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1990년 걸프전쟁을 앞두고 한미관계 향방이 한국의 전쟁 기여에 달려있음을 시사하며 압박하는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외교문서가 29일 공개됐다.
미국 주도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겨냥한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하기 한 달 전인 1990년 12월 17∼19일 미국을 방문한 반기문 당시 외교부 미주국장과 미국 당국자 간 대화 기록에서다.
미국 국방부 칼 포드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는 반 국장과 면담에서 한국의 군 의료진을 사우디 측에 파견하는 문제를 거론하면서 "한국 측이 사우디 측에 대해 계속 진전 상황을 점검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포드 부차관보는 특히 첫 미군 사망자가 나오면 미국 여론이 우방국의 지원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며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우리의 친구들이 취한 행동은 길이 기억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리처드 솔로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6·25 사변 시 미국의 도움을 받은 바 있는 한국이 미국을 어떻게 지원하고 있느냐는 미국 여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며 "본인은 GATT(상품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문제와 걸프 위기가 한미관계를 껄끄럽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에 반 국장은 당초 협의 상대가 미국에서 사우디로 바뀌면서 군 의료단 파견이 늦어지고 있다고 해명했다.
또 정부가 다국적군 지원으로 약속한 5천만 달러를 11월 추가 경정 예산을 통해 확보했고, 조만간 미국 측에 지급할 예정이라며 "능력의 범위 내에서 최대한 지원하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미 당국자들은 한국 정부가 반 국장 방한 직전에 한국 해군 대잠초계기 입찰에서 프랑스 대신 미국의 P3C를 선정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더글라스 팔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보좌관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한국이 소련 및 중국과의 관계에 치중한 나머지 미국과의 관계나 페르시아만 사태 해결을 위한 지원에는 다소 소홀하지 않나 하는 인상을 가졌었다"며 "한국 정부의 P3C 대잠함 초계기 구매 결정 등은 우리의 그러한 우려를 씻어 주었다"고 말했다.
반 국장은 "우리 정부는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와 평화구조 정착을 위해 소련 및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나 이는 정상적인 국가 간의 건전한 쌍무적 관계로서의 관계 개선 추진이며 우리가 소련과 지역 또는 세계적 차원에서 파트너로서의 관계 발전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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