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공공의료, 공공의대 같이 공공이라는 말이 인기다. 정부, 여당, 진보시민단체는 한결같이 ‘공공의료를 확대해야 한다’ 라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쓰이는 ‘공공’이라는 표현은 실체 없는 대국민 립서비스일 뿐이다. 왜 그런지 알아보자.
공공의료란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의료서비스를 국가가 책임지고 모든 국민에게 제공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나라 의료서비스는 이미 거의 대부분 공공의료이다. 지금 당장 확충해야 하는 공공의료 분야는 수도권과 지방간 의료격차 해소, 산부안과, 외상외과, 심장 뇌혈관질환 같은 필수적이지만 업무의 강도와 위험도에 비해 보상과 보호가 따르지 않아 의사들 에게 인기가 없는 분야 지원, 그리고 감염병 시설과 방역 인력 확충이다.
병의원 같은 의료기관 수를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절대 다수가 민간의료 시스템이다. 의료기관의 94.2%가 민간기관이고 나머지 5.8% 만이 국공립병원, 지방의료원, 군병원, 경찰병원, 보건소와 같은 공공기관이다. 그런데 실제 운영구조를 기준으로 보면 상황은 180도 바뀐다. 94.2%에 이르는 이른바 민간의료기관들도 업무의 대부분을 공공적인 방식으로 수행한다. 순수한 민간의료행위는 미용 성형수술 같은 극히 제한된 비 보험 분야에 국한된다.
민간의료기관이 수행하는 업무의 대부분이 공공적이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한마디로 민간의료기관도 모든 의료행위를 정부가 감시, 관리, 통제한다는 뜻이다. 구체적인 원칙은 이렇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내가 아플 때 민간병원에 가든 공공병원에 가든 똑같이 줄 서서, 똑같은 진료를 받고, 똑같은 약을 처방 받은 뒤, 똑 같은 비용을 내게 된다는 것이다. 병원 입장에서는 최고 수준의 의사를 고용하든 말든, 최신 장비를 들여오든 말든, 환자에게 더 쾌적한 서비스를 제공하든 말든 벌 수 있는 돈의 한도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의료제도는 서로 양극단을 달리는 미국과 영국 제도의 절충 형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의료시스템을 민간보험회사가 지배하는 형식이다. 병원비는 비싸고, 부자는 사보험을 들어 최고급 진료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보험 들 능력이 없는 사람은 갈 병원도 없다. 영국은 국가보험제도를 통해 나라가 무상의료를 제공한다. 그러나 국가가 지정해준 공공병원의 대기 기간이 너무 길어 어디가 아파도 의사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흔해 당연시 여겨지는 최신 의료장비와 원 스톱 서비스를 영국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즉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세계 최고 수준 의료 인력과 세계 최저 수준 수가 덕분에 우리 국민은 미국과 영국 의료제도의 장점만 골라서 누리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산부인과나 외과 같은 필수 분야가 이른바 '기피과'가 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낮은 수가 때문에 개업해도 돈은 벌 수 없고 환자를 치료하다 문제가 생기면 혼자서 엄청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사례에서 보듯이 최악의 경우 감옥 갈 각오까지 해야 한다.
정부 여당은 이런 시급한 문제의 해법으로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정원 확충을 추진하고 나섰다. 하지만 당장 문제가 생겼는데 수 천억 원 들여 의대 새로 세워서 빨라야 10년 뒤 의사 몇 명 배출하겠다는 것은 현명한 대책이 되지 못한다.
지금 우리나라 공공의료에 허점이 드러나는 것은 의사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필수 분야에 의사가 일할 여건이 안되기 때문이다. 산부인과, 외과, 중환자관리, 감염관리 등의 분야는 인력부족에 허덕이지만 성형외과, 피부과는 과잉경쟁으로 허덕이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지금 당장 팔 걷고 나서야 할 일은 신설의대에 투입할 수 천억 원의 국민 세금으로 기피과목 전담 의료진을 지원하고 그들이 일할 수 있는 시설, 장비, 여건을 마련해 주는 일이다. 아울러 의료 격차 해소 방안도 적극 강구해야 한다. 이런 것이 진정한 의미의 ‘공공의료 확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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