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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중산층 사회, 그리고 새로운 노동운동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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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중산층 사회, 그리고 새로운 노동운동의 미래

[번역] 구해근 전 하와이대 사회학 교수 인터뷰

이 글은 지난달 19일 플랫폼C(☞바로가기 : 구해근, "노동자들의 고통으로 일궈진 경제 기적을 찬양할 순 없다")에 게재됐다. 의역 주의. 편집자.

이 글은 2월17일자 중국의 <펑파이신문(澎湃新闻)>에 게재된 구해근 전 하와이대 사회학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번역한 것이다. 원제는 '具海根:我无法在劳工困境中赞扬韩国经济奇迹'로, 인터뷰 속에서 구 전 교수의 말에서 따왔다. 구 전 교수는 우리에게는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창비 펴냄, 2002)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학자다.

이 인터뷰에서 구 전 교수는 자신의 학문 연구 궤적에 관해 개인적이면서도 한국 사회의 맥락과 얽힌 과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학문적 관심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영세 자영업자에서 한국 노동자 계급으로, 그리고 최근 중산층으로 이어졌는지 설명한다.

또 지난해 '조국 사태'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고민해야 할 점을 제시하며, 나아가 동아시아(특히 한국) 노동자운동의 국제적 관심이 여전히 서구에 도움을 갈구하는 방향으로만 남아있는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구 전 교수의 이러한 분석은 한국의 사회운동이 뼈아프게 생각해야 하는 지점이다.

구 전 교수가 제기한 쟁점 중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그가 던지는 화두만큼은 충분히 토론하고 논쟁할 가치가 있기에 이 인터뷰를 소개한다. 최대한 맥락을 통해 뜻을 전달하려 했으나 영어로 인터뷰한 내용을 중국어로 풀어 쓴 기사를 다시 번역했기 때문에 학술적 용어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정확할 수 있다. 역주.

질문 : 샤오위(晓宇) 옥스포드대 정치학 박사

인터뷰 : 구해근 전 하와이대 사회학 교수

번역 :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전태일 열사 동상. ⓒ연합뉴스

서울 중구 명동 인근의 을지로에는 사나운 불길에 휩싸인 청년의 그림이 이따금씩 나타난다. 이곳엔 청계천을 마주하고 전태일 기념관이 있다. 한국 노동자 운동의 상징적인 곳이다.

1970년, 당시 22세의 전태일은 노동자 대표로서 자본과 정부를 대상으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협상을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손에 쥐고 평화시장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노동자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길 희망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긴 그는 그 시대 노동 항쟁과 운동의 촉진제가 됐다.

2020년은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지 50주기가 된 해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에게 국민훈장을 추서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새로운 노동운동과 개혁의 상징으로 삼았다.

동아시아 경제의 번영과 4차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서 노동자들은 다시 전무후무하고 혹독한 정세를 마주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둘러싼 공적 담론 역시 날이 갈수록 왜곡되고 있다. 중국의 배달 노동자들이 '시스템에 갇혀' 있을 때, 한국의 배달 노동자들 역시 알고리즘의 억압 아래서 빈번하게 사고를 겪고 있다.

한국의 라이더유니온과 택배노조, 중국의 라이더연맹(骑手联盟) 등 배달 노동자들의 노동조합(혹은 상호협력 네트워크)이 한국과 중국 양국에 출현했다. 중국의 IT빅테크 기업에서 청년들이 급사할 때 한국의 택배노조는 분류 작업으로 인해 과로사하는 노동자들을 조직해 파업을 일으켰다.

다른 지역에 비해 동아시아 내의 횡적 연합은 꽤나 긴박해보인다. 노동자들의 상황은 당대 생산 방식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경제는 날로 발전하고 데이터 기술은 '미래형 경제시스템'을 보급하고 있는데, 과로와 네이줜(内卷; 내권; involution, 질적 발전 없는 양적 성장)은 대체 왜 일상이 되었는가? 국가별 시스템이 만들어진 과정은 다르지만, 오늘날 경제구조에서 노동자들이 마주하는 곤경과 주변화의 추세는 같다. 그렇다면 노동자 권리를 위한 노동운동은 이제 어디로 향해야 하나.

[※역주 : '네이줜(内卷)'이란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가 인도네시아 사회를 참여·관찰한 뒤 내놓은 저서 <농업의 내향적 정교화(Agricultural Involution)>(일조각 펴냄)에서 제시한 'involution'이란 개념에서 유래했다.

역사학자 프라센지트 두아라는 저서 <Culture, Power, and the State: Rural Society in North China, 1900-1942>에서 '근대 중국 역사의 바퀴가 안으로 퇴행(involution/内卷)했다'고 묘사하면서 이 개념을 사용했다.

이 개념은 다시 지난해 인류학자 샹뱌오(项飙)가 중국 내 진보언론인 <펑파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하면서 지식사회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샹바오는 "중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재조직화되지 않으면, 집정당(여당. 중국의 공산당을 의미)의 고강도 통제와 내수 활성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런 위기(네이줜)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순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펑파이신문>이 구 전 교수를 찾았다. 구 전 교수는 세계적인 사회학자로, 동아시아 노동운동 연구의 선구자 중 한명이다.

구 전 교수는 10년에 걸쳐 완성한 저서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권위주의 정부와 보수적인 유교 문화 속에서 냉전 시대의 한국이 어떻게 가장 급진적이고 강력한 노동운동을 탄생시켰는지, 그리고 뜨거웠던 노동운동의 열기가 왜 1990년대에 이르러 쇠락했는지 분석했다.

최근 그는 전세계 신흥 중산층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2011년의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이 내건 '1% 대 99%'라는 슬로건에서 시작해 '10%/90%'의 틀을 제시하여 현재의 소득 분화를 분석했다.

그의 비판적 시선은 '초조한 부유층'이란 화두로 심화되는 계급 불평등 문제로 확대됐다. 퇴임하고 4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아침마다 도서관으로 가 연구를 하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10년 걸쳐 차기 연구 저작을 집필하고 있다. 낮은 톤으로 고전적 사회계급 이론들을 파헤치는 그의 지향은 단순히 '비(非)서방'의 시각을 갖는 것에 있지 않다. 변화하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대항을 묘사하기 위해 정밀한 실증적 기초를 찾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인터뷰 중 그는 종종 중국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그러면서도 중국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이라며 "나는 한국의 상황에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고 그것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오늘날 어떤 나라의 경험도 완벽하게 독특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구해근 지음, 창비 펴냄)

한국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쇠락

펑파이신문(펑파이) : 미국에 오래 있었다. 1940년대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인데 어떻게 1960~70년대 미국으로 가 학자가 됐나.

구해근 : 1960년 대학생들이 이끈 4·19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서울대 신입생이었던 나도 참여했다. 이 운동이 나에게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됐다.

나는 이전부터 사회 불평등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집안 환경 때문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농촌에서 도시로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 집은 아주 가난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누나는 나보다 똑똑했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어야 했다.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에서 자랐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삶을 알았다. 노동자들이 고생하며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성실하게 일하는데 좀처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현실에 큰 문제의식을 느꼈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어 사회학과를 선택했다. 졸업 후에는 <중앙일보>에 입사해 2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그런데 내 대학 교수님은 내가 꼭 학술 연구를 하길 바랐다. 내 경제 상황을 알고 캐나다의 브리티시콜롬비아대에 장학금을 받고 석사 과정을 밟을 수 있는 기회를 찾아줬다. 그 교수님 덕분에 60년대 말에 출국하게 됐다.

석사 과정 후엔 미국의 노스웨스턴대에서 장학금을 받고 박사 과정을 밟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아무도 한국의 노동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노스웨스턴대에 1969년부터 73년까지 있었는데, 그 사이인 1970년에 전태일 분신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는 박정희정권 시기라 언론이 이 사건을 자유롭게 보도할 수 없었다. 나는 신문 속에서 짧은 문장만으로 이 사건을 찾아냈다. 그후에 한국에서 기자를 하던 친구로부터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됐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 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당시에는 더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경로가 없었다. 그래서 노동자 문제에 대한 논문을 쓸 수가 없었고, 대신 한국의 개인 상공업자들에 대해 썼다. [※역주 : 구 전 교수의 박사 논문은 <Occupational Situs and Social Stratification in a Developing Society (1974) 개발사회에서의 직업의 위치와 사회적 계층화>이다. 1975년에는 미국사회학회에서 <Small Entrepreneurship in a Developing Society: Patterns of Labor Absorption and Social Mobility 개발사회에서의 영세자영업자의 역할 : 노동몰입과 사회이동의 패턴>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자랐다. 당시 미국 사회학계에서는 영세 자영업자에 대한 연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서방 국가에서 스스로를 고용하는 경우가 적었다. 반면 중국 등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노점상 등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 부분이 나중에 '비공식 경제(Informal Economy)'라는 이름으로 경제학의 중요한 영역이 됐다.

1970년대에 아시아 경제는 아주 빠르게 발전했다. 특히 '아시아의 네 마리의 용(亚洲四小龙)'이 있었다. 당시 나는 정치경제학에서의 계층 문제에 관해 연구했다. 대만과 한국의 토지개혁과 계급 변화에 관한 연구였다. 이 연구로 인해 작은 성취가 있었고, 연구를 계속해나갈 수가 있다.

펑파이 : 박사 학위를 딴 후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하다 나중에서야 노동자 문제 연구를 시작했다는 건 생각지 못했다.

구해근 : 80년대 초에 한국에 한 번 갔다. 그때 우연히 여성 노동자들의 일기를 찾았다. 진보적인 교회와 학생 리더들이 조직한 야학에 모인 여성 노동자들이 쓴 거였다. 그들은 모두 농촌에서 상경했고, 돈을 벌어 집안 생계를 지탱하기 위해 온 거였다. 노동조건은 아주 열악했다. 매일 12시간에서 14시간씩 일했다. 하지만 여전히도 공부를 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야학에 참가한 거다.

대학생 조직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일기를 지하에서 출판하는 방식으로 발행했다. 나는 이와 같은 자료들을 하와이대로 가져갔다. 사회의 불공정함을 스스로 알고 있긴 했지만, 노동자들이 몸으로 겪은 자신의 경험을 쓴 것을 읽으면서 정말 충격을 받았고,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엔 일종의 강렬한 죄책감을 느꼈다.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학생들, 지식인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당시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연대를 '노학연대'라고 불렀다. 퇴학하거나 휴학한 대학생들이 공장에 들어갔다. [인터뷰어 : 1980년대 운동을 목적으로 공장에 진입한 학생들은 약 3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고작해야 나는 미국에서 편안하게 조교수나 하면서 한국의 경제 기적에 대해 쓰고 있구나!' 그 일기들을 읽었을 때, 나는 최소한 이걸 번역해서 전 세계가 한국 노동자들의 처지를 알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대학생들이 민주화운동과 정치에 관해 쓴 글들이 많았는데 노동자 계급의 시각에서 출판된 것은 적은 편이었다.

죄책감과 정치적 양심 외에 학술적인 포부도 있었다. 당시 수업에서 흐리멍텅하게 톰슨(Thompson)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을 읽고 있었다. 의심할 바 없는 대가의 저작이었다. 나도 나중에 이런 책을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일기를 발견한 후에 더 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었고, 해외에서 한국 노동자 운동을 연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항쟁을 사회운동적 시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어느 정도 편협한 것이기도 하다. 그 뒤에는 노동자들이 독립적 계급이 되어 경제적인 의식과 단결의 문화를 형성하는 과정, 즉 노동자계급의 형성이 있다. '한국의 문화 환경 속에서 형성된 노동자계급은 영국이나 미국의 역사 과정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점이 바로 나의 학술적 출발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인도주의적 관심에서 노동연구를 시작한 것이지, 마르크스주의나 좌파적인 입장처럼 노동자계급은 사회변혁의 주체라는 관점에서 출발한 게 아닌 셈이다.

펑파이 : 그런 배경이 선생님의 연구 성과를 다면화시키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사회운동과 정치투쟁의 시각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의 시대적·지역적 경험으로서 전통적인 사회계급이론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말이다.

선생님은 주로 국가와 문화라는 포인트를 제시했다. 권위주의 정부의 강력한 개입 속에서 외자 유치와 공적 자금 투입으로 자본 투자가 이뤄졌고, 그런 과정에서 경제발전이 이뤄졌다. 그리고 유교문화의 '경청'과 '복종'이라는 훈육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억압 때문에 급진적이고 공격적인 노동자운동 문화가 탄생하기도 했다.

구해근 : 동아시아나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모델에서 국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아시아의 경험과 초기 공업화 국가를 구분케 한다. 박정희정권에서 전두환정권에 이르는 시기 한국은 수출지향의 국가자본주의를 유지했고, 정부는 끊임없이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을 탄압했다. 아주 노골적인 친자본·반노동자의 입장을 드러냈다.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의식이 형성되고, 노동자운동이 촉진됐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일거리를 찾지 못했다. 학출(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은 일단 사회운동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퇴학당하고 취직도 못했다.

국가권력은 이런 힘을 투항시키지 못했다.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게 결국 단결해서 저항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1970년대에 시작된 노동조합이나 학생운동, 산업선교운동들이 서로 연맹을 결성하게 된 거다. 그것이 소위 '민중운동'의 기초가 된 거다. 당시 그것은 '무산계급혁명'보다 더 가능성이 있었고, 광범위한 지지도 받고 있었다.

문화에 대한 관심 역시 톰슨에게서 얻었다. 톰슨의 관점은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관점과는 좀 달랐다. 그가 말한 '계급'은 경제구조의 직접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는 개인이 삶의 경험을 통해 반응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비로소 계급문화의 지위를 형성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한국 노동자들의 각성은 오랫동안 지배해온 유교 문화, 특히 '교육' 문제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마주하면서 사회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노동자들과 인터뷰하면서 나는 그들이 '교육'과 '소실'에 민감하다는 걸 알았다.

경제적 착취 이상으로 노동자들은 사회에서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고 이로 인해 정신적 경멸과 수모를 겪는다. 육체노동을 예로 들면, 흔히 '더럽다'거나 '냄새난다'라는 이미지가 있다. 공장 노동자들에게 '공순이'나 '공돌이', 혹은 '노가다'라는 경시의 칭호를 붙인다.

관건은 노동자들의 이러한 문화적 지위를 어떻게 바꾸느냐다. 교회 활동과 야학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했다. 1980년대의 독립 노동조합 중 '문화행동' 공연을 전담하는 단체들이 있었는데, 여기서 노동자계급은 불평등으로 인한 '한'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인터뷰어 : '한'은 한국인들의 국민정서와 정신기질이다.]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드러낸 거다.

1987년 전국 총파업이나 1990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노동자들이 골리앗 크레인 위로 올라가며 나타난 '산업전사'의 이미지는 일종의 불복종, 자존감 넘치는 노동자라는 지위였다.

ⓒ연합뉴스

펑파이 : 이런 저항은 역사의 유산인가 아니면 산업화의 새로운 현상인가? 또 선생님은 한국의 노동자계급에 대해 분석하며 노동자운동 초기 여성 노동자들이 선봉에 있었고 이들이 노동자운동을 주도하는 지위에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구해근 : 역사가 반복된다는 관점에서 한국 사회에는 뿌리 깊은 저항의 정신이 있다고 본다. 한국은 큰 나라들 사이에 껴 있는 데다 외세의 개입을 경험해왔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는 설령 저항이 쓸모없다 하더라도 부당한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깊은 감정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강한 국가(strong state)가 있어도 사회적인 '갈등 정치(contentious politics)'의 전통이 존재해왔다.

산업화 시기 국가의 탄압은 이러한 저항문화의 발흥에 영향을 미쳤다. 국가는 자본의 편에 서서 노동권을 쟁취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공산주의'로 몰아 탄압했다.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선봉에 섰다는 사실은 한국 노동자운동 역사에서 아주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는 세계 노동자운동에서도 아주 보기 드물다.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 모여 있었고, 생활적인 연계가 긴밀했다. 같은 지역이나 학교 출신의 여성 노동자들이 한 공장으로 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처우는 남성 노동자들에 비해 떨어졌고, 노동을 통한 계층 이동의 가능성도 낮았다. 이렇다 보니 그들의 투쟁성이 만들어진 거다.

또 진보적인 교회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교회는 여성 노동운동가들에게 보호막을 제공했다. 당시엔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을 남성 노동자들이 탄압하기도 했다. 때때로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노동조합에 와해와 반발을 부추기기도 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노동자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한국 산업구조가 중공업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었고 중공업에 주로 종사하는 남성 노동자들이 그 수나 중요성에 있어서 노동자운동에서 우세를 점하게 됐다. 그로 인해 노동자운동의 성격 역시도 남성화되고 준군사화됐다.

펑파이 : 냉전 시기에 한국 교회의 확장 과정에서도 여성들의 참여와 리더십이 두드러졌다. 당시에는 남성들이 집집마다 방문을 다니면 지하 결사 조직으로 의심받았다. 반면 여성들은 '비정치적'으로 비춰지는 경향이 있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와서는 여성의 역할도 줄었지만, 전반적으로 노동자운동이 쇠락하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노동문화운동이 약해졌다. 노조는 더이상 다양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효과적으로 보호하지 못했다. 파트타임 일자리, 비정규직 노동자의 확산으로 노동자들은 다시 주변화되고 더 낮은 곳으로 내몰리고 있다.

구해근 : 1990년대 초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썼을 때만 해도 나는 노동자운동의 발전에 크게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7년 금융위기 이후에 노동조합은 보수적으로 변했다. 많은 활동가들이 이런 모습에 실망했다. 노동자계급이 독립적인 주체가 되고 노동운동이 문화운동의 모습으로 자리잡을 때 한국 경제가 금융위기라는 중상을 입었다. 국제통화기구(IMF)의 구제정책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1998년 정부 주도로 노동운동을 중재하는 노사정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때 노동계 대표로 참여한 민주노총은 자본 측과 협상하며 고용 안정을 크게 양보했다. 대규모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받아들였다.

이후 한국의 산업구조는 중소기업과 대기업·재벌의 분화가 가속화됐고 동시에 대기업 노조와 자본의 관계는 모호해졌다. 대기업 노조는 비정규직 고용 활성화를 묵인했다. 자본은 일정 수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이용하고 착취할 수 있게 됐다.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조가 자신들의 고용 안정성을 위해 긴장 관계에 있던 노사관계의 항쟁을 다른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전이시킨 셈이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기업들은 경영 전략과 방법을 바꾼다. 노조를 거부하고 이들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복지 향상을 통해 노사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기업이 노동자들의 처우와 복지를 향상해 노사관계의 긴장을 완화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더욱 안정적이고 쾌적한 생활을 영위하게 됐고, (보수 정치인들과 언론이 말하는) '귀족 노조'가 됐다.

더욱이 과거 정치운동 과정에서 노동자들과 연대했던 대학생들과 사회단체들이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나 다른 이슈들로 관심을 돌리면서 사회적 항쟁을 목적으로 한 노동자운동은 후퇴한다. 오늘날 노동자계급은 직접적인 정당 지지도 없고 제대로 된 대표도 없다. 정치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민주화 이후의 한국을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2000년 초 내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과거 노동자운동을 이끌었던 리더들은 고급 아파트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다녔다. 그들은 나에게 '교수님 죄송해요. 우리는 이제 다들 중산층이 됐네요'라고 했다. 나는 '미안할 건 없어요. 이념과 입장만 잊지 않으면 되죠'라고 답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이 이미 초기에 가졌던 자신의 신념을 잊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최형락)

10% 대 90% : 귀족 중산계급의 근심

펑파이 : 전통적인 노동조합과 진보정당 모두 '대표성의 위기'에 빠진 것 같다. 그들이 대표해야 할 조직들과 점차 멀어지고 있다. 이는 유럽의 좌익정당들에서도 볼 수 있는 점이다. 노동자계급 내부가 분화됐다. 이들을 다시 하나의 공동체나 공동 이익의 추구를 통해 통합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은 국제노동자연맹을 조직했고, 국경을 초월한 계급의식과 단결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몇몇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면, 과거와 같은 국제 노동운동 간의 연대는 매우 드물다. 심지어 한 나라 안에서 노조를 만드는 것조차 힘들다. [인터뷰어 : 예외적 사례 중 하나를 언급하자면, 2010-2011년 한진중공업 파업 과정에서 한국과 필리핀의 노동조합이 서로 연대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구해근 : 이러한 노동의 분화가 내가 중산층 연구로 방향을 전환한 이유다.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흐름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중산층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중산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단순하다. 중국, 인도, 혹은 과거의 한국처럼 '경제가 성장하면 중산층이 늘어난다'는 식의 막연한 패러다임만 존재한다. 정부 역시 '새로운 중산층의 증가가 정권의 정치적인 안정성을 뒷받침한다'는 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유럽과 미국 같은 탈산업 국가처럼 쇠락할 거라 우려한다. 이런 관점으로는 중산층 내의 분화를 살펴볼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하는 경제 분화는 '1% 대 99%'를 전제로 한다. 월가 점령 운동을 계기로 널리 퍼진 슬로건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를 보면 모든 중산층의 수입이 감소한 것은 아니었다. 상위 10%나 20%의 자산은 증가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10%를 더 많이 봐야 한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계급성은 무엇인지.

내 관점에 이 10%에 속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중·고급의 관리자층, 엔지니어이거나 컨설턴트일 것이다. 이들은 본래의 중산층 신분에서 이탈하는 중이거나, 스스로를 일반적인 중산층과는 다른 소비문화와 교육문화를 만드는 주된 힘으로 보고, 세계화 과정에서 기득권의 지위를 얻었다. 과거 문화의 흐름을 주도해온 기존 중산층에 비해 이들 신흥 중산층은 물질주의라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이 나라들, 그러니까 신흥 중산층의 물질주의적 풍토를 형성한 신흥국들은 하나같이 경제 성장을 거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 '중산'의 정의를 주로 경제 지표를 통해 짐작한다.

오늘날 비정규직 노동자 경제는 불안정하다. 부유한 중산층은 그들의 지위를 지키고 싶어하며 이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어한다. 이와 같은 안정감이 작동하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문화는 현재 세습중산층[※역주 : 편의상 원문이 '权贵中产'이라고 표기한 것을 '세습중산층'으로 번역함]의 특징이 되고 있다.

나는 이 세습중산층이 어떻게 기존 중산층에서 벗어나 더 많은 특권을 쟁취해나갈지 주목하고 있다.

한국은 최근 '조국 사태'가 있었다. 과거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보수화되어 제도의 일부가 됐다. 이들을 '강남 좌파'라고 풍자하는데 민주와 평등을 위해 분투했던 사람들이 새로운 귀족이 돼 안락한 경제적 지위와 특권을 누리게 된 거다. 이들은 과거의 '공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여전히 한국 사회의 역량이라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통적인 노조와 이른바 '진보 정부'로부터 사실상 동시에 버림받았다. 이런 현상의 책임 일부는 신흥 세습중산층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펑파이 : 세습중산층은 불안과 권태로 가득한 계급이다. 그들의 생활 수준은 향상됐고, 다른 계층과의 격차는 점차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불안은 줄어들지 않고 늘어날 뿐이다. 이 계층은 부의 축적을 통해 불안을 해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구해근 : 이들의 깊은 불안감은 이들을 둘러싼 경제적 조건과 관련이 있다. 이들의 특권은 그 시대에 팽배했던 기회주의에 편승해 얻은 것으로 불안정하다는 특성이 있다.

세습중산층은 '파티션'[※역주 : 원문에서는 隔断, 여기서는 사회로부터의 특권적 단절을 뜻하는 것으로 보임]에 사로잡혀 있고, 구획화된 아파트단지[※역주 : 원문에서는 중국식 기초 주거·행정단위 社区. 실제로는 중산층의 gated community를 뜻하는 것으로 보임] 안에 갇혀 있다.

이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사립학교나 해외 유학 보낸다. 자신들만의 사회 규범을 새롭게 세우고 다른 계층과 더 구분되길 바란다. 이런 특징은 교육 문제에서 두드러진다. 교육의 질적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이른바 '엘리트 교육'을 통해 '엘리트 그룹'을 만들고 그 안에 모인다. 자녀 유학을 이유로 '기러기 아빠', '철새 가족'이 생겨나는 이유다.

'파티션'을 추구하고, 비용도 따지지 않고 교육에 투자하는 것만으로 불안을 해소할 수는 없다. 이런 점은 세습중산층의 인식에서 드러난다. 이들은 자기 세대에 쌓아온 특권을 다음 세대에게 이전할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영국 사회학자 필립 브라운(Philip Brown)이 말했던 '기회 함정'(opportunity trap)이다. [인터뷰어 : '기회 격차 opportunity gap'는 계층별로 가질 수 있는 사회적 기회가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기회 함정'은 여기서 나아가 그 격차를 메우기 위한 조치가 오히려 실업과 기회의 부족을 야기하는 것이다. 가령 고등교육을 보급했지만 문학 박사의 수는 늘고 일자리는 적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다음 세대에 대한 투자가 계속되면서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기 보다는 오히려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유학을 다녀온 아이들이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부모와 함께 사는 거다. 부모는 계속해서 결혼 등 자녀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 중산층은 이런 악순환이 불평등을 증폭시키고, 다음 세대의 입지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펑파이 : 중산층의 어려움은 과거 노동운동처럼 뚜렷한 항쟁의 맥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정 부분 이런 억압은 스스로 가중시킨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자기희생'을 통해 상황을 변화시키지만 그 과정에서 고통이 생기는 거다.

한국의 문화예술 작품은 주로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영화 <기생충>처럼 말이다. 이런 작품들이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고 있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 그러니까 '글로벌 의식'과 연합에 있어서 '각성'이 필요한가? 노동자들이 자신의 상황이 세계 경제 구조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말이다.)

구해근 :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 출신이다. 한국 문화예술계가 현실에 관심을 가진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까지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중산계급의 상황은 대부분 그들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됐고 그것은 다음 세대에 대한 기대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사적이고 보수적인 심리는 1990년대의 산업 변화와 구조조정 때문이다.

1980년대 전에 흥했던 노동자운동은 정의감과 분노의 단결에 기초했으나 이는 노동자계급의식과 조직이 확립되기 전에 해체됐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간절하게 상류층이 되고자 하는 중산층의 의식이었다. 노동자계급의 일부는 부유한 중산층이 되기도 했다. 과거 노동자들은 바깥 세계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부인하는 것에 분노했다.

그러나 소수의 노동자가 상위의 중산층이 된 후에는 달라졌다. 중산층이 된 이들의 욕망은 현 상황과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것 역시 노동자계급운동의 요구와 노선이 상대적으로 '단순'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중산층이 된 사람들의 이익과 요구는 분화되고,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아까 '글로벌 의식'을 얘기했다. 노동자운동에 글로벌 의식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모습은 여전히 유럽과 미국의 운동에서 목소리를 듣고 지지를 얻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서구 진보 세력에게 인정받는 게 아시아 지역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같다. [강조는 역자]

▲ LG트윈타워 1층 로비에서 농성 중인 청소노동자. ⓒ정치하는 엄마들

펑파이 : 현 상황에 대한 민중들의 '반발'(원문 反弹)에는 일종의 '국가주의'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불안정한 경제에서 갇힌 사람들은 국가를 글로벌 경제가 가져온 위기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줄 보호막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예컨대 신흥 자본이나 전통적 재벌 자본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을 때 노동자들은 국가가 개입해 문제를 해결할 거라 믿는다.

이는 곧 다가올 미래의 문제에도 해당한다. 자동화의 보급에 따라서 특히나 적극적으로 보유한 신기술을 확대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육체노동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이른바 '포스트 노동'의 시대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구해근 : 국가주의 경향이 커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국가의 함의는 과거 몇 년 동안 크게 달라졌다. 국가가 스스로 개입하는 것인지, 아니면 외부 요인이 국가가 개입하게 하는 건지 따져봐야 한다.

'노동이 사라지느냐'는 사회학에서도 뜨거운 토론 주제다. 나는 노동이 그 자체로 소멸하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노동이 사라진다'는 말 속의 '노동'은 주로 육체노동을 가리키는데 우선 이는 육체노동을 도태된 것, 저급한 것이라고 보는 인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일'이 아니거나 실제로 생산이 없는 활동이라 하더라도 직업이 되고 높은 보수를 받기도 한다.

앞으로의 노동운동의 방향을 이야기하자면, 지금은 노동자 조직과 시민단체로 나누어 이야기해야 한다. 후자는 노동보다 젠더나 환경 의제에 더 관심이 많다. 단시간 내에 통합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과거 노동자들의 격렬한 항쟁 전통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노동운동은 앞서 언급했던 긱 노동자(gig worker)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 투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 새로운 노동운동은 새로운 노동조합 모델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장기간의 파업과 단식 투쟁, 강력한 투쟁성, 그리고 여성들이 주도한다는 등의 전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일찍이 노동자운동의 발전과 매우 흡사하다.

이런 변화들은 우리를 고무시킨다. 좀 더 상세한 자료를 찾고 싶지만, 나는 나이가 이미 많이 들어서 현장을 따라다니며 이런 변화를 따라가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 이 부분은 미래의 학자들이 풀어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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