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연방 대법관 후보로 에이미 코니 배럿 제7연방고법 판사를 지명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한지 8일 만에, 그의 유언을 무시하고 후임을 지명한 것이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사망 전날인 지난 17일 손녀를 불러 "내 간절한 소망은 새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내가 교체되지 않는 것"이라는 유언을 남긴 바 있다.
게다가 여성, 성소수자 인권 옹호 등 대법원 내에서 '진보의 아이콘'이었던 긴즈버그 대법관과 정반대 지향의 판사가 그의 후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여성이지만 보수 성향의 천주교 신자인 배럿 판사는 낙태, 동성애, 오바마 케어(의료보험 확대), 총기 규제 등에 대해 반대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2월 대통령 선거를 9개월 앞둔 시점에서 대법원 공석이 생겼을 때,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후임을 임명하는 것에 대해 "유권자들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새 대통령이 후임을 임명해야 한다"는 이유로 저지했던 공화당은 이번에는 180도 달라진 주장을 하고 나섰다. 미치 매코넬 상원 의장, 린지 그레이엄 상원 법사위원장 등은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라는 태도로 4년 전 발언과 입장을 뒤집고 후임 인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역대 대법관 인준 절차 완료에 걸린 시간은 평균 71일이었지만, 백악관과 공화당은 대선 전인 10월 29일께 인준 투표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상원에서 인준안이 통과될 경우, 대법원 구성은 '보수 6 대 진보 3'으로 보수 절대 우위가 된다.
트럼프 대통령(이하 직함 생략)과 공화당에서 긴즈버그의 유언까지 무시하며 '속도전'을 벌이는 이유에 대해선 트럼프가 직접적으로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11월 3일 있을 선거에서 "내가 지면 선거가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결과에 불복하고 연방 대법원에 소송을 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지난 23일 "이번 선거는 결국 연방대법원으로 갈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나는 대법관이 9명인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 트럼프의 주요 정치 어젠다인 낙태, 의료보험, 반이민, 성소수자 및 인종 차별 이슈 등 문제도 대법원 판결이 중요하다. 매코넬이 상원 의장으로서 자신이 가장 큰 정치적 업적을 보수 성향의 대법관을 3명 임명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선과 같은 날 있을 상원선거(전체 의석의 3분의 1만 선거)에서 민주당이 이겨서 민주당이 다수당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표결을 서둘러야 한다. 트럼프가 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에 이어 배럿까지 임명될 경우, 4년 임기 내에 가장 많은 대법관을 임명하는 '행운'을 갖게 되는 셈이다.
트럼프는 이날 인준 사실을 발표하면서 배럿에 대해 "비할 데 없는 업적과 우뚝 솟은 지성, 훌륭한 자격, 헌법에 대한 충성심을 지닌 여성"이라고 극찬했다. 배럿은 "나는 미국을 사랑하고 미국의 헌법을 사랑한다"며 대법관 지명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배럿, 비타협적 법전주의자...천주교 집단 "시녀" 출신으로 지나치게 종교적 비판도
배럿은 강경 보수인 안토닌 스칼리아 전 대법관의 법률사무관 출신으로 노터테임대 법대 교수로 오랫동안 재직하다가 트럼프 정부 들어 2017년 연방고등법원 판사가 됐다. 배럿은 앞서 2018년 브렛 캐버노 대법관이 임명될 당시 후보 중 한명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트럼프는 긴즈버그 대법관 사망 직후부터 후임을 지명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후임 인선을 위한 인터뷰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CNN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배럿 1명만 인터뷰했다.
트럼프가 배럿을 택한 이유는 자신의 핵심 지지층인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 배럿에 대한 선호가 가장 크기 때문이다. 배럿은 강경한 낙태 반대주의자다. 실제로 첫번째 아이가 임신 당시 장애(다운증후군)가 있다는 사실을 병원 검사를 통해 알았고, 병원에서도 낙태를 권유했지만 이를 거부했다고 알려졌다. 배럿은 아이티 출신 입양 자녀들을 포함해 7명의 미성년 자녀가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배럿은 법관의 해석이 아니라 법 조문의 원문 그대로를 따라야 한다는 '법전주의자'로 현재 대법원장인 존 로버츠 대법관에 대해 법전주의의 원칙을 깼다고 비판적인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고 CNN이 보도했다.
한편, 일부 언론은 베럿의 종교적 성향이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고 문제제기하기도 했다. 배럿은 천주교 집단인 "기도하는 사람들"(people of praise) 소속인데, 이 보수적인 종교 집단에 대해 일부 과거 참가자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24일 과거 이 모임 소속인 한 여성은 <데모크라시 나우>와 인터뷰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에 대해 "사이비 종교 집단(cult)"이라면서 전 남편과 종교 지도자에 의해 끊임없이 감시 당해야 했던 경험에 대해 폭로하기도 했다. 이 집단 내에서 여성 지도자가 "시녀"(handmaid)라고 불렸는데(최근 명칭을 바꿨다) 이 모임 소속인 배럿은 지역에서 "시녀" 역할을 오랫동안 맡았다고 한다. 이 여성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캐나다 작가 마가렛 애트우드가 쓴 소설 <시녀 이야기>(The handmaid tale)와 거의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애트우트의 소설은 TV 드라마로도 제작돼 방영됐다.
상원 공화당 의원 중 2명만 인준 표결 반대..."인준 확실해 보인다"
한편, 공화당은 대선 전에 인준 표결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CNN은 이날 공화당이 10월 12일부터 배럿에 대한 인사청문회 절차를 시작한 뒤 10월 29일 이전에 인준안을 표결에 부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민주당은 인준에 반대한다는 입장이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원래 상원에서 대법관 인준 관련 필리버스터(의사 진행 방해)를 종료시키는 정족수가 과반이 아니라 60표 이상을 확보해야 되는 것이었지만, 2017년 공화당이 다수당인 상황에서 과반 이상 찬성하면 통과되도록 변경했다.
현재 상원은 공화당 53석, 무소속을 포함한 민주당 47석이다. 공화당에서 대선 전 표결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의원은 2명(수잔 콜린스, 리사 머코우스키)에 불과해 51표를 확보해 자력으로 인준안 통과가 가능하다.
<로이터>는 "민주당은 가능한 한 인준 절차를 어렵게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공화당이 상원을 지배하고 있어 인준은 확실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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