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사는 곳에는 각종 잡화점이 많다.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각종 집기류부터 연어 종류, 혹은 빵 굽는 기계 파는 곳 등 다양한 물품이 많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바로 고냉지 배추로 김치를 만들어 파는 곳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당연히 고랭지라고 써야 맞지만 간판에는 그렇지 않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는 모양이다. 한자를 쓰던 사람들은 두음법칙을 잘 알고 있다. 로인이라 하지 않고 노인이라고 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리발소도 이발소라고 하는 것이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북한에서는 문화어라고 해서 김일성 시절부터 두음법칙을 없애버렸다. 그래서 북한에서 나오는 신문을 보면 <로동신문>, ‘로인’, ‘녀자’ 등과 같이 쓰고 있는 것이다.
과거 우리의 부모 세대에는 지금보다 두음법칙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했다. 어떻게 보면 어두에서는 ‘ㄴ’이나 ‘ㄹ’을 발음하지 못하도록 혀가 굳었는지도 모른다. 가까운 예로 필자의 선친께서는 라면을 항상 ‘나면’이라고 하셨고, ‘라디오’를 ‘나지오’라고 발음하셨다. 두음법칙과 구개음화현상을 정확하게 구사하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십 년이 지난 지금에는 두음법칙의 의미가 없어진 것도 사실이다. ‘라디에타’, ‘라디오’, ‘라이언 킹’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두음에서 ‘ㄹ’을 자연스럽게 발음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음법칙은 이제 재고해야 할 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음에서 발음을 하지 못하던 것도 단어 중간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본음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첫음절에 나오는 것만 두음법칙의 적용을 받는 것이지 중간에 들어가 있는 글자는 본음을 그대로 읽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고냉지 배추’가 아니라 ‘고랭지 배추’라고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냉식’이 아니고 ‘수랭식’(水冷式:물로 식히는 것)이라고 써야 하고 그렇게 발음해야만 한다. 찰 冷자를 쓰기 때문이다. 역시 두 번째 음절이라 두음법칙과 관계없이 '랭'으로 발음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한자를 조금 가르친 다음 시험을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저 그들이 알고 있는 글자만 가지고 다 표현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신음’을 한자로 쓰라고 했더니 대부분이 ‘呻音’이라고 썼다. 아마도 아는 것이 ‘소리 음(音)’자 밖에 없었든지, 끙끙대는 소리를 ‘읊조리는 소리’로 착각을 한 모양이다. 끙끙대는 소리는 ‘呻吟’이라고 써야 한다. 아프다고 끙끙대는 것이기에 ‘읊을 吟’자를 써야 한다. 즉 “앓는 소리를 냄, 고통이나 괴로움으로 고생하여 허덕임.”을 뜻하기 때문에 읊을 음(吟)자를 쓰는 것이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심란心亂: 마음이 어지럽다.(최 교수는 마음이 심란스러워 줄담배를 피워댔다.)
심난甚難: 심히 어렵다.(태호가 위축되고 심난할수록 정호는 더욱 의기양양했다.)
두 문장을 보면 정확하게 의미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마음이 어지러운 것’과 ‘심히 어려운 것’은 다르다. 그러므로 ‘심란하다’와 ‘ 심난하다’는 구분해서 써야 한다. 필자가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지도할 때는 반드시 짧은 글을 짓도록 해서 그 의미를 바르게 알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문장을 만들어 보면 그 뜻을 바르게 알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한글 전용하자고 하지만 우리말은 한자어의 영향하에서 성장했으므로 한자를 무시하고 우리말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숙맥’(菽麥 : 콩과 보리도 구분할 줄 모르는 아둔한 사람(그 친구 진짜 숙맥 아니야? 이것도 ‘쑥맥’이라고 쓰는 사람이 많다.))이 되지 않으려면 어려서부터 한자어를 익히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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