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었다. 서울에 중국인 교수가 온 것은
1927년 4월 5일, 스물 여섯 살의 웨이젠공(魏建功, 1901-1980)이 서울역 플랫폼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한반도에는 일본이 설치한 4년제 대학 경성제국대학이 유일한 종합대학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초기 기획단계부터 '동양학의 특종학부'를 대학의 특징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동양학의 특종학부'를 구현하기 위하여 한국과 중국, 일본을 연구하는 각각의 전공이 설치되었다.
웨이젠공은 중국을 연구하는 학과인 지나어학지나문학 전공, 오늘날의 말로 하면 중어중문학과에 배치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직책은 강사로, 학생들에게 올바른 중국어 발음과 중국어 회화를 가르치는 일이 주어졌다. 웨이젠공의 전공이 중국어학(linguistics)이었으므로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중국문학을 가르치는 일은 대학총장과 동년배의 일본인 노교수 고지마 겐키치로가 맡았다.
혁명의 기운이 넘치는 베이징 대학 학창시절
1901년생인 웨이젠공은 한참 혁명의 기운이 넘치던 1921년 베이징대학 중국어문학 전공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919년 한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에서는 같은 해 5월 4일 5·4 신문화 운동이 벌어졌다.
웨이젠공은 반외세, 반봉건의 외침과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한다는 활기가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대학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는 루쉰과 그의 동생 저우줘런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신문화운동과 관련된 각종 주요한 출판물들에 글을 쓰고, 편집을 맡기도 했었다.
3·1운동과 5·4운동이 일어나던 시점, 즉 중국이 수천년 역사 속에서 가장 약했던 순간, 피압박민족으로서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동시에 동병상련의 처지인 한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항하기 위한 한중연대가 막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안중근의 의거에 쏟아진 중국인들의 찬사, 잘 알려진 쑨원과 신규식의 만남 같은 것들이 이 시기 한중관계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중국이 신문화운동을 통해 스스로를 고쳐내고, 피압박민족과의 연대를 통해 제국주의에 대항하고자 했던 것이 당대 중국의 시대정신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중국학과 중국의 중국학의 사이에서
그가 한반도에 오게 된 이면에는 당시의 일본과 중국사이의 미묘한 학문적 경쟁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학문분야에서도 가장 먼저 4년제 종합대학을 설치하며 교육·연구에서 앞서 나갔다. 청(淸) 정부는 황급히 오늘날 베이징 대학의 전신인 경사대학당을 설치하는 등 부랴부랴 서둘렀지만, 중국학에 있어서 주도권을 빼앗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920년을 전후한 시점, 전 세계에서 중국에 대한 연구가 가장 앞선 곳은 프랑스와 독일이었고 그 다음이 일본이었다. 각기 자신의 중국학에 대해 유럽은 '동방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일본은 '지나학'이라고 불렀다. 신해혁명과 그에 뒤이은 정치적 혼란기를 겪고 있던 중국은 자국학을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는 여력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중국의 자국학이 본격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은 신문화운동에 뒤이은 국고정리운동 이후의 일로,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1920년대의 일이었다.
바로 이 시점에 일본이 중국에 중국학 교수를 요청한 것으로, 일본측도 중국측도 인선에 고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국인으로서 중국학에 있어서 일본에게 뒤떨어진다는 것은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환교수를 요청하는 쪽도 그 정도를 배려할 눈치는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인이 쉽게 앞설 수 없는 어학분야의 '원어민 강사'로 웨이젠공이 선발되었다. 그가 한국에 파견된 이면에는 일본과 중국의 중국학자들의 한편으로는 기싸움과 다른 한편으로는 원만한 타협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
한국에 온 웨이젠공은 자신의 전공인 언어학뿐만 아니라 한국의 다양한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언어학에 있어서는 중국어에서는 이미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입성(入聲)의 흔적이 남아있는 한국어 발음과 제주도 방언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한국의 전통문화 중 그가 크게 관심을 갖고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은 아악(雅樂)에 관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에서 궁중과 조정에서 주요한 행사 때 사용하던 아악은, 당시에는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의 아악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웨이젠공은 아악을 들은 감상을 '비장하고 침중하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한 감상에는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한국의 이미지가 어느정도는 투영되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악은 격식있는 행사에 쓰는 음악임으로 빠른 비트와 흥겨움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지식인과의 교류
웨이젠공은 일본인들과는 교수로서 관계를 맺는 한편, 한국인들과는 사제관계를 만들어 나갔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국 최초의 근대적 문학사 <조선소설사>(1933)와 <조선한문학사>(1931)를 쓴 김태준이다.
김태준은 웨이젠공이 한국에서 가르친 마지막 학기에 대학 본과에 진입하여 한 학기의 수업을 들었다. 네 살 차이가 나는 둘은, 대학졸업 이후로도 한국과 중국의 학계에 자리잡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의 한자폐지론과 한국의 맞춤법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과 중국 양국에서 서로에 대한 연구단체를 만들어 운영할 것에 대한 논의를 진행한 것이다. 오늘날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같은 전문연구기관들을 이미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호이해와 존중, 미래 한중교류에 대한 고민
한국에 있는 동안 웨이젠공이 한국어를 배웠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경성제국대학의 공식 언어는 일본어였고, 그는 '중국어 원어민' 강사로 초청되어 중국어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한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또 피압박 민족으로 한국과 중국의 상호 이해와 연대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는 한국에서 나타났던 일부 화교에 대한 배척 움직임에 대해서도 표면적인 현상에 주목하는 것이 아닌 심도 있는 이해를 보여주었다.
단순히 중국인들이 피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 아닌, 중국에 있는 한국인들이 겪고 있을 어려움까지 생각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일본의 초청으로 한반도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한국통치를 긍정하지 않는 올곧은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웨이젠공은 이후에도 '교한쇄담'(僑韓瑣談)이라는 글을 연재하여 일제치하 한국의 상황,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문화적 관계, 그리고 한국독립의 필요성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서술해 중국에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초기 한중교류는 상호 이해와 존중, 배려의 기반위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도 현실정치의 맥락에서 휘둘리지 말고 배타적 민족주의의 극복, 지속적인 소통의 교류를 통해 공동평화와 번영의 지역질서를 지향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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