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봉사로 일하던 중 해고된 여공을 돕다 자신도 해고된 일. 점심을 굶는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차비가 없어 걸어서 퇴근한 일.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고 노동자 실태를 조사해 노동청에 개선을 요구한 일.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한 일.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인근에서 몸에 불을 붙이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쳤던 23살 청년 재단사 전태일의 삶은 연대와 저항으로 가득하다.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노동관계법 밖에서 일하며 '법 준수'와 같은 당연한 일을 가슴속에 바람으로 품고 연대와 저항으로 자신의 일터를 바꾸려는 20대 청년 노동자가 있다.
<프레시안>이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그런 20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첫 번째 주인공은 주 60시간 일하며 월 100만 원이 안 되는 돈을 받는 패션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다.
옷과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이하은 씨(가명, 20대 초반)는 대학 졸업 전 하고 싶은 일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패션이나 디자인업계에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패션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어시스턴트)가 눈에 들어왔다. 어시스턴트는 연예인의 의상 등을 담당하는 스타일리스트에게 고용돼 업무를 보조하는 직업이다. 1년 정도 일을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휴학했다.
일은 잘 맞았다. 어시스턴트의 주 업무 중 하나는 스타일리스트가 정한 의상 컨셉에 따라 디자이너 브랜드를 돌며 옷을 빌리는 일이다. 이 씨는 자신이 담당한 가수 팀의 옷을 구하기 위해 하루에만 서울 전역의 10곳이 넘는 디자이너 브랜드를 돈 뒤 50~60벌의 옷을 들고 나른 날도 있었다. 여름이었고 몸은 힘들었지만 '내가 이만큼 열심히 일해서 옷을 구했다'는 생각에 마음은 뿌듯했다.
자신이 구해 조합한 옷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일도 좋았다. 이 씨가 담당한 가수의 촬영한 뮤직비디오에 '옷 잘 입혔다', '이번에 컨셉 잘 잡았다'와 같은 댓글이 달리면 기뻤다. 그림 솜씨가 있었던 덕에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옷이 만들어진 적도 있었다. 이 씨는 이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문제는 월급이었다. 이 씨가 한 달에 하루 쉬고 일해 받은 돈은 40만 원이었다. 몰랐던 건 아니었다. 알고 있었기에 여러 디자이너 브랜드를 돌 때면 '환승의 달인'이 돼 교통비를 아꼈다. 일하는 동안 외식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래도 40만 원으로 한 달 살기는 불가능했다.
지금 이 씨는 불가피한 개인 사정으로 일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꿈을 놓은 건 아니다. 이 씨는 다시 어시스턴트 일을 할 생각이다.
주 60시간 일하고 월 40만 원 받는 어시스턴트의 삶
어시스턴트들에게 이 씨 사례는 특수하지 않다. 2020년 청년유니온이 어시스턴트 250여 명을 대상으로 수행한 온라인 실태조사를 보면, 월 평균 임금은 97만2400원이다. 이 조사에는 긴 경력을 쌓은 어시스턴트가 포함돼 있다. 이 씨처럼 처음 일을 시작하는 어시스턴트는 40만 원가량을 받는다.
월급이 턱없이 낮은데도 식비, 교통비 등 일을 하다 보면 필수적으로 드는 비용에 대한 수당은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청년유니온 실태조사에서 응답자의 48.02%는 식비를 받지 못한다고 답했다.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는 시간에 출퇴근을 할 때 택시비를 받지 못한다고 답한 비율도 33.33%로 나타났다.
일하는 시간도 적지 않다. 실태조사에서 어시스턴트들은 하루 평균 11.5시간 정도 일한다고 답했다. 한 달 평균 휴일은 4.78일이었다. 게다가 어시스턴트의 다음 날 일정은 보통 전날 스타일리스트의 지시에 의해 정해진다. 언제 일하고 쉴지를 알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평균 시급을 보면, 어시스턴트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더 잘 드러난다. 청년유니온 실태조사 임금과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어시스턴트 평균 시급을 계산하면 3301원이다. 이 씨가 받은 임금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1358원이다. 이 씨가 태어나기 전인 1995년, 노동부가 고시한 최저시급이 1275원이었다.
막상 어시스턴트의 일은 스타일리스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스타일리스트가 사무실에 나오지 않는 날이면, 옷을 조합하는 건 어시스턴트의 몫이다. 마네킹에 몇 가지 방식으로 조합해 옷을 입히고 사진을 찍어 스타일리스트에게 보내면, 스타일리스트가 그 중 하나를 택하거나 세부 수정 지시를 하는 식이다.
의상대행협찬사나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옷을 빌리는 일과 빌린 옷을 밤 늦게까지 세탁해 돌려주는 것도 어시스턴트의 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어시스턴트가 하는 일이 더 많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씨가 겪기로 스타일리스트와 어시스턴트의 차이는 '청담동에 사무실을 빌릴 수 있느냐 없느냐', '연예인이나 기획사와 인맥이 있느냐 없느냐' 정도다.
그런데도 어떤 스타일리스트는 어시스턴트에게 갑질을 한다. 이건 운에 달렸다. 좋은 스타일리스트와 일하면 그래도 사무실 냉장고에 채워진 음료수 정도는 기대할 수 있다. 나쁜 스타일리스트와 일하면 욕설을 듣거나 강아지 수발을 들어가며 일해야 한다. 청년유니온 실태조사에는 '다림질이 느리다고 다리미를 집어던진 스타일리스트가 있었다'는 답도 있다.
빌린 옷이 손상됐을 때 관리 담당이라는 이유로 손해배상을 하는 경우도 잦다. 청년유니온 실태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5.24%가 옷이 분실되거나 손상돼 손해배상을 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그 중 69.84%가 자비를 썼다. 손해배상 품목 중에는 300만 원 한복, 200만 원 수트, 180만 원 시계 등 고가물품도 눈에 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몇 달치 월급이 순식간에 날아간다.
이제 막 시작된 변화 "40만 원이던 월급이 60만 원이 됐어요"
지난 9월 '청년유니온 패션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지부 준비위원회'가 출범했다.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조건을 바꿔보려 마음먹은 어시스턴트들이 모인 결과였다. 이들은 패션어시지부 준비위원회 출범 전에도 청년유니온 주관 하에 몇 차례 기자회견과 토론회를 열어 일주일에 60시간을 일하고 월 40만 원을 받는 어시스턴트의 노동실태를 알렸다.
이 씨도 패션어시지부 준비위원회에 참여한 어시스턴트 중 한 명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면서 경력을 쌓아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밑바닥 인력을 턱없이 낮은 월급으로 부려먹는 업계의 관행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자회견과 토론회를 연 뒤 스타일리스트들도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 씨는 어시스턴트들로부터 '40만 원이던 월급이 60만 원으로 올랐다', '전에는 안 주던 식대를 받게 됐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전했다. 반면, 청년유니온 사무실로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들다'는 스타일리스트의 항의 전화가 오기도 한다.
속 깊은 이 씨는 "갑질하는 스타일리스트는 비판하지만 우리가 스타일리스트와 싸우자는 건 아니다"라며 "업계를 바꾸자는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이 씨도 방송국이나 기획사를 상대로 일을 따려면 가격 경쟁을 해야 하는 탓에 힘들게 사는 스타일리스트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어시스턴트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실제로 이 씨가 바라는 장기적 목표 중 하나는 방송국이나 기획사를 상대로 스타일리스트와 어시스턴트가 힘을 합쳐 수입 분배 문제를 협의하는 것이다. 방송국이나 기획사가 스타일리스트와 어시스턴트의 고용과 생계를 직접 책임지는 방향으로의 변화도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이 씨는 눈앞의 문제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당장의 목표는 어시스턴트를 근로기준법이 지켜지는 일자리로 만드는 일이다. 예컨대, '근로계약서 작성, 최저임금 지급, 휴일 보장'같은 것들이다.
이와 관련해 청년유니온은 지난 9월 노동청에 6개 스타일리스트 사업장에 대한 근로감독을 신청했다. 노동청도 어시스턴트가 최저임금 같은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아야 할 법적 '근로자'라는 점에는 크게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변화의 실마리가 생기고 있는 셈이다.
이 씨는 앞으로 더 많은 어시스턴트가 패션업계를 '꿈을 가진 사람 누구나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경력을 쌓아나갈 수 있는 곳'으로 바꾸는 일에 함께하기를 바란다. 자신은 물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어시스턴트들이 비인간적인 대우와 불합리한 노동조건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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