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올해는요. 제 허락 없이 늦지 마세요."
LG트윈타워 9년차 청소노동자 김정순 씨는 2021년 새해 첫날을 자신이 일하던 건물 로비에서 맞았다. 집단해고 철회 요구 농성 때문이었다. 농성을 하며 겪는 괴로움 중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럴 때 스마트폰은 김 씨가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새해 아침에도 이제 막 13살 손자가 김 씨에게 인사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날 오후 3시경 LG트윈타워 건물 관리 기업인 에스앤아이코퍼레이션(에스앤아이)이 농성 중인 청소노동자의 전기 공급과 난방을 끊었다. 저녁때는 식사 반입도 막았다. 실랑이를 벌여 청소노동자의 가족들이 보내온 초코파이와 우유가 겨우 안으로 들어왔다. 에스앤아이 직원들이 그걸 집어 들더니 전속력으로 달려 문밖에 버렸다.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직원은 "먹을 거면 나가서 먹어라"고 조롱했다.
김 씨는 "참담한 심정"을 안고 그곳에 있었다. 가족들과 새해 떡국 한 그릇 나누지 못한 것도 마음이 아픈데 찬바닥에서 먹는 밥까지 막는 LG에 화가 났다. 스마트폰이 꺼지면 가족과 연락할 수 없을 거라는 점도 걱정됐다. 난방도 들어오지 않는 LG트윈타워 건물 로비에서 쓰린 마음을 안고 김 씨는 새해 첫날밤을 보냈다. 이후 LG그룹 측의 행동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일었다. 다음날 식사와 전기, 난방이 다시 공급됐다.
끼니는 해결됐지만 가족을 보고 싶은 김 씨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바닥에 있는 히터로 난방을 한다고는 하지만 5층 높이 천장이 있는 로비 위쪽의 찬 공기는 계속 아래로 내려온다. 문 사이로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기도 한다. 로비는 이불을 덮지 않으면 무릎이 시릴 정도로 춥다. 샤워할 곳이 없어 제대로 씻지도 못한다.
하지만 김 씨는 농성장을 떠날 마음이 없다. "돈을 벌어 먹고 살아야 하니까. 사람다운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싶으니까"다. 지난 7일 LG트윈타워 로비 농성장에서 김 씨를 만나 한겨울 추위에도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서 농성을 계속하는 속사정을 들었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 저임금도, 갑질도 참아가며 일했는데
김 씨는 청소 일을 하기 전 섬유공장에서 일했다. 스웨터의 목 부분을 실을 꿰어 연결하는 일이었다. 정확한 위치에 실을 꿰어야 하는 탓에 눈이 밝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이가 들며 김 씨의 눈은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50대 중반이 되어갈 무렵 '이 일을 더 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일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었다. 김 씨가 섬유 일을 그만두기 2년 전인 2009년. 김 씨의 남편이 과로로 쓰러졌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갔다. 뇌경색이 왔다고 했다. 이후 남편은 몸 오른편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됐다. 그때부터 김 씨는 혼자 돈을 벌어 생계를 꾸리게 됐다.
김 씨는 2011년부터 LG트윈타워에서 청소 일을 시작했다. 김 씨는 그때 "더 나이가 들면 청소 일도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LG는 대기업이니 다른 곳보다는 그래도 좀 낫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안고 야간조에서 일을 시작했다.
김 씨가 LG그룹의 직접고용 노동자는 아니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두 고모 구미정, 구훤미 씨가 50%씩 지분을 나눠 소유한 지수아이앤씨(지수)라는 용역업체 소속이었다. 지수와 LG 사이에는 (주)LG가 100% 지분을 출자해 만든 자회사 에스앤아이가 하나 더 끼어있었다. 게다가 김 씨는 매해 계약서를 새로 쓰고 일하는 계약직이었다.
그 탓이었을까. '대기업이니 낫지 않을까' 하는 김 씨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임금은 최저임금에 '근무시간 꺾기'도 있었다. 평일 휴게시간을 30분 더 잡아 일주일에 2.5시간의 근무시간을 깎고 격주에 한 번씩 토요근무를 시키는 방식이었다. 김 씨는 그게 근무시간 꺾기인지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다.
게다가 김 씨가 일하는 야간조 감독 A씨는 청소노동자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었다. '주머니에 손 넣지 마라. 웃지 마라. 모여 있지 마라' 같은 말은 예사였다. 사무실 냉장고에서 간식을 빼먹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니 먹지 마라'고 해서 그 뒤로 간식을 못 먹게 된 일도 있었다.
돈 문제도 있었다. LG트윈타워 청소 감독 밑에는 조장이 있다. 이들은 조장수당을 받는다. A씨는 조장들이 받은 수당을 현금으로 다시 걷어갔다. 당장 현금이 없다고 하면 '빌려서라도 달라'고 했다. 그 돈을 어디에 쓰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재계약이 다가올 때면 더 괴로웠다. 매해 11월이면 A씨는 청소노동자들에게 '당신 내년에 계약이 될지 안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 무렵이면 김 씨는 한층 주눅이 든 채 지낼 수밖에 없었다.
억울한 일은 많았지만 참고 일했다. 그것도 열심히 했다. 생계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가정보다 직장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내 집보다도 더 깨끗하게 담당 구역을 청소했다. 지수에서 온 팀장이 "호텔보다 깨끗하다"며 칭찬한 적도 있었다.
2019년 10월 LG트윈타워에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뒤 변화가 생겼다. '건강하면 만 70세까지도 일할 수 있다'던 지수가 '만 65세 이상 노동자는 내보내겠다'는 방침을 세웠다는 소문이 노동조합 결성의 계기였다. 노동조합을 만든 뒤 김 씨와 동료들은 그간 참아온 속상했던 일들을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근무시간 꺾기'와 '관리자 갑질'은 그제야 멈췄다.
이제 한숨 돌리고 갑질 없는 곳에서 일하나 싶었는데 에스앤아이가 청소노동자 '집단해고'를 단행했다. 올해 1월 에스앤아이는 '청소 품질에 문제가 있다'며 용역업체를 지수에서 백상기업으로 바꿨다. 백상기업은 A씨를 제외한 LG트윈타워 청소 관리자와 임원층 청소노동자 등 10여 명을 고용승계했다. 나머지 청소노동자의 고용승계는 거부했다.
김 씨는 에스앤아이와 백상기업의 결정을 바꾸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LG트윈타워 로비 농성을 시작했다.
한국사회에서 '사람답게 일하고 싶다'는 바람은 과한 것일까
LG트윈타워에서 외벌이 노동자는 김 씨만이 아니다. 청소노동자 정경숙 씨(가명)도 "16년 전 남편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황지수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조직차장은 '남편이 쓰러졌다는 분들이 있더라'는 기자의 말에 "그런 분들이 꽤 많다"고 말했다. 꼭 외벌이가 아니더라도 집단해고를 당한 청소노동자 중 생계형 노동자가 많다는 건 노조측이 농성 초기부터 이야기하던 바다.
억울한 일을 참아가며 일한 것도 김 씨만이 아니다. 청소노동자 최미경 씨(가명)는 "노조가 생기기 전 3개월에 한 번씩 쉴 새 없이 바닥을 닦으며 왁스청소를 했는데 지수는 밥도 안 주고 빵과 우유만 던져줬다"며 "그때는 밥은 주고 일 시켜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도 못했다"고 했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 갑질을 참아가며 일한 김 씨와 같은 이들의 삶을 돌아봐준 건 지금도 청소노동자들이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구 회장이 아니었다. 2019년에만 지수에서 60억 원의 배당금을 받아간 구 회장의 두 고모도 아니었다. 스스로 만든 노동조합이었다.
청소노동자들은 이곳에서 쫓겨나면 또다시 갑질이 횡행한 일터에서 일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 김 씨는 "지수가 자기들이 말한 대로 자르지는 않았지만 다른 곳에 배치한 사람들에 대한 소문을 가끔 듣는다"며 "관리자 갑질이 심해 얼마 못가 사람들이 그만 둔 곳도 있다더라"고 말했다.
요컨대,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에게 고용승계가 '돈을 벌어 먹고 살아야 하니까'라는 마음을 담은 바람이라면, 노동조합이 있는 지금의 일터에서 일하는 건 '사람다운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싶으니까'라는 마음을 담은 바람이다.
'앞으로도 계속 사람다운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싶다'는 고령 여성 노동자들의 바람은 과한 것일까. LG트윈타워 로비에서 8일로 24일째 농성을 지속하고 있는 청소노동자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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