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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소송 남발과 '명예'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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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소송 남발과 '명예'의 의미

[양지훈 변호사의 법과 책]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명망 있는 변호사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카타리나 블룸이 댄스파티에서 만나 첫눈에 반한 한 남성과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카타리나는 즉시 체포되어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는데, 그 남성이 강도범으로 쫓기던 루트비히 괴텐이었고 카타리나가 그를 숨겨주고 도주를 도와줬다는 혐의가 그녀에게 있었다. 동시에 언론 보도가 시작되었고, 평범했던 카타리나는 이제 평소 '신사들의 방문'을 받던 문란한 여성으로 둔갑돼 그의 평온했던 삶은 송두리째 파괴된다.

수사기관이 카타리나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파고들며 그녀를 괴텐의 공범으로 몰고 가려 하고, 유력 신문 <차이퉁(Zeitung)>(독일어로 '신문'을 뜻한다)은 검찰과 은밀하게 협력하며 선정적인 기사로 카타리나를 '은행 강도의 정부'이자 '빨갱이'로 몰아갔던 것이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왔던 카타리나는, 이제 오랫동안 힘겹게 쌓아온 '명예'를 잃어버리고 결국 차이퉁 기자를 살해하는 진짜 범죄를 저지른다.

노벨상 수상 작가 하인리히 뵐이 1974년 발표한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민음사 펴냄)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부제,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폭력'은 주인공 카타리나의 일상적인 평화를 몇 번의 왜곡 보도로 무자비하게 파괴해버린 <차이퉁(신문)>을 향하고 있다.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1970년대 독일의 상황

이 소설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작가가 겪은 경험과 당시 독일의 사회적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하인리히 뵐은, 1970년대에 테러를 주도하던 과격 단체 '바더-마인호프 그룹(이른바 적군파)'를 옹호하는 듯한 글을 당시에 썼고, 이를 계기로 우익 성향 독일 언론(극우 계열 신문 '빌트 차이퉁')과 대중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다. 그즈음 카타리나의 모델이 된 하노버 공대 교수인 페터 브뤼크너가 적군파를 은닉한 혐의로, 하인리히 뵐보다 더 크게 고초를 겪었던 일화도 있다.

당시 지식인 그룹인 작가와 교수가 독일 우파 언론으로부터 당한 '폭력'이, 결국 이 소설을 탄생시킨 것이다. 하인리히 뵐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차이퉁>의 기자를 살해하도록 한 것은, 언론의 명예훼손이란 개인의 인격을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인격 살인에 대한 '정당방위'를 주장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결말 때문이었는지, 소설이 발표되었을 당시 작가가 언론을 향해 날린 '카운터 펀치'라는 식의 평가도 있었다고 한다.

형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명예'

어떤 개인이 언론에 의해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를 말하는가. 그것은 카나리나 블룸이 그의 명예훼손으로 어떻게 살인까지 하게 되었는지 규명하는 데 필요하다. 나아가, 주인공의 사례와는 반대로 한국에서 정치인들이 언론 보도에 명예훼손 소송을 지나치게 남발하는 현실은, '명예'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고민하게 만든다.

명예(名譽)란, 사전적으로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이름이나 자랑 또는 그런 존엄이나 품위를 일컫는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 개념적으로 '모든 명예'가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형법 교과서에서 말하는 명예는 내부적/외부적 명예로 구분된다. 내부적 명예란, "자기 또는 타인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인간의 인격에 내재하는 진정한 가치로서의 명예"여서 "개개인 모두가 천부적으로 평등하게 지니고 있고, 외부로부터 침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형법상 보호의 객체가 될 수 없"다고 본다.(내부적 명예란 사상의 자유, '양심'과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더 잘 이해된다.) 이에 비해 외부적 명예란, "인격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평가'로서의 명예, 세평"이라고 할 수 있고, 형법이 보호하는 명예란 바로 이 외부적 명예를 가리킨다. 이와 별도로, "자기 자신의 '주관적 평가'로서의 명예"의 경우 명예감정으로 구별한다(<형법각론>(임웅 지음, 법문사)).

현실에서 유의미한 구분은 외부적 명예와 명예감정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명예감정을 형법이 보호하는 외부적 명예와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명예에 둔감하게 또는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공적 인물을 각각 가정해 보자. 어떤 보도 기사가 전체적으로 진실한 것이지만 일부 허위를 담고 있는 경우, 어떤 정치인은 기사의 보도 방향과 논조를 이해하고 감당하겠지만, 자신의 '명예감정'에 매우 예민한 자는 이를 즉시 문제 삼을 것이다(이미 너무 많은 정치인들이 그렇게 한다). 이렇게 명예훼손이 개인의 '명예감정'에 좌우된다면 국가의 형벌권의 발동이 개인의 주관적 감정에 좌우되는 것이다(임웅, 같은 책). 형법이 보호하는 명예가 그러한 감정이 아니라 외부적 명예가 되는 이유이다.

외부적 명예란 결국 자기 자신의 주관적 평가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사회적 평가로서의 명예라고 할 때 우리 정치인들은 특히 자신의 명예감정을 왜곡하여 과대평가하고 있으며 이에 기반하여 소송을 남발하는 것은 아닐까.

언론이 처한 환경

이와 달리, 카타리나 블룸의 경우 <차이퉁>의 선정적 보도로 명예가 훼손당했다는 사실은 명백히 보인다. 빨갱이이자 강도의 정부로 알려졌지만 실제 그는 평범하고 성실한 시민이었을 뿐이며 차이퉁은 이를 날조했다. 이때 그의 명예는 인격이 파괴당하는 수준에 이르렀던 것이다. 스스로의 명예를 과대평가하는 어떤 공적 인물과 달리, 일개 시민에 불과한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는 보호 가치가 적은 것인가. 이 작품은 오히려, 공적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익명성과 소박한 일상은 그 자체로 존엄하며, 그것이 파괴되었을 때 더 심한 가해가 된다고 말한다.

소설은 명확하게 당시 언론 환경과 차이퉁 보도의 동기를 지적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소설의 맥락으로 현재를 보면, 우리는 이제 당시보다 더 뚜렷하게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할 수 있다. 언론은 본디 시장의 영역에 속해있으며 독자의 구독과 시장의 관심-광고가 이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2020년, 독일이나 한국에서의 언론 지면 구독자는 줄고 시장에서의 경쟁은 강화되고 있다. 언론 환경 변화의 중심에는 포털로 대변되는 온라인이 자리한다. 포털 플랫폼은 뉴스 생산 과정에서 독자와의 장기적 신뢰의 형성을 저하시키고, 대중의 즉각적인 욕구에 반응하는 저질 뉴스만 내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관련 기사 : <북저널리즘> '포털에 종속된 저널리즘' 중) 최종 진실이 아닌 조각난 사실들을 즉자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은, 소설 속 독일 사회에서보다 지금의 한국에 더 정확하게 맞는다.

명예의 보호 vs 언론의 자유

이 혼돈의 시대에 공적 인물들의 언론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 남발과 사인에 대한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 사이에 어떤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균형은 시민들의 토론과 경험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우리 공동체를 위해 더 나을 수 있겠지만, 현재 법원이 도달한 결론은 이렇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여론의 자유로운 형성과 전달에 의하여 다수의견을 집약시켜 민주적 정치질서를 생성, 유지시켜 나가야 하므로 표현의 자유, 특히 공적 관심사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중요한 헌법상 권리로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다만 개인의 사적 법익도 보호되어야 하므로, 표현의 자유 보장과 인격권 보호라는 두 법익이 충돌하였을 때에는 구체적인 경우에 표현의 자유로 얻어지는 가치와 인격권의 보호에 의하여 달성되는 가치를 비교형량하여 그 규제의 폭과 방법을 정하여야 한다. 타인에 대하여 비판적인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사정이 없는 한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표현행위의 형식과 내용이 모욕적이고 경멸적인 인신공격에 해당하거나 타인의 신상에 관하여 다소간의 과장을 넘어서 사실을 왜곡하는 공표행위를 하는 등으로 인격권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의견 표명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난 것으로서 불법행위가 될 수 있다."(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4다61654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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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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