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당. 대부분 금은방 이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이름이 한국 현대사, 특히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주목할 만한 단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독립운동 하면 크게 1)김구를 중심으로 한 상해의 임시정부 2)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미국에서의 외교 운동 3) 조선의용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에서의 무장투쟁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을 생각한다.
이에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을 추가할 수 있다. 같은 운동이라도 국내에서의 운동이 가장 값질 것이다. 하지만 극악한 일본의 탄압에 1930년대 이후에는 공산당 등 좌파를 중심으로 한 운동만 살아남았고, 일제 말기에는 대부분 투옥되거나 병사하거나 변절해, 박헌영, 이현상 등 극소수 외에는 살아남지 못했다.
그 규모가 빈약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일제 말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추구했던 세력들이 있었다. '널리 나라의 빛이 되자'는 뜻의 보광당이 그런 조직 중의 하나다. "일제를 타도하자!"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던 1944년 9월 1일, 24명의 젊은이들이 덕유산에서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쳤다.
1945년 봄, 150명으로 늘어난 보광당은 평야가 가까워 식량을 구하기 쉬운 쾌관산(현 대봉산)으로 이동해 화염병 만들어 일본 경찰 토벌대를 격퇴했고, 7월에는 함양경찰서 공격해 잡혀있던 동지들을 구출했다고 한다. 이병주의 <지리산>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 보광당을 만든 하준수를 체포해 조사한 전 육군특무부대 특무처장에 의하면, 이들은 함양 이외에도 산청, 무주, 임실, 장수경찰서를 공격했다고 한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 젊은이들을 징용, 징병으로 끌고 갔던 일제의 발악에 조선 젊은이들의 선택은 뻔했다. 하나는 박정희‧백선엽처럼, 민족이든 뭐든 다 팽개치고 출세를 위해 일왕에 충성을 맹세하고 독립군 때려잡는 일본군 장교로 들어가는 길이다. 두 번째 선택은 일본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징용이나 징병에 끌려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택한 것은 바로 이 길이다. 세 번째 선택은 장준하‧김준엽처럼 학병으로 중국까지 끌려갔다 도주해 독립군에 합류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마지막 선택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징용과 징병을 피해 지리산, 월악산, 덕유산 등에 숨어버리거나, 나아가 산속에 작은 해방구를 만들어 기회 날 때마다 무장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보광당이 바로 이들 중의 하나다.
이들은 임정, 조선공산당 같은 거대 조직이 아닌 소수집단이어서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게다가 상당수가 '좌파'였던 이들은 해방 후 빨치산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졌다. 하지만 국내에서의 무장투쟁이 최고의 항일운동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투쟁은 새롭게 평가받아야 한다.
참여자들과 지역사람들의 구전으로 전해진 그들 이야기는 여러 문학작품들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다. 보광당의 이야기를 다룬 이병주의 <지리산>이 그 선구자다. 1980년 초, 시국사범 권운상이 감옥 생활을 함께 한 월악산 항일유격대 비전향장기수 등의 이야기를 몰래 메모해 나와 신문 등을 통해 검증하고 집필했다는 대하실록 소설 <녹슬은 해방구>는 이 같은 움직임을 가장 잘 요약해주고 있다.
"39년인가 40년인가부터 징용이 실시됐는데, 41년, 42년 정도엔 집단 이탈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주로 모이는 곳이 산이었죠. 그것도 소백산일대가 가장 많았을 겁니다. 그러다가 43년과 44년에 이르러서는 징병제를 거부하고 산으로 들어온 진보적 지식인들이 대부분 지도부를 형성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 비전향장기수의 회고다.
조선공산당과 빨치산 운동에 대해 깊이 있는 조사를 해온 안재성 작가도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40년대 들어 전국 곳곳에서는 일본군대에 끌려가기를 거부하는 젊은이들의 입산과 항거가 이뤄졌다. 처음에는 몇 명씩 산으로 도피했다가 숫자가 늘어나자 조직적으로 경찰주재소를 습격, 무장을 하여 경찰에 대항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기도 포천에서 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경찰 무기를 탈취해 산중 생활을 하며 조선민족해방협동단을 만들었다 체포되기도 하고 (…) 충주 일원의 청년들은 월악산 유격대를 결성해 친일 관료를 죽이기도 했고 속초 청년들은 설악산에 들어가 산악대라는 이름으로 경찰에 저항하기도 했다."
1944년 7월 경북 경산에서는 29명의 젊은이들이 징용을 거부하고 투쟁을 하기로 결의, '결심대'를 조직했다. 산세가 험한 대왕산에 진지를 잡은 이들은 대장간에서 쇠로 무기를 만들면 발각이 될까봐 죽창으로 무장해 일본 경찰과 싸우다 식량이 바닥난 탓에 보름 만에 체포됐다. 두 명은 옥사했고 나머지는 해방과 함께 풀려나, 모두 애국애족장을 받았다. 매년 이들을 기리는 추모제도 열리고 있다.
대구 달성초등학교 친구들 중 좌파 성향을 가진 15명이 1944년 원대동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있다'는 소식을 미국 단파방송을 통해 듣고, 일본 패망 즉시 무기고를 습격‧보복하려고 '원대결사대'를 구성했다가 적발되는 등, 그 예는 많다. 이들의 이야기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들은 최근 들어 매우 중요해졌다. 징용‧징병, 나아가 위안부까지도 '자발적인 지원'이라고 주장하는 극우 세력의 역사부정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보광당과 결심대 사례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징용‧징병이 자발적이었다면, 왜 이들은 굳이 피해 목숨을 걸고 산으로 들어가 생고생을 했겠는가?
이들의 투쟁은 항일독립운동사와 일제 말 젊은이들의 분화뿐 아니라 빨치산의 역사에도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우리는 대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좌익 탄압, 특히 '제주 4‧3 항쟁 진압을 위해 출동하라'는 이승만 정권의 명령에 저항한 여수 주둔 14연대 좌파들이 일으킨 여순 사건 이후, 빨치산이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다. 진압군이 쳐들어오자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된 이들이 '구빨치'다. '신빨치'는 한국전쟁 때 남하한 북한군이나 좌파가 인천상륙작전 등의 영향으로 북에 돌아가지 못해 산으로 들어간 1950년대의 빨치산이다.
보광단, 결심대, 산악대 같은 항일투쟁 조직의 존재는 빨치산의 역사가 일제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구빨치보다 더 오래된 '구구빨치'라고 하겠다. <만다라>로 유명한 소설가 김성동 씨에 따르면, '구구빨치'의 역사는 더 이전으로 올라간다. 김개남은 동학혁명의 급진파였다('손호철의 발자국'9. '전봉준에 가려 잊혀진 또 다른 녹두장군 김개남을 아시나요' <한국일보> 2020년 10일 5일자 참고). "그의 부대에서 살아남은 농군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의병이 되었고 그들 뒷자손들은 일제 때 '항왜빨치산'이 되었으니 '구구빨치산'입니다."
과장된 이야기로 들리지만, 근거가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월악산 항일빨치산 출신은 이 같은 항일빨치산 소부대들이 산재해 있었기에 "45년 해방 이후에 남로당이 그렇게 빠른 속도로 소백산맥 주변 조직을 장악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녹슬은 해방구>에 따르면, 충북 봉양 대지주의 아들 조성옥은 경성대를 졸업하고 노동운동 하다가 조선공산당 5차 사건으로 조직이 와해되자 귀향했다. 그는 1942년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고 월악산으로 들어가 징용‧징병 기피자들을 모아 유격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죽령에서 중앙선 화물열차를 폭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안재상은 일제 말에 이 같은 규모의 무장투쟁이 국내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다고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보광단 대장이던 하준수(1921~1955)는 함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잣집 아들이었다. 가라데 6단 하준수는 일본 순회 가라데 시범을 다닐 정도로 무술에 뛰어났다. 그는 진주중학교 재학 시절 일본인 선생을 폭행해 퇴학을 당하고 유학을 갔으나 징병 영장이 나오자 산으로 올라갔다. 해방 후 남로당 가입을 거절할 정도로 '자유주의자'였던 그는 뛰어난 무예 덕에 이승만의 경호대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친일파 중용에 분노해 결국 다시 산으로 들어가 '남도부'라는 빨치산의 대장으로 활약하다 체포돼 처형당했다.
그가 '동네 최고의 부자'로 생활했던 함양 병곡면 도천리는 넓은 평야를 자랑하는 마을이다. 그러나 그의 집이 몰락한 탓인지, 천석꾼 부잣집은 사라지고 없다. 동네 뒤편으로는 그가 조직한 보광당의 근거지인 쾌관산이 대봉산으로 이름을 바꿔 도천리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도천리를 떠나 경산 사월리로 향했다. 사월리에는 '항일 대왕산죽창의거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해발 600여 미터의 악산인 대봉산 정상에도 대구지역 유적답사를 오래 해온 정만진 씨가 "독립운동 기념물로 드물게 산꼭대기에 세워진 전적비"라고 평한 '항일 대왕산죽창의거 전적비'가 있다. '징용‧징병이 자발적 지원이었다'고 주장하는 역사부정론자들이 반드시 와봐야 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 앞에 서면, 죽창으로 일제에 맞섰던 애국 청년들의 기개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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