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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 후손들, 구례 석주관(石柱關) 칠의사(七義士) 추모 제례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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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 후손들, 구례 석주관(石柱關) 칠의사(七義士) 추모 제례 봉행

의병 도시 구례군은 31일 구례군 토지면에 있는 석주관 칠의사 사당에서 유림과 후손들을 비롯한 기관단체장, 칠의 대대 장병, 학생 등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칠의사를 추모하는 제례를 봉행했다.

▲석주관 칠의사 추모 제례 봉행 모습 ⓒ구례군

이날 제례는 코로나 19 예방을 위해 제례를 집행하는 헌관을 비롯한 집사와 참석자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제례를 봉행하였다.

초헌관인 유시문 구례군의회 의장이 예찬을 살피는 점시, 강신례, 첫 술잔을 헌작하는 초헌례로 시작하여 아헌관이 두 번째 술잔을 헌작하는 아헌례, 종헌례 순으로 봉행 됐다.

▲일곱명의 의사에 대한 추모와 제례를 하기 위해 칠의각으로 들어서는 유림과 후손들 ⓒ구례군

석주관은 경상도 지방에서 전라도 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군사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안음의 황석산성·진안 웅치·운봉 팔랑치와 함께 영남과 호남 사이의 4대 관문의 하나로, 고려 때부터 이곳에 진영이 설치되어 왜군의 침략을 막았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수만 명의 왜군은 호남지방을 목표로 하여 이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러자 구례의 선비 왕득인을 비롯한 구례 출신 7의사가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승병 153명의 지원을 받아 길목을 차단하고 기습과 백병전으로 여러 차례의 전공을 올렸다.

왕득인이 의병을 일으켜 적에게 대항하였으나 결국 숨지고 말았다. 그 후 왕득인(王得仁)의 아들과 각 지역에서 모여든 의병·승병들이 힘을 합쳐 처절한 혈전을 전개하였으나, 역시 대부분 의병을 희생시킨 채 끝나고 말았다.

순조 4년(1804) 나라에서 왕득인을 포함한 7명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이 내려졌고, 1946년에는 뜻있는 지방 유지들이 칠의각과 영모정이 지어 의사들의 공훈을 추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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