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의 일기
올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선포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광복된 지 벌써 75년이 지났는데 "독립전쟁이 무슨의미가 있지"라고 의문을 던질 수 있겠지만 그 독립전쟁 속에서 한 가정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육아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바로 '제시의 일기'이다.
몇 해전 박건웅 그래픽 노블 작가와 중국 상하이, 항저우를 답사한 적이 있다. 그 때 박건웅 작가는 필자에게 제시의 일기를 그래픽 노블 형태로 출판한다고 했다. 4일 내내 박건웅 작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과 역할 그리고 양우조와 최선화는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화폭에 옮겼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그래픽 노블 제시의 이야기이다.
양우조와 최선화
제시의 아버지 양우조(1897~1964)와 최선화(1911~2003)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에 망명중 결혼하게 되었다. 양우조는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으로 미국 매사추세츠 폴 리버 방직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가서 한국독립당 창당 발기인으로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특히 임시정부 생계부 차장을 역임하는 등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최선화는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한국국민당에 입당을 하면서 양우조와 함께 부부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결혼식은 장쑤성 쩐장 임시정부청사에서 김구의 주례로 임시정부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양우조는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여러 가명을 사용하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반면 최선화는 이화의 교사로 근무했던 많은 선배들이 그랬듯이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유학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최선화는 미국유학의 꿈을 접는 대신 중국에 건너가 양우조와 결혼하고 중국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낯선 땅에 적응하며 겪는 외로움과 고난을 넘어 일본제국주의 경찰의 체포 위험까지도 각오한 결단이었지만, 이를 고생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새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제시의 탄생과 중국 후난성 창사
제시의 일기는 1938년 7월 4일 중국 후난성 창사에서 이들의 첫 아이 제시가 태어나면서 진행되었다. "내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나는 내 딸을 가슴에 안았다." 양우조는 가슴벅찬 글로 당시 딸 제시와 첫 대면을 이렇게 기록했다.
하지만 후난성 창사는 이들에게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당시 후난성 창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일전쟁의 화마를 피하면서 머물던 곳이었다. 1937년 7월 7일 일제가 베이징의 루거우치아오(蘆溝橋)를 공격하면서 발발한 중일전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는 한중 공동항일투쟁의 서막이었다. 국민당 정부가 있었던 난징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예기치 않은 빠른 진격으로 임시정부는 황급히 후난성 창사로 이전해야 했다.
백범 김구는 난징과 전장(鎮江)에 머물고 있던 임시정부와 그 요인들을 일제의 폭격에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고자 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임시정부가 창사로 옮기게 된 이유와 그 당시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백범은 이곳에서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위해 주력했다. 좌우익을 아우르고 독립운동의 결집력을 강화하기 위해 백범은 이념과 노선이 달라도 뜻을 함께 하고자 했다. 이 때 발생한 사건이 앞서 언급했던 남목청 사건이었다.
남목청 사건이 일어나자 창사시에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경비사령부에서는 창사에서 출발해 우창을 향해 출발한 기차를 다시 창사까지 되돌려 범인을 수색했고, 임시정부에서는 광둥으로 공작원을 파견해 한중 합작으로 범인을 체포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마침내 범인 이운환을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이운환은 당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시골 기차역에서 체포되었다.
하지만 이후 창사시도 일본의 공격으로 위급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범인 취조를 하지 못하였으며, 이운환은 이 과정에서 탈옥까지 해서 이후에는 생사를 알 수 없었다. 김구는 총상을 입고 상아의원에 도착했을 때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지만, 장제스의 명령으로 무사히 수술을 받아 생명을 건졌다.
김구가 저격당한 후 한인 사회에서는 백범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횡횡할 정도였다. 이후 이후 김구는 총상 후유증으로 글을 쓸 때 손이 떨리는 증상이 시작되었다. 김구 특유의 독특한 글체로, 이른바 '총알체'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물위에 뜬 망명정부, 제시의 고난이 시작되다
1938년 7월 22일자, 후난성 창사에 자리잡고 있던 임시정부는 장쑤성 쩐장에서 온지 불과 8개월만에 다시 짐을 꾸렸다. 광동성 광저우로 가기 위해서였다. 양우조와 최선화의 <제시에 일기>에 나오는 장면을 잠시 옮겨 보자.
후난성 창사에서 광저우로 이전하게 된 임시정부는 대가족이자 정부였다. 광저우로 가기까지 일본군의 공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당시 이동상황을 제시의 일기를 통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광저우 함락이 임박하자 3개월만에 다시 광서성 류저우로 이동하였다. 이 길 역시 고난의 피난길이었다. 제시의 일기에서는 당시 급박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피난길을 지나고 지나 마침내 쓰촨성 치장에 도착한 것은 1939년 4월 30일이었다. 치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가 있는 충칭에서 약 25km 떨어진 곳이다. 당시 충칭은 중국 국민정부가 임시수도로 쓰던 곳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은 치장에 머물면서 국민정부 인사들과 교류하기 위해 충칭으로 빈번하게 출입하곤 했다. 그리고 제시는 제2의 고향이라고 하는 충칭으로 1940년 11월 13일 이사하게 되었다. 해방까지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제시의 일기가 지닌 가치
한국독립운동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가 소중하게 보듬어야 할 정신적 자산이자 미래를 설계하는 자양분이기도 하다. 제시의 일기는 제국주의 시대 우리 민족의 미래인 아이들에 관한 기록이다. 전쟁 속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자유와 평화가 보장되는 나라, 그러한 나라를 만들어 주는 것이 부모의 책무였다. 제시의 일기는 우리 미래의 오래된 기억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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