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수사국(FBI)이 20일(현지시간)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해 현재까지는 증오범죄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AP통신>은 이날 "FBI가 현재까지 증오범죄란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수사관들은 증오범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지만 법적 제약에 직면해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연방법은 증오범죄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인종, 성별, 출신국가, 성적 지향 등 때문에 범죄의 표적이 됐거나 권리를 침해 받은 사실을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인종 증오범죄로 기소하기 위해선 인종차별과 관련된 문자 메시지나 인터넷 게시물 등과 같은 증거가 있어야 한다.
경찰에 체포된 용의자 로버트 애런 롱은 지난 16일 애틀랜타 일대 마시지 숍과 스파 등 3곳에서 총기를 난사해 한국계 여성 4명을 포함해 8명이 사망했다. 이들 중 6명이 아시아계 여성이며, 백인 여성 1명을 포함해 피해자 중 7명이 여성이다. 백인 남성인 롱은 경찰 수사 과정에서 범행 이유에 대해 자신이 "성중독"이라고 주장하며 아시아계를 표적으로 한 인종범죄에 대해선 부인하고 있다.
당초 인종 증오범죄의 유력한 증거로 알려졌던 롱이 작성했다던 페이스북 게시물은 '가짜'로 확인됐다. 이 글에는 "모든 미국인은 우리 시대 최대의 악인 중국에 맞서 싸워야 한다" 등 중국을 강하게 혐오하는 표현이 있었다. 하지만 이글에 대해 페이스북 대변인은 "이 화면 캡처는 가짜"라고 밝혔다고 <뉴스위크>가 보도했다.
조지아주 경찰들도 증오범죄 적용은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조지아주 증오범죄법은 범죄자가 다른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을 때 가중 처벌 되도록 하고 있다. 법은 피해자의 인종, 피부색, 종교, 출신 국가, 성별, 성적 지향, 젠더, 정신적· 신체적 장애가 범행 동기인 경우 특정 범죄에 추가 처벌을 허용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롱은 8건의 살인과 1건의 가중 폭행 혐의로 기소 절차를 밟고 있다. 조지아주 경찰은 증오범죄 가능성에 대해선 열어두고 수사 중이라는 입장이다. 증오범죄 적용 결정은 체로키 카운티와 애틀랜타 풀턴 카운티 지방 검사에게 달려있다고 AP가 보도했다.
애틀랜타 시장 "증오범죄" 주장...바이든 "미국은 증오 피난처 될 수 없어"
한편, 흑인 여성인 케이샤 랜스 보텀스 애틀랜타 시장은 19일 CNN과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내게는 증오범죄처럼 보였다"며 경찰과 다른 입장을 밝혔다. 보텀스 시장은 "이것은 아시아 마사지 숍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살해된 여성 6명은 아시아인이었다"며 "이를 그것(증오 범죄)이 아니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19일 애틀랜타를 방문해 아시아계 지도자들을 만나 의견을 청취했다. 또 애틀랜타 에모리대에서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급증한 아시아계를 대상으로한 인종차별 범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바이든은 "(범행)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이걸 안다. 너무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걱정하면서 거리를 걸어간다"며 "그들은 공격당하고 비난당하고 희생양이 되고 괴롭힘을 당했다. 언어적·물리적 공격을 당하고 살해당했다"고 강조했다.
바이든은 "증오와 폭력은 보이는 곳에 숨어있고 침묵과 자주 만난다. 이는 우리 역사 내내 사실이었다"면서 "우리는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야 한다. 미국은 증오의 피난처가 될 수 없다. 중단돼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최초의 여성이자 아시아(인도)계 부통령인 해리스 부통령도 이날 "인종주의는 미국에 실재하고 언제나 그랬다. 외국인 혐오, 성차별도 마찬가지"라면서 "대통령과 나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폭력에, 증오범죄에, 차별에 맞서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성중독'이라며 여성을 살해하는 것은 증오범죄가 아니라 정신 이상인가"
한편, 용의자 롱이 "성중독"이라고 주장하며 증오범죄로 가중 처벌되는 것을 피해가려는 움직임에 대해 아시아계 여성들을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분노하고 있다. 롱이 체로키에 있는 아시아 마사지숍에서 4명을 살해한 뒤 차를 타고 40여 분을 이동해 애틀랜타의 아시안 스파와 마사지숍이 밀집한 지역으로 가서 다시 4명을 살해했다. 피해자 8명 중 7명이 여성이며, 6명이 아시안 (여성)이다. 피해자만 봐도 '여성'과 '아시아계'를 의도적으로 살해했음이 드러난다. 그런데도 롱은 '성중독'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증오범죄를 피해가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롱의 이런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이 사건은 증오범죄로 처벌돼야 한다는 주장을 여성들이 하고 있다. 롱이 주장이 여성, 특히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에 대한 증오범죄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보텀스 시장과 한인단체 따르면, 이들 업소는 성매매 업소가 아니다.)
아시아계 여성 작가인 트레이시 쿠안은 19일 <엘에이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애틀랜타 총기 난사 사건은 성 노동자에 대한 증오범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쿠안은 "아시아 정체성은 흑인과 백인에 비해 잘 규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팬데믹으로 인한 전직 대통령의 일련의 공격 이후 지역 사회 안팎에서 단일화된 세력으로 가시화 됐다"며 "인종은 공개적이고 성은 비공개적이지만 애틀랜타 총격 사건으로 인해 이런 합의는 무산됐다"고 이번 총격 사건이 놓인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 대해 지적했다. 그는 "인종화된 감정이 성적 집착보다 금기시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며 "아시아계 미국인을 살해하는 것은 증오범죄로 묘사되는 반면, 성 노동자를 살해하는 것은 정신 건강 문제로 여겨진다"고 비판했다.
한편, 주말인 20일 애틀랜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필라델피아 등 미국 주요 도시에서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애틀랜타 사건의 피해자를 추모하면서 인종차별 범죄를 규탄하고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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