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미안하고 또 미안해요. 내가 가습기살균제인 이마트PB 상품 '가습기이플러스'를 사지만 않았다면 지금도 당신이 좋아하던 찬양을 마음껏 부르면서 즐겁게 살고 있었을 텐데. 13년의 투병 생활, 21번의 입원 없이 평범한 생활을 하고 함께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마지막 입원 전 '너무 고마워'라던 당신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아직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여보, 정말 미안해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고(故) 박영숙 씨의 남편 김태종 씨)
등록된 피해자만 1077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 '가습기메이트' 등을 제조·판매한 기업의 전직 대표와 임직원의 무죄 판결 이후 후폭풍이 이어지고 있다.
가습기살균제참사피해자총연합(피해자연합)이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원 판결을 규탄하며 해당 기업 임직원들의 형사처벌을 촉구했다. 피해자들이 연 두 번째 기자회견이다.
피해자연합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재판 과정에서 가해 기업이 원료에 독성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음에도 무죄 판결을 내린 법원의 판단을 납득할 수 없다"며 "너무나 참담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라고 했다.
이들은 "가습기 안 세균 번식을 막아주고 산림욕 효과가 있다는 업체들의 화려한 광고와 '품질경영 및 공산품 안전관리법에 의한 품질표시'라는 문구를 믿고 구입했다"며 "갓 태어난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호흡기 약한 가족을 위해 가습기 살균제를 구입해 사용했다"고 했다.
판결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이들은 "판결문에서 언급한 11명의 피해자 중 9명이 영유아이고 그중 2명은 사망했다"며 "태어나자마자 폐 손상을 얻고 아팠던 아이들, 그 때문에 죽은 아이들, 제품이 원인이 아니라면 무엇이 원인이라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죄 판결의 핵심 근거가 된 인과관계 증명에서 동물 실험은 절대적 필수조건이 아니"라며 "피해자가 존재하고 이 피해자들은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이 만들어 판 가습기메이트 제품만을 단독 사용했다. 피해자들의 몸이 명백한 증거"라고 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피해자들..."내 몸이 증거"
산소공급기를 차고 기자회견에 참석한 피해자 조모 씨는 "저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가습기 살균제를 2년 넘게 사용하고 지금은 폐가 손상되고 천식 등을 앓고 있다. 호흡곤란 등으로 병원을 다니기 시작할 때만 해도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일 거라 상상도 못했다"면서 "원료에 독성이 있다는 건 학계에서 이미 오래전에 인정한 사실인데 재판부에서는 인과관계의 입증, 과학적인 결과에 한정해 가해 기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비판했다.
조 씨는 "가습기 살균제로 하루 24시간 내내 산소 줄을 달고 생활해야 한다. 산소 통을 들고 다니느라 허리 디스크까지 얻었다"면서 "폐가 손상되고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주변에서는 내 건강 먼저 돌보라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기업들은 책임이 없다고 한다. 너무 억울하다"라고 했다.
가습기메이트 사용 후 자신은 물론 남편과 아이 모두 폐 질환을 얻은 피해자 손모 씨도 "원료에 독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가해 기업,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한 정부 모두 원망스럽다"면서 "2016년 처음 조사에서도 저희 가족이 얻은 병과 가습기메이트와 인과관계가 없다고 했다. 바보같이 그때만 해도 그걸 믿었다. 겨우 다시 죄를 물을 기회가 생겼는데 법원은 또 다시 저희 피해자들을 외면했다"고 했다.
법원 판단에 전문가들도 비판..."법원이 실험 결과 왜곡" 주장도
지난 1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가습기 살균제 '가습기메이트' 등을 제조·판매한 혐의(업무상 과실치사 등)로 재판에 넘겨진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등 13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SK케미칼이 사용한 원료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과 피해자들의 폐 질환·천식과의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반면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를 원료로 사용해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옥시레킷벤키저·롯데마트·홈플러스의 경우 지난 2018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재판부의 무죄 판단에 학계에서도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전문가들도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판결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하면서 이유로 적시한 "전문가들이 실험 결과를 가지고 CMIT·MIT 성분과 폐 질환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하지 못했다"는 부분에 대해서 "재판부가 과학적 방법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과학자들은 항상 예외적인 상황이나 변수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입증된다'는 식의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는데 재판부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재판부가 또 다른 중요한 근거로 제시한 동물실험에 대해서도 "동물실험은 인체에 실험할 수 없는 경우에 활용하는 대안이며 동물실험의 결과와 사람에게 나타나는 효과가 다른 경우는 무수히 많다"고 지적했다.
특히 재판부가 동물실험 결과를 연구자의 취지와 다르게 해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해당 동물실험의 연구책임자인 이규홍 안전성평가연구소 박사는 같은 날(19일) 입장문을 통해 "사람의 천식과 실험 쥐에게서 나타난 천식 유사 증상이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는 취지였지 동물실험으로 사람의 천식을 전혀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검찰도 1심 판결에 불복해 전날(18일) 항소장을 제출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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