여성에게 불리한 유곽의 노동 조건은 전차금을 갚고 자유를 되찾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업자들은 유곽 여성들이 떠안고 있던 빚을 미끼로 ‘위안부’를 모집하였다. 업자들이 제시한 계약 조건 중에는 ‘전차금의 변제 방법이 계약 기간 완료와 동시에 소멸한다’는 조항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곧, 계약 기간이 종료되면 변제 의무도 끝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차금으로 고통받았던 유곽의 여성이나 가난한 집안의 딸이 ‘2년만 참으면’이라는 생각으로 응모했”을 것이다.(140쪽)

그렇다면 ‘일본인 ‘위안부’가 매춘부니까 피해자가 아니다’라는 문장은 단지 피해자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반박되어선 불충분하다. 가난한 가부장은 딸을 유곽에 팔았고, 업자들은 팔려온 여성들을 통해 이득을 취했으며, 일본정부와 군대는 여성착취 시스템이 전장에서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통치 권력을 휘둘렀다. 오히려 피해 범위를 확대하여, ‘가부장제-성산업(자)-국가/군대’가 어떻게 공모하고 착취했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취업사기와 인신매매, 그리고 ‘강제’의 개념


한편, 일본인 ‘위안부’를 모두 매춘여성으로 인식하는 것은 사실에 맞지 않다. 위안소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을 속여서 데려갔다는 업자의 증언이 있을 뿐 아니라,(36쪽) ‘특수간호부’라는 말에 솔깃해서 응모했는데 현지에 와서야 ‘위안부’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피해자 증언도 있다.(37쪽)

또, 타자수 여성이 전황이 악화되면서 ‘위안부’로 일하길 강요받은 경우도 있다.(134쪽) 마에다 아키라(前田朗)는 「나가사키 사건, 시즈오카 사건 대심원 판결을 읽는다: ‘위안부’ 강제연행은 유괴이다」에서 당시 일본인 ‘위안부’ 징모가 어떻게 실시되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심원 판결(현 최고재판소)을 제시한다.

나가사키 사건을 소개하면 이렇다. 상하이에서 위안소 영업을 하고 있던 업자 A는 1932년 ‘해군지정 위안소’로 영업을 확장하기 위해 몇몇 공모자들과 “위안소라는 사실을 숨기고 단순히 여급 또는 여종업원을 고용하는 것처럼 속여 [여성을] 상하이로 이송”(45쪽)하였다. 이에 대해 나가사키 지방재판소 및 공소원은 “국외이송목적 유괴죄의 성립”(46쪽)을 인정했다. 피고인 중 일부가 모의에만 가담했을 뿐 유괴나 이송을 하지 않았다고 상고하였으나, 대심원은 실행 행위를 분담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에 관해 모의한 자는 공동정범의 형책을 지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나가사키 사건 판결은 일본 사법이 일본군 ‘위안부’의 모집을 범죄로써 처벌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판결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일본인 ‘위안부’ 중에서도 업자에게 속아서 ‘위안부’로 ‘유괴’된 이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위안부’ 모집이 당시 일본 사법을 기준으로도 위법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셋째, 군위안소는 이러한 범죄 행위에 근간을 두고 설립‧운영된 것이었다. 넷째, ‘국외이송목적 유괴죄 성립’ 판결은 법적 ‘강제’ 개념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종종 보수 우익 세력이나 역사수정주의자는 ‘노예사냥’과 같은 물리적 폭력의 경우만을 강제연행이라 한정하여, ‘위안부’ 모집이 ‘자발적’인 ‘계약’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도 ‘유괴’는 ‘납치’와 동의어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마에다가 제시한 두 건의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일본 사법부는 기망 또는 유혹을 수단으로 하는 경우를 ‘유괴죄’로 보고 있다.

이때 “‘기망’이란 허위의 사실로 상대방을 착오에 빠뜨리는 것을 말하고, ‘유혹’은 기망의 정도에는 이르지 않지만, 감언으로 상대방을 움직여 그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것”(54쪽)이다. 기망과 유혹에 의한 징모가 일본 사법부의 ‘유괴죄’로 인정되었다는 것은 ‘강제’의 개념이 물리적 폭력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반하여 징모한 행위’ 전반에 적용되어야 함을 의미하며, 의사에 반한 징모행위가 당시에도 위법이었다는 뜻이다. 물리적 폭력만을 강제로 주장하는 것은 1930년대 일본의 사법부 판결에도 맞지 않는 논리인 것이다.

‘전시성폭력 피해자’이자 ‘전범국가 국민’이라는 곤경


일본인 ‘위안부’ 문제가 논의에서 누락된 또 하나의 이유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범죄’라는 문제틀이 전범국가 국민이었던 일본인 ‘위안부’를 비가시화 했기 때문이다. 특히 식민지 여성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는 측면이 부각되면서 피해자 논의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일본인, 조선인, 점령지 여성 사이의 차별적 조건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 책의 저자들도 강조하는 바, 업자와 일정 비율로 수익을 나누고 비교적 단기간에 귀국한 사례는 일본인 ‘위안부’의 경우에서만 보인다.(138쪽)

또, 위험한 전선에는 주로 조선인 ‘위안부’가 보내졌다.(142쪽) 무엇보다 식민지 여성에 대한 차별은 제도적으로도 존재했다. 가령, 일본은 1921년 「부인 및 아동의 매매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에 가입하지만,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그 국제조약을 적용하지 않았다.(76쪽)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비교적’ ‘나은’ 대우가 일본인 ‘위안부’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일본인 ‘위안부’ 모두가 계약서를 쓰고 전차금을 받고 위안소로 간 것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조선 여성들처럼 취업사기꾼에 속아 인신매매를 당한 이들도 많았다. 조선인과 같은 조건에 처해 있었던 일본인 ‘위안부’도 있었다. 이처럼 일본인 ‘위안부’의 피해 양상이 조선인 ‘위안부’와 겹쳐지는 측면이 발견된다면, 어떻게 일본인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차별을 함께 말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식민지 여성이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피해자의 고통을 비교하고, 피해자 간의 경합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일본인 ‘위안부’ 문제가 담론장에서 말해지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국은 우리를 분할하지만,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


일본인 ‘위안부’ 문제가 놓인 곤경을 마주하며, 『일본인 「위안부」』의 역자 심아정은 ‘교차적 시각’을 요청한다. “본국, 식민지, 점령지 여성들의 전쟁경험과 성폭력 피해는 이 여성의 경험과 저 여성의 경험을 비교하며 피해의 위계를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이 제도와 저 제도를, 이 정책과 저 정책을 비교하면서 여성들을 분리하며 억압하는 갖가지 권력이 어떻게 맞물려 작동하는지에 착목”(275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차적 시각은 일본인 ‘위안부’가 식민지나 점령지 여성에 비해 ‘덜’ 고통스러웠다거나, 혹은 그 반대가 ‘더’ 고통스러웠다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이너리티 사이의 비교와 경합을 유발하는 것은 권력이 즐겨 사용하는 통치의 방식이라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오히려 반대로 질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일본인 ‘위안부’는 언제 ‘국민’ 대접을 받았을까. 공공연하게 ‘추업부(醜業婦)’라 불리던 매춘 여성을 위안소로 전업하도록 유혹할 때, 업자들이 꼭 덧붙인 말이 있다. “나라를 위해 봉공의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사하면 군속으로서 야스쿠니에 모셔진다”(145쪽) 위안소에서 일본인 ‘위안부’가 ‘나은’ 대우를 받은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이 또한 “일본인 여성에게 제국의식을 갖게 만든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아래에 또 아래가 있는 계급 질서는 차별을 이용해 지배하는 통치의 상투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142쪽) 여기서 끝이 아니다.

패전을 전후해서 일본인 ‘위안부’는 소련군과 미군으로부터 일본을 지키는 일에 떠밀렸다. 일본 정부는 민족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보호해야 할 여자’와 이들을 지키기 위해 ‘방파제가 되어줄 여자’를 구분하고, 후자로 분류된 ‘추업부’나 일본인 ‘위안부’들에게 ‘나라를 위해’ 나서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인 ‘위안부’가 ‘국민’으로 호명되는 순간을 살펴보면, 기지촌 여성들이 ‘양갈보’라 멸시받으면서도 ‘달러 버는 애국자’로 추켜세워졌던 장면이 겹쳐진다. 어느 쪽에서나 소외된 여성들이 ‘국민’ 대접을 받는 순간은 언제나 국가가 그녀들을 착취하고 이용할 때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자면 여성을 국가/민족에 따라 분할하고, 위계 짓고 경합하게 하는 것은 통치의 방식이라는 것이 선명해진다. 말할 것도 없이 이 통치 방식에서 식민지 차별도 발생한다.

물론 ‘조선인’,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은 통치성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 고향을 기억하고 있지만, 동시에 국가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있기도 하다. 아마 이 둘은 선명히 구별되는 것이 아닐 테다.

다만 ‘삶의 장소’와 ‘모국’이 일치하지 않는 조건에서는 양자가 달리 보이기도 한다. 가령, 최초의 증언자라 알려진 배봉기는 ‘위안부’로 오키나와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배봉기를 오래 취재한 가와타 후미코에 의하면, 배봉기가 ‘나라’라고 했을 때 그것은 ‘고향’을 의미했을 뿐, 국가를 의미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태국에서 정착한 ‘위안부’ 피해생존자 노수복은 일본인 여성운동가 마츠이 야요리에게 “군인은 나쁘지만 한국사람, 일본사람, 타이사람, 중국사람 모두친구”라고 했다 한다.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은 제국의 기만적이고 폭력적인 통치기술이지, 피해 여성들 사이의 고통의 ‘비교’가 아니다. 제국은 우리를 분할하여 통치하였지만,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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