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노동자와 전태일을 매개로 '말 걸기'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과 탄압,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어 교육 강화, 갈수록 심화되는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 끝없이 이어지는 미중 갈등 등 최근 중국에서 계속 들려오는 참담한 소식에 답답하던 중 실로 반가운 소식 하나가 찾아왔다. 중국에서 '신(新)노동자'에 대한 연구와 교육 및 공동체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뤼투(吕途) 선생으로부터 동반자인 쑨헝(孙恒)과 함께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그에게 헌정하는 노래를 만들었고, 이를 추후 뮤직비디오로 제작할 계획이니 한국어로 가사를 번역해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이었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얼른 그러겠노라 답신을 하고 나니, 문득 그간 중국 신노동자와 전태일을 매개로 끊임없이 한국에 대화를 시도했던 뤼투의 '말 걸기'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것 같아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상과 경험의 교류: 경계를 넘어, 영원히 타오르는 전태일 정신
뤼투의 중국 신노동자에 관한 저서 3부작은 이미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됐다. 그중 내가 번역에 참여했던 <중국 신노동자의 형성>(나름북스, 2017)과 <중국 신노동자의 미래>(나름북스, 2018)는 중국 신노동자가 처한 사회구조적 상황에 대한 분석과 그들의 '삶 이야기'를 통해 신노동자 개인과 집단의 주체성 확립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출간된 <우리들은 정당하다>(나름북스, 2020)에는 34명의 중국 여성 노동자의 삶과 노동, 투쟁의 역정이 담겨있다. 특별히 <우리들은 정당하다>는 전태일재단과 국내 11개 출판사가 우리 시대 전태일 정신의 계승을 위해 공동으로 기획한 '전태일 50주기 공동 출판 프로젝트: 너는 나다'의 일환으로 출판되어 더욱 뜻깊다.
세 권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모두 밝히고 있듯이, 뤼투와 한국의 연결고리는 단연 전태일이다.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이 중국에서 <한 점의 불꽃: 전태일 평전>(星星之火: 全泰壹评传)이라는 제목으로 2002년에 출간됐는데, 뤼투는 이 책을 읽고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뤼투의 말처럼 전태일 정신은 국경과 언어의 경계를 넘어,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음을 새삼 느낀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번역 작업은 단순히 다른 나라의 활자를 옮기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화와 마주침의 매개자로서 사상과 경험의 교류를 촉구하는 일종의 '매개활동'이다. 그렇기에 나는 뤼투의 책도 업종과 지역, 성별과 세대 나아가 국경을 넘어 '새로운 노동자 계급과 사회문화의 창조'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연대와 응답을 촉구하는 '외침'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피촌(皮村) 정신': 우리의 문화가 없으면 우리의 역사가 없고, 우리의 역사가 없으면 우리의 미래가 없다
뤼투 본인의 삶에서도 전태일 정신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는 안정된 삶이 보장된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2008년부터 현재까지 '베이징 노동자의 집'(北京工友之家)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하고, 교육 및 저술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일궈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2002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베이징 노동자의 집'은 베이징 수도공항 근처의 노동자 밀집 지역인 피촌에 위치해 있으며, "신노동자 집단의 문화 구축, 다양한 교육활동, 공동체 경제 및 상호 협력적 연합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종의 코뮌(公社)을 지향한다.
이러한 '피촌 정신'에 입각해 노동자 자녀를 교육하는 '동심(同心)실험학교', 사회적 기업인 '동심호혜공익상점', '품팔이 문화예술 박물관', 노동자대학인 '동심창업교육센터', 지역노동조합인 '노동자의 집 사구(社区) 공회', 생태농원인 '동심농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뤼투와 동료들은 "우리의 문화가 없으면 우리의 역사가 없고, 우리의 역사가 없으면 우리의 미래가 없다"는 인식하에 노동자들의 현실적 생활과 필요에 기반한 대안 문화운동을 힘겹지만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뤼투는 "중국 신노동자는 개혁개방의 산물이자,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새로운 정책과 법률, 윤리규범 및 도농관계와 사회관계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이 더 이상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회집단이 아닌, 새로운 변혁의 주체로 거듭나야 중국의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중국의 신노동자를 매개로 중국 사회의 역사와 현실, 그리고 미래를 조망한다는 것은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노동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우리의 가능한 출로는 무엇일지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할 것이다.
눈이 펑펑 내리다 갑자기 햇살이 비추던 어느 날, 함께 공항으로 가던 새벽길에 뤼투가 내게 했던 "당신이 중국 신노동자의 현실과 미래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세계 노동자의 운명에 주목하는 것이고, 이것은 내가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 관심을 갖는 것과 같은 이유"라는 말이 다시 계속 머리를 맴돈다. 뤼투와 쑨헝의 전태일을 위한 노래 <찬란한 빛>을 공유하며, 답답한 마음의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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