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태극기 집회'가 다시 열릴 모양새다. 코로나19 2차 대유행의 시발점이 된 작년 8.15집회 이후 잠잠했던 보수단체는 조금씩 몸을 풀고 있다. 삼일절에 산발적 집회를 진행한 이들은 '거대밀집' 모색하고 있다. 태극기 집회를 오래 취재했던 이승우 <셜록> 교육생이 '태극기 아이돌을 아십니까' 기획을 준비했다. 태극기 집회에서 노래하는 이들은 누구고, 어떻게 ‘태극기 부대’가 됐는지 알아보는 기획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되지 않았으니, 하야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결국 전광훈 목사 등이 이끈 작년 '8.15 광화문 집회'는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고, 많은 시민이 우려한 결과만 쏟아냈다.
코로나19 2차 대유행, 정지된 시민의 일상, 사망자 증가, 공공의료 손실... 그리고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에게 애국가수로 불리는 '태극기 아이돌'도 마이크를 놓아야만 했다.
"문재인 하야!"를 그토록 목 놓아 외쳤건만, 정작 무대를 잃은 건 정지만 그 자신이다. 집회 전날, 그러니까 2020년 8월 14일 정지만에게 연락이 왔다.
2020년 광복절 아침, 정지만의 목소리가 서울 광화문 일대로 퍼져 나갔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비판, 비난, 욕설이 심할수록 태극기와 성조기는 격하게 춤을 췄다. 무대에 선 정지만은 춤을 추며 노래를 시작했다.
트로트 가수 진성이 부른 <안동역에서>를 개사한 이 곡을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은 <문재인은 간첩이더라>라고 부른다. 공식 집회 뒤, 참가자들은 행진을 시작했다. 정지만은 행진 대열 한가운데서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
정지만은 다시 거친 말을 쏟아냈지만, 방송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통령을 향한 테러 예고치고 다소 허무한 마무리였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에게 정지만은 4년 차 '애국가수'로 통한다. 음반을 내거나, 작곡을 하거나, 가수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 적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불린다.
'애국가수'의 기준 같은 건 없다. 진보 성향 집회 등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이 '민중가수'로 불리듯이, 태극기 부대는 자신들의 집회 무대에 서는 이들을 '애국가수'라 부른다. 일부는 이들을 '태극기 아이돌'이라 부른다.
정지만의 애국가수 데뷔는 우연처럼 벌어졌다.
2017년 7월, 정지만은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탄핵반대 집회'에 나갔다. 참가만으로 부족했다. 좀 더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연사로 나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옹호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거친 말을 쏟아냈다.
그렇게 집회 연사로 서길 몇 번, 태극기 집회 참석자들이 손뼉을 치며 다른 걸 요구했다.
노래를 청하는 요구와 박수는 점점 커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곡 뽑아 볼까...' 정지만은 자신 있었다. 17년 전, 나이트클럽 웨이터 동료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른 경력(?)도 있지 않은가. 정지만은 김수철의 <젊은 그대>를 불렀다. 노래를 마치자 태극기 부대 선배가 제안했다.
말 그대로 길거리 캐스팅. 이날 공연은 '애국가수 정지만'의 데뷔무대가 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정지만은 본격적으로 애국가수의 길을 가기로 작정했다. 그는 대중가요 몇 곡을 개사하고 제목도 바꿔 불렀다.
가수 진성이 부른 <안동역에서>는 그의 손과 목소리를 거쳐 두 가지 버전의 노래, '문재인은 간첩이더라' '소녀상을 철거하라'가 되었고, 김구윤이 부른 <나무꾼>은 '문재인을 사형하라!'가 되었다.
삶에 대한 통찰이나 문학적인 은유와는 거리가 먼, 문재인 대통령과 지지자를 향한 욕설, 비난이 핵심인 노래다.
몇 번 노래를 부르자, 태극기 집회 주최 측에서 정지만을 자주 섭외했다. 서울역, 광화문 교보문고 앞, 덕수궁 대한문 앞... 태극기와 성조기가 휘날리는 현장에선 정지만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무대 위에서 정지만은 행복하지만, 그 시간은 짧고 환호와 박수 없이 살아야 하는 일상은 길다. 무대 밖 정지만의 일상은 무료하고 쓸쓸해 보였다. 그를 취재하면서 알고 지낸 지 약 2개월 정도 흘렀을까. 그는 기자를 "아우"라 부르며 속내를 조금씩 이야기했다.
1975년생 정지만. 젊은 축에 속하는 그는 어떻게 '태극기 아이돌'이 됐을까. 왜 무대에서 거친 욕설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걸까.
정지만 인생에서 태극기 집회 무대처럼 박수와 환호 받을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사건사고, 빈곤 등 우여곡절의 시간이 정지만에겐 익숙했다.
정지만의 아버지는 그가 세 살 때 사망했다. 가난한 집의 둘째 아들인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오토바이를 타며 돈을 벌었다. 1991년에는 서울 휘경동 한국외국어대학교 인근에서 가스배달을 하며 고교를 다녔다.
날마다 돈 걱정을 해야 하는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유일한 낙은 오토바이 타기. 바람을 가르며 속도를 느낄 때 느껴지는 자유는 그에게 돈 걱정을 잊게 해줬다. 성인이 된 후, 정지만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성과에 따라 자기 몫이 떨어지는 나이트클럽 웨이터가 그에겐 그런 일로 보였다.
손님들의 기분을 맞추려 정지만은 최선을 다했다. 비 오면 비 조심하라고, 눈 오면 눈 조심하라고 매일 1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연락했다. 시간 되면 놀러 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밤낮으로 관리하는 손님들을 진심으로 대했다.
노력은 실적과 승진으로 이어졌다. 정지만은 3년 만에 수석 웨이터를 거쳐 영업부장이 되었다. 내 집 마련과 오토바이 가게 오픈이라는 목표도 달성했다. 행복은 길지 않았다.
2004년 2월, 오토바이를 타다 트럭과 충돌했다. 두 달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겨우 깨어났다. 왼쪽 팔과 다리의 신경이 손상되어 혼자 힘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정지만은 하루 8시간, 500일 동안 재활훈련을 받았다. 고통스러운 재활 끝에, 불완전하게라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엔 또 다른 사건이 전속력으로 정지만을 덮쳤다. 2005년 9월, 친형이 행위 무능력자가 된 정지만의 처지를 이용해 모아둔 재산을 가로챘다. 결국, 잠시 가난을 잊게 한 오토바이가 가난의 현장에 정지만을 오래 묶은 셈이다.
정지만은 서울역에서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집에서, 병원에서 순탄치 않았던 그의 일상은 거리에선 더 고단해졌다. 정지만은 그 시절을 '광야생활'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가 불편해진 그에게 시비 거는 사람이 많았다. 정지만은 화를 참지 못하고 한 사람을 폭행했다. 형량은 벌금 50만 원. 돈이 없어 열흘간 노역을 다녀왔다.
노숙 생활 2년 차이던 2008년 여름, 정지만은 서울역 대합실에 설치된 TV에서 장애를 가진 행복 전도사 닉 부이치치의 강연을 접했다.
문득, 닉 부이치치처럼 되고 싶었다. 가난, 장애와 싸워온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트클럽 수석 웨이터 시절, 100명 넘는 직원들 앞에서 업무설명을 한 경험도 있지 않은가.
정지만은 2010년 서울 강남에 있는 승무원 학원에 다니며 강연 관련 자격증을 땄다. 거리, 고시원, 차에서 생활하는 ‘광야생활‘도 청산했다. 정지만은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군부대, 장애인 단체 등에서 강연을 했다.
정지만은 2014년 4월, 동기부여 강의를 하던 중 세월호 사고 소식을 들었다. “나라에 일이 생겼으니” 마음을 보태고 싶어 진도로 향했다. 현장에서 봉사하며 선박 회사와 선장을 규탄하는 시위에 참석해 목소리도 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월호 사고 책임이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에 있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뉴스에 나오기 시작했다. 감히 박근혜 대통령을 욕하다니... 정지만에겐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분노의 화살은 세월호 참사로 자식은 잃은 김영오에게 향했다. 정지만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거친 글을 올렸다.
얼마 후,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이 정지만을 비판했다.
이 시장의 언급으로 정지만은 많은 사람의 이목을 받았다. 비난과 비판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많은 사람에게 지적을 당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나는 맞는 말을 했지만, 뭐 욱하는 감정을 조절 못 했다, 인도적으로 김영오씨에게 미안했다"고 회상했다. 정지만은 해명인지, 사과인지 모호한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정지만의 예정된 강연은 취소됐고, 섭외 요청은 끊겼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대리운전, 택배 상하차, 식당 주방 설거지, 건설현장 노동 등을 했다. 이런 경제활동은 지금도 하고 있다. 2020년 8월, 정지만은 자기 유튜브 방송에서 말했다.
그의 호소는 이렇게 이어졌다.
명색이 애국가수, 일명 '태극기 아이돌'인데 무대로 버는 돈은 없는 걸까? 정지만은 왜 유튜브에서 도움을 청했을까.
거리 생활을 벗어난 정지만은 요즘 원룸에서 산다. 가난했던 유년, 가스배달과 오토바이, 교통사고와 장애, 가족의 배신과 노숙생활, 태극기 집회에서의 거친 말과 환호... 돌고 돌아 다시 인터넷에서 도움을 청하는 곤궁한 삶.
'태극기 아이돌'의 과거와 현재는 굴곡지다 못해 현기증 나는 급변침의 연속이다. 정지만은 작년 8월 17일 오른쪽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유튜브 방송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정지만은 금전적 어려움을 토로한 후부터 유튜브 영상을 더 자주 올렸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아니면 더 관심을 받고 싶어서인지 쓸쓸함과 분노를 표출하는 빈도도 늘었다. 정지만 고백이 담긴 작년 8월 17일 유튜브 영상 조회수는 2021년 3월 기준 '44'다.
정지만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좋아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미워하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근거 같은 건 찾기 어렵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할 뿐이다.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멈춘 요즘, 정지만은 서울 명동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에서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노래를 한다. 물론 거친 말과 욕설이 들어간 노래다.
"태극기 집회 동지" 자녀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기도 했다. 마스크 쓰고 노래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음이탈이 났다. 가장 자신 있는 '18번' 김동률의 <감사>여서 더 부끄러웠다.
자신의 말을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실천했다면, 정지만은 지금보다 덜 외롭고 쓸쓸했을까?
오른쪽 가슴에 태극기를 단 정지만은 오늘도 혼자 사는 집에서 유튜브 방송을 한다. 근래 올린 영상 조회수는 대부분 100을 넘지 못한다. 태극기 아이돌이란 이름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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