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궁금하다는 초등학생 아들을 위해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다시 봤다. 알다시피 이 영화는 아들 넷 중 셋을 전장에서 잃은 부모를 위해 막내아들 제임스 라이언을 구하라는 명령에 따라 존 밀러 대위와 휘하 부대원들이 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을 그린 할리우드 명작이다.
왜 굳이 라이언 일병을 구해야 하는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현실감 넘치는 전투 장면이 워낙 인상적이라 흔히들 잊고 지나가지만, 이 영화의 스토리를 끌고 가는 갈등의 힘은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은 질문에서 나온다.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고 있는데 왜 굳이 라이언을 구해야 하는가? 그 부모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하지만 부대원들은 끊임없이 의문을 표한다. 병사 한 명 구하자고 우리들 여럿의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이 위험한 임무를 계속 수행해야 하는가? 부대원들을 이끄는 밀러 대위 역시 당혹스럽긴 마찬가지다. 전투에서 부하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그들의 죽음 하나하나가 10명, 100명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라고 합리화해 왔지만, 이번엔 한 명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다. 이 일이 과연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질까?
라이언을 구하러 가는 길에 그들은 적군의 기관총 포대를 발견한다. 주어진 임무와 상관없지만, 아군에게 큰 피해를 줄 것이 분명하기에 그냥 지나칠 수도 없다. 밀러 대위는 공격을 결정하고 상대를 섬멸하지만, 그 와중에 또 부하 병사들이 목숨을 잃는다. 우여곡절 끝에 라이언을 만나 그를 본진으로, 고향으로 데려가려 하지만, 라이언은 한사코 그 명령을 거부한다. 많은 동료들의 희생 속에 전략적 요충지를 지켜왔는데, 혼자만 살겠다고 전장을 떠날 수는 없다며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결국 라이언을 구하기 위해, 그러나 실은 그 요충지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현장에 남아 전투를 벌이고 작전에 성공하며 라이언도 살아남지만, 밀러를 비롯한 부대원들 다수는 목숨을 잃고 만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복직 투쟁을 하고 있다. 어용노조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군사정권의 모진 고문을 받으며 직장에서 쫓겨났던 노동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자신의 원래 직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싸우고 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400㎞가 넘는 길을 '희망 뚜벅이' 행진을 했고, 그와 뜻을 같이한 인사들은 청와대 앞 농성과 단식 투쟁을 이어갔다. 부산시의회가 복직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복직을 권고했다. 김진숙 본인도 국가인권위원장, 여당 대표, 총리, 국회의장과 면담을 갖고 복직의 정당성을 말했다.
김진숙 복직 투쟁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라이언 단 한 명을 구하려는 영화를 보고 김진숙의 복직 투쟁을 지켜보며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 싸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민주화 운동, 노동 운동의 투사들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복직을 갈망하는가? 진보 언론을 필두로 다수의 매체들이 보기 드물게도 앞 다퉈 그의 투쟁을 조명한 이유는 무엇인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아들 셋을 조국에 바친 어머니의 슬픔을 달래는 방식으로 국가의 존재 이유를 알렸듯, 김진숙은 민주노조 운동의 상징이며 그의 복직은 실추된 민주노조 운동의 명예와 자존을 회복하는 일이기에 그랬을 수 있다. 무자비한 자본의 논리, 악덕 업주의 야비한 해고 행태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 촛불로 들어선 이 정부의 위선과 반노동자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효과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정부의 위선과 무능이라면 진즉에 알아챘어야 했다. 과거 집권 시절 그들은 지난 정부만큼이나 노동자 권익에 인색했다. 그런 정당과 대표가 갑자기 그것도 너무나 쉽게 집권에 성공했는데, 특별한 압력도 없는 조건에서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어느 날 느닷없이 인천공항에 나타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선언했을 때도, 이해당사자들과는 별다른 상의도 없이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한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 말들을 다 곧이곧대로 믿었다면, 그건 우리 안에 잠재한 정치적 순진함의 표출이거나 취임 초마다 나타나는 초집중화된 대통령 권력 효과의 산물일 뿐이다.
김진숙 구하기가 김진숙만을 위한 것이라 아니라 잦아든 노동운동에 희망을 불어넣는 일이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잠깐의 관심, 환호, 안도는 지난 30여년동안 노동운동이 밟아온 쇠락의 길을 애써 지켜보지 않게 해주는 또 다른 가림막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번 투쟁 또한 과거 노동운동의 여러 투쟁들처럼 거창한 목표와 과격한 행동 속에 소수만 선도하고 다수는 소외되는, 그래서 실패를 예정해 놓은 싸움일 수 있다.
그렇다면 기업의 시장 논리, 정부와 언론의 집단 이기주의 논리에 맞서, 민주노조라는 조직의 힘을 키우지 못하고, 그 부정과 불의에 조직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며, 조직과 조직의 연대를 넘어 더 많은 시민들의 지지와 지원을 얻지 못한 실패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김진숙은 복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진숙만큼 노동운동의 세례를 받지 못한 많은 해고 노동자들이 김진숙과 같은 투쟁을 통해 직장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그들에게는 미래의 대통령을 만날 기회도, 함께 싸워주고 단식해줄 동지도, 그의 요구와 투쟁을 알리며 대의로서 정당화해줄 언론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직장을 잃고 다시 직장을 찾아 헤맨다.
소수파에게는 연대와 연합의 정치가 필요하다
지금 노동자들은 소수파이다. 노조 조직률을 봐도 그렇고, 정당 의석 분포를 봐도 그렇고, 사회적 인식을 살펴보면 더더욱 그렇다. 상사의 가혹한 지시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언제 잘릴지 모를 지위에 불안해하며, 그래도 자신과 가족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일터로 가고 일터를 찾는 그들은 소수파이다. 민주주의에서 소수파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연대 내지 연합의 정치를 통해 다수의 지지를 얻는 길밖에 없다. 소수파에게 급진적 투쟁성이나 이념적 선명성은 패배를 자초하는 막다른 골목일 뿐이다.
먼저 일터나 동네에서부터 직장 동료들, 노조 조합원들, 이웃 주민들의 지지와 후원을 구하면 좋겠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동네 육아 모임, 회식 자리, 동호회 모임, 학교나 직장 체육대회가 서로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서명도 받고 시위도 벌이고 큰 집회도 참가하고 지역구 의원을 찾아가 민원을 넣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다만 가능한 한 꾸준히 했으면 좋겠고, 행사를 거듭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 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노력하면 좋겠다.
보도자료 작성이나 다른 단체와의 협의, 사측과의 협상을 위해 증거 자료를 수립하고 논리를 개발하는 일도 중요하다.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만 내세우거나 판에 박힌 선악 구도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나 호의가 아닌 반감과 거부감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거친 구호를 비롯해 자본의 전횡, 사측과 정권의 탄압, 신자유주의 세계화도 그 잠재적 지지자들에게 공포와 불안, 소외만 안겨줄 수 있으니 삼가거나 주의해서 말해야 한다. 권력의 구심인 청와대와 광화문, 국회 앞으로 가야 할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단단한 지지와 후원을 얻지 못한다면 모래성 같은 공허함만 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모든 일에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꽤나 많은 비용이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대신해 소송을 준비하고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그 판결의 집행을 기다리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 물론 이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가 따른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정권마다 반복했던 촛불 시위의 찬란한 허망함을 돌아본다면, 이제는 과거와 다른 길, 다른 방법을 찾는 편이 좋겠다. 이것이 지난 노동운동, 촛불 시위, 그리고 현 정부의 경험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밀러 대위와 부대원들은 라이언 일병을 구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들이 참여한 전투는 라이언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더 많은 동료 병사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이 전투, 이 전쟁에서 승리해 더 많은 시민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김진숙과 그의 동료들도 이런 싸움을 위해 나섰겠지만, 그들이 선택한 말과 행동이 그들이 원하는 싸움을 이끄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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