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태극기 집회'가 다시 열릴 모양새다. 코로나19 2차 대유행의 시발점이 된 작년 8.15집회 이후 잠잠했던 보수단체는 조금씩 몸을 풀고 있다. 삼일절에 산발적 집회를 진행한 이들은 '거대밀집' 모색하고 있다. 태극기 집회를 오래 취재했던 이승우 <셜록> 교육생이 '태극기 아이돌을 아십니까' 기획을 준비했다. 태극기 집회에서 노래하는 이들은 누구고, 어떻게 ‘태극기 부대’가 됐는지 알아보는 기획이다.
그 여자는 믿기 어려운 말을 전화로 전했다.
밤새도록 11시간 동안, 그것도 길거리에서? '그까이꺼 일도 아니'라는 듯한 그녀의 말투 때문에 신뢰는 더 떨어졌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그들이라면 가능할 듯했다.
그들이 누군가. 다음 대선이 코앞인 지금까지도 "대통령은 박근혜!" "탄핵무효!"를 외치는 태극기부대 아닌가. 어떤 이들을 보편적(?) 상식으로 판단하면, 이해의 폭은 오히려 줄어든다. 이번엔 내가 전화를 걸어 말했다.
말 그대로 황혼에서 새벽까지, 미국대사관 앞에서 밤샘 취재를 하기로 했다. '라이브 공연'도 궁금했지만,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지난 3월 10일 밤, 두꺼운 패딩을 입고 서울 광화문으로 향했다. 미국대사관이 가까워지자 익숙한 멜로디가 귀에 들어왔다. 가수 소찬휘가 부른 <tears>였다. 근데, 가사가 이상했다. "잔인한 여자라 나를 욕하지는 마"가 나올 부분은 이렇게 달라졌다.
외침, 절규에 가까운 소리는 성인 한 명 들어가면 꽉 찰 한 평도 안 되는 비닐하우스에서 퍼져 나왔다. 비닐 안쪽을 보니 왼쪽 가슴에 태극기를 단 김영선이 감정에 몰입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얼굴 앞에 설치된 스마트폰은 감정에 젖은 김영선 얼굴과 목소리를 유튜브로 실어 날랐다.
유튜브 생중계를 하며 '애국뮤즈'로 자신을 소개한 김영선.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은 그를 '애국가수'라 부른다. 김영선은 2016년 12월부터 태극기 집회 등 보수 성향 집회 무대에서 노래했다. 김영선은 순식간에 '태극기 아이돌'이 되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김영선은 1988년에 1집 앨범 ‘타잔보이 김영선’을 발매한 가수다. 데뷔 다음 해에 열린 MBC 신인가요제에서 동상, 가창상을 받았다. 유명 가수 공연에서 코러스 활동도 했다.
나름대로 큰 무대에 섰던 김영선이 미국대사관 앞, 한 평도 안 되는 길거리 비닐하우스에서 밤새 노래하는 이유는 뭘까?
이 릴레이 1인시위를 주도하는 곳은 보수단체 자유연대다. 이들은 미 대사관 앞 집회 장소를 지키기 위해 24시간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오늘 수요일 밤이 바로 김영선 차례다.
미국을 지킨다며 길거리 비닐하우스를 지키는 김영선. 가수를 꿈꾼 그녀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김영선은 한마디로 정리했다.
사랑이 꿈 실현의 바탕이 되면 좋으련만, 김영선에게 '그 죽일 놈의 사랑'은 꿈을 접게 했다. 1996년, 남자친구는 사업에 실패해 1억 원 빚을 졌다. 스스로 해결하면 좋을 텐데, 남자는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 했다.
김영선은 그 남자와 결혼해 빚을 갚아주겠다고 결심했다. 결혼 후 큰돈이 안 되는 가수 생활을 접었다. 영어 학습지 교습과 과외를 하며 월 500~600만 원씩 벌며 빚을 갚았다.
웬만큼 빚을 갚자 이번엔 남편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공황장애, 협심증 등 남편 병원비로 많은 돈을 썼다. '죽일 놈의 사랑'은 이제 '전쟁 같은 사랑'이 됐다. 가족 중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김영선뿐이었다.
사랑에 눈이 멀면 몸이 고단해 하는 법. 쉴 새 없이 일하는 김영선의 눈에 한 신문광고가 눈에 박혔다.
돈이 필요했던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1999년 12월, 자격시험에 합격해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했다. 첫 목표는 구로동 소재 20층 빌딩에 입주한 회사들. 김영선은 맨 위층부터 내려가면서 모든 사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한 달 설득한 끝에 빌딩에 입주한 업체 중 70%를 고객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다음 해인 2000년, 회사에서 가장 실적이 좋은 보험설계사에게 주는 '연도대상'을 수상했다. 2년 뒤에는 다른 회사의 부지점장으로 스카우트 됐다.
경제가 안정되니 이번엔 김영선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앓던 류머티스가 악화됐다. 2011년, 관절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김영선은 목발을 짚으며 일했다. 직장 동료의 권유로 병원에 갔다. 진단결과 병명은 '강직성 척추염'과 '류머티스'. 의사는 당장 수술하라고 말했다.
사랑 앞에 약한 김영선은 의사 앞에선 강했다. 수술을 거부하고 약만 처방 받았다. 통증은 더욱 커졌다. 결국 2016년 6월 23일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후, 언제 아팠는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몸이 좋아졌다. 몇 달 뒤인 늦가을, 출근을 준비하다 뉴스를 봤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야기가 나왔다. 몸이 떨리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남편보다 강력한 새로운 사랑의 불길이 김영선을 덮쳤다.
너무 아픈 사랑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불같은 사랑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김영선의 사랑은 누구도 끌 수 없는 거대한 화염이었다. 그 사랑을 위해 김영선은 자신의 모든 걸 불태웠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뒤, 머리 희끗한 노인들이 입김을 뿜으며 "탄핵반대!"를 외쳤다. 그 뉴스를 보고 김영선은, 자기 꿈을 접게 한 첫 번째 사랑인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이 말했다.
그렇게 김영선은 새로운 사랑의 길로 들어섰다.
2016년 12월 24일, 생애 첫 태극기 집회에 나갔다. 덕수궁 대한문 앞 집회 무대에서 심수봉의 <무궁화>가 흘러나왔다.
사랑에 눈이 멀면 마땅히 보여야 할 게 안 보인다고 했던가. 태극기 집회에 가기 전, 김영선이 박근혜에 대해 아는 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집회 무대 대형 화면에 나오는 박근혜의 모습은 황홀했다. 아름다워도 너무 아름다웠다.
탄핵 된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 서울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간 날, 김영선도 삼성동으로 달려갔다. 차에서 내린 박근혜와 눈이 마주친 순간, 울음이 터졌다. 김영선의 통곡이 주택가에 메아리쳤다.
김영선은 태어나서 자신을 가장 크게 울게 한 여자를 위해 거의 매일 거리로 나갔다. 국회 앞 토크콘서트, 서울구치소 앞 공연, 서울 순회 1인 시위, 각종 기자회견, 광화문 태극기 집회... 집회에 처음 나간 날로부터 1년, 집회현장에 머무는 시간은 일하는 시간보다 많아졌다.
2017년 말, 대학교 1학년이던 딸이 엄마 김영선에게 말했다.
남편도 처음과 다른 말을 했다.
사랑에 미치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법. 김영선은 일을 멀리했다. 2018년 6월, ‘연도대상’ 출신 김영선 보험설계사는 회사로부터 해고통보를 받았다. 회사를 떠나니 더 자유롭게 태극기 집회에 나갈 수 있었다.
김영선의 본업이 보험설계사에서 애국가수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미 태극기 집회에서 유명인사였다. 언젠가 태극기 집회에서 알게 된 한 지인이 집회 현장에서 김영선에게 말했다.
바로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류머티스 후유증 때문에 입이 손가락 두 개 너비 정도밖에 벌어지지 않았지만, 현역 가수 시절 활용했던 복식호흡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노래를 마치자 "앵콜!" "잘한다!" 외침이 쏟아졌다.
가창력이 알려지자, 여러 태극기 집회에서 섭외요청이 들어왔다. 일주일에 4~5일 태극기 집회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이 사랑하는 '애국가수' '태극기 아이돌'이 됐다.
박근혜에게 빠진 엄마 김영선은 딸에게 소홀했다. 딸은 등록금과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여러 개를 동시에 했고, 머리 자를 돈이 아까워 4년 동안 미용실에 가지 않고 ‘셀프컷팅’을 했다.
김영선의 말은 이렇게 이어졌다.
딸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김영선의 말은 애국으로 흘렀다.
딸은 실질적 가장이 되었다. 남편은 몸이 좋지 않아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 코로나로 인해 무대 서는 횟수가 줄자, 김영선의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가정 생계를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부터 김영선은 2집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연습실은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차에 노래방을 운영하는 태극기 선배가 언제든지 와서 연습하라며 공간을 내주었다.
지난 3월 10일에서 11일까지 밤샘 1인시위, 정말이지 김영선은 쉼 없이 노래했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하며 계속 불렀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한 시청자가 채팅창에 신청곡을 주문했다.
스피커 달린 블루투스 마이크에서 반주와 함께 김영선의 노래가 시작됐다.
트로트, 락, 팝, 뮤지컬, 가곡... 김영선은 11시간 동안 100개 넘는 곡을 라이브로 소화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아침 7시, 김영선은 몸을 좌우로 흔들며 김추자의 <아침>을 부르기 시작했다.
밤새 그녀를 지켜보며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안 힘들까?
많은 직장인이 직장으로 향하는 오전 8시, 김영선은 집으로 향하는 전철에 올랐다. 태극기 하나, 성조기 하나 들고 말이다.
김영선은 노래가 좋아 가수가 됐고, 남편이 좋아 가수를 접었다. 박근혜가 좋아 거리에서 통곡했고, 그러다 직장까지 잃었다. 이젠 미국을 위해 수요일 밤 9시부터 목요일 아침 8시까지 노래를 부른다.
김영선의 말대로 이 모든 건 사랑 때문이다. 그 죽일 놈의 사랑, 전쟁 같은 사랑, 불타는 사랑…
밤샘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머리가 무거웠다. 피로 때문만은 아니다. 김영선의 그 숱한 사랑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누구 말대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닐 거란 생각도 했다.
3월 24일 수요일 오늘, 김영선은 또 미국대사관 앞에서 노래를 한다. 밤새도록, 해가 뜰 때까지, 오늘 퇴근한 사람이 내일 출근할 때까지.
*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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