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발매된 브레이브걸스의 댄스곡 롤린이 출시 4년만인 지난 3월 각종 음원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고 음악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롤린의 '역주행'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덕분에 K-Pop 소비자들은 4인조 뮤지션 그룹의 안타까운 '존버' 사연에 감정이입하고 대기만성의 스토리를 만끽하는 신선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스페인,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콜롬비아, 터키 등에서 롤린의 커버 영상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K-Pop에 문외한인 40대 중반의 군필 남성 경제지리학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며, 오늘날 '콘텐츠 경제'의 중요한 지리적 성격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음악, 영화, TV 프로그램, 공연예술 등 엔터테인먼트는 콘텐츠 경제의 핵심 분야이다. 엔터테인먼트처럼 정서적, 감정적, 상징적 콘텐츠의 함유량이 많은 상품의 대중화와 일반화는 '인지-문화적' 자본주의의 중요한 특색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소비자의 행위 주체성과 콘텐츠의 공동생산
경제지리학자 앨런 스콧(Allen Scott)에 따르면, 인지-문화적 자본주의에서 상품의 기능은 사용 가치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공감할 수 있는 문화적 의미와 가치의 창출도 시장에서 상품의 성패를 좌우한다. '공감'의 요소 때문에 의미와 가치의 생산자로서 소비자의 역할이 보다 중요해졌다. 전통적인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이분법적 구분이 모호해졌고, 소비자의 '행위 주체성(agency)'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말이다. 롤린의 역주행 사건에서 발단이 되었던 군부대 위문공연 영상을 유튜브 등에서 감상하고 생각해보자.
해당 영상은 국방TV의 음악 프로그램 '위문열차'에서 방영된 공연 장면을 중심으로 편집해 놓은 것이다. 지난 2월 24일 유튜브 채널 비디터(VIDITOR)에서 제작해 게시했고, 알고리즘의 영향으로 노출 빈도가 많아지면서 현재는 1700만이 넘는 재생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 콘텐츠의 생산자는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와 브레이브걸스, 국방TV, 비디터만으로 한정할 수 없다. 청각적, 시각적, 감정적 반응을 자극하는 국군 장병들의 폭발적인 '떼창'과 함성, 연병장에 자욱한 먼지를 일으킨 해병과 수병의 열광적인 몸짓도 콘텐츠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영상의 곳곳에 배치된 댓글도 빼놓을 수 없다. 어떤 댓글에서는 "군대 빌보트 차트 1위", "군 미스터리 중 하나 … 철저한 인수인계", "15년 군번 이후 모든 군인들이 … 수백 번 봤던 그 영상"처럼 군 생활 현장에서 롤린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도록 한다. "군인 가수 둘 다 힐링", "군 생활하면서 엄청난 활력소가 되었던 곡 … 말로 설명 못하는 뭔가가 있음", "군 생활을 이 곡 하나로 버텼다"는 진술에서는 감정과 정동(情動)의 작용도 가늠할 수 있다.
이처럼 국군 장병은 직접적 경험과 참여를 통해서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의 역할을 했고, 이는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군 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감정이입적인 동참을 자극하고 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이야기 몇 가지만 둘러보자.
"군인들 마음을 이해"하는 "한참 전에 전역한 아저씨"들이 "브레이브걸스 1등 하는 거 보려고" 아주 오랜만에 가요 프로그램을 시청한단다. "뭔지 모르지만, 우리 애들이 쓰니깐 일단 주문"한다는 '쁘걸 아이템' 컨슈머의 이야기도 있다. "그녀들이 걸어온 눈물과 땀의 위문 공연들"에 감사해하며 "이젠 우리가 감동으로 보답할 때"라는 공감대가 전역 군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듯하다.
역주행의 장소성과 책무의 지리
한 마디로, 롤린의 역주행은 원제작사, 소속 뮤지션, 유튜브의 미디어 네트워크와 플랫폼 알고리즘,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전·현역 군인과 이들의 감성적 반응, 일반 K-Pop 소비자 등 다양한 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들의 역할과 노력으로 맺어진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주행'이란 용어만으로는 설명의 부족함이 느껴진다. 장소의 중요성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간을 거스른 롤린의 역주행 사건에서 장소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그림 1). 브레이브걸스가 뿌린 감정과 정서의 씨앗은 동해의 1함대부터 서해의 2함대까지, 남동쪽 포항의 1사단부터 북서쪽 백령도의 6여단까지 널리 퍼져있다. 씨앗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의 육군부대, 주요 도시 언저리에 위치한 공군부대에도 뿌려졌다. 이러한 감동의 씨앗은 장병들의 전역과 함께 우리 사회 곳곳으로 흩어져 있다가, 이제 와서야 싹을 틔우고 성공의 결실을 맺은 것처럼 보인다.
브레이브걸스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이전 세대 사람들은 롤린을 통해서 군복무 장소의 기억에 재접속하는 듯하다. 일부는 요즘 장병들의 환호를 보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공동체적 삶의 즐거운 모습과 전우애를 떠올린다. 변방에서 느꼈던 단절감, 고립감, 외로움, 이별의 아픔 등 마음의 상처를 되새기며 당시 답답한 감정의 해소를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경험이 브레이브걸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을 자극해 응원으로 이어진 모양새다.
브레이브걸스와 롤린을 통해서 상이한 시간과 다양한 공간이 한데 모여 압축된 '책무의 지리'가 생성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군 장병 여러분들, 예비역 여러분들, 민방위 분들까지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는 한 가요 프로그램 1위 수상 소감 발언은 분명 그에 대한 화답이었을 것이다.
'다른' 콘텐츠 경제 지리의 가능성?
콘텐츠 경제의 성장과 발전에서 장소의 중요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경제지리학적 상식이다. 콘텐츠 인력은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대도시의 장소를 선호하고, 금융계와 관련 기업의 투자도 대체로 그런 곳을 향해 집중한다. LA의 할리우드, 뉴욕의 브로드웨이, 서울의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인도의 발리우드(Bollywood) 영화는 뭄바이에, 나이지리아의 놀리우드(Nollywood) 영화는 라고스에 거점을 마련하여 성장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주변부 지역은 중심부의 거점에서 생산된 창조문화 상품의 소비 장소로서 역할만 맡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롤린의 역주행 사건은 주변부와 변방도 콘텐츠 생산에 기여하면서 중심부를 자극하는 '다른' 지리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여기에서는 앞서 살핀 두 가지 상황적 맥락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첫째, 유튜브와 같은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의 침투성이 확대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모호한 콘텐츠의 공동생산이 가능해졌다. 둘째, 공동생산의 과정을 통해서 기존에는 소비자로만 인식되었던 일반 대중이 능동적으로 창출해서 부여하는 문화적 의미와 가치도 콘텐츠 경제의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심부 생산자의 주도성만 가지고 콘텐츠 경제의 번영을 이룰 수 없다는 교훈을 안겨주는 사건인 것 같다. 롤린이 역주행하던 시기에 우리는 대중의 이해와 동떨어진 역사 드라마 한 편의 조기종영을 목격하기도 했었다. 소비자의 마음을 사지 못한다면 거대 자본을 유치해 글로벌 시장을 지향한다는 야심도 덧없는 것이다.
그리고 콘텐츠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소비자의 마음에는 '지리적 DNA'가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특정한 국가적 상황에서 형성된 역사 인식이든, 군대와 같은 특정한 장소의 경험에서 비롯된 책무의 감정이든 말이다. 우리가 경제생활의 '착근성'으로 이해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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