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형법상 낙태죄를 유지하고 임신 14주 이내의 임신중지(낙태)를 허용하는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자 여성계는 즉각 "정부 입법예고안이 여성의 자기결정권 존중이라는 법 개정 취지에 반하는 명백한 후퇴"라고 규탄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는 8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 입법예고안은 여성에 대한 처벌을 유지하고 건강권과 자기결정권, 사회적 권리 제반을 제약하는 기만적인 법안"이라며 "낙태죄를 형법에서 완전히 삭제하라"고 촉구했다.
허용요건 신설은 '처벌'을 전제하는 것...여성의 권리는 '조건부'가 아니다
이들은 "정부의 입법예고안이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4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형법 제269조 1항과 제270조 1항의 조항을 그대로 존치시키는 것으로 그 자체로 위헌"이라고 지적했다. 형법 제269조 1항은 임신중지한 여성을, 제270조 1항은 임신중지 시술을 한 의료인을 처벌한다.
정부의 입법예고안은 형법 제270조의2에 '허용 요건'을 신설해 "임신 14주 이내에 의사에 의해 의학적으로 이루어진" 임신중지는 처벌하지 않는다.
모낙폐는 이 조항에 대해서도 "처벌이 전제됐다"며 비판했다. 이들은 "여성의 건강권과 평등권, 자기결정권을 온전한 헌법상 권리로서 보장받지 못하게 됐다. 입법예고안대로라면 여서의 권리는 국가의 허락에 의한 '조건부' 권리가 된다"라며 "합법과 불법을 임의적인 주수 기준으로, 여성의 성과재생산의 권리를 위계화하는 사회경제적 사유로, 권리가 아닌 의무에 불과한 상담 절차로 가르고 불평등을 유지시키는 조항"이라고 지적했다.
임신 주수에 따른 구분에도 "실효성 없는 조항"이라고 비판했다. 여성계는 줄곧 "임신 주수에 따른 허용 시기의 구분이 어떠한 과학적 근거도 없을뿐더러 임신 당사자의 진술과 초음파상의 크기 등을 참고해 '유추'되는 것일 뿐 명확한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해왔다. 지난 8월 법무부 양성평등정책위원회도 임신 주수를 기준으로 한 판단은 개개인의 신체적 특징을 간과해 헌법상 명확성의 원칙에 반한다고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모낙폐는 "14주, 24주 등의 주수에 따른 제한 요건은 단지 처벌 조항을 유지하기 위한 억지 기준"이라며 "주수에 따른 허용 조항을 삭제하고 임신 기간에 따라 안전한 임신중지와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과 보건의료 인프라 마련 방안이 제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무 상담·숙려기간은 국제사회에서 폐지하는 추세
이들은 입법예고안의 '상담과 숙려기간'에 대해 우려의 뜻을 나타냈다. 정부의 입법예고안에 따르면 임신중지가 허용되는 14주를 지난 뒤, 14주에서 24주 사이로 추정되는 시기에 임신중지를 하려면 특정한 사유를 충족해야 하고 그 사실을 사담기관을 통해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24시간의 '숙려기간' 후 의료기관을 방문할 수 있다.
여성계는 이와 같은 상담과 숙려기간 의무 조항에 대해서도 "임신중지 결정을 돌이키거나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하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도 같은 이유로 2015년 숙려기간 규정을 폐지했고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의무적인 숙려기간 없이, 사담은 당사자가 원하는 경우에만 받도록 하고 있다. 유엔여성차별철페위원회, 유엔자유권위원회, 세계산부인과학회 등에서도 "이는 임신중지를 결정한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을 침해하는 규제"라며 폐지를 권고하고 있다.
모낙폐는 "여성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하고 필요한 정보와 지원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상담의 의무화가 아니라 내용과 기준이 중요하다"며 "명확한 근거에 기반하지 않은 정보, 상담가 개인의 종교적 입장을 강요하는 태도, 임신당사자의 의사결정권을 침해하는 상담 등은 반드시 규제되어야 하며 이러한 내용이 법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사의 '진료거부권'은 환자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행위
모낙폐는 정부의 입법예고안이 예외적으로 인정한 '의사의 진료거부권'도 비판했다. 모낙폐는 "이는 사실상 안전한 보건의료 환경에 대한 여성의 접근권을 크게 제약하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정부안에 따르면 상담과 숙려기간을 거쳐서야 의료기관을 찾아가게 되는데 여기서 의료인이 거부할 경우 다시 상담기관으로 연계된다. 모낙폐는 "현재 산부인과의 지역별 격차도 매우 큰 상태에서 여성들은 상담기관과 의료기관을 찾아 전전해야 한다"며 "임신한 여성이 직장이나 학교에 다니고 있거나, 다른 자녀를 키우고 있는 경우, 상담기관과 의료 기관의 접근성이 취약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경우, 관련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조건에 있는 경우에는 이와 같은 제약은 실질적으로 여성들의 건강권을 크게 침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해외에서도 의료인의 거부권을 인정한 곳에서는 임신중지를 시행하는 병원과 공공의료기관의 인력난과 재정난에 더 큰 부담이 발생하는 등 많은 문제가 발행해 왔다"며 "이에 2018년 10월 유엔 자유권위원회는 일반논평 36호를 통해 '의료제공자의 거부 행위를 포함하여 안전한 임신중지 접근성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장벽을 철폐하라'고 권고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한 의료진 교육과 보험 적용, 보건의료 체계 및 인프라의 전면적인 재정비 등과 같은 실질적인 조치"라며 "새로운 낙인과 허용의 기준이 아닌 임신중지와 유지, 출산과 양육 전반의 성과 재생산 권리에 대한 지원 사업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라"고 주장했다.
모낙폐는 이날부터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를 요구하는 1인시위를 이어나갈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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