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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의 우리말 바로 알기] 인디언과 원주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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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의 우리말 바로 알기] 인디언과 원주민 이야기

인디언과 원주민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오늘은 주제를 약간 달리 해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얼마나 큰 잘못을 가지고 오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필자가 근무하는 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에는 외국인이 정말 많다. 미국에서 유학 온 친구도 있었고, 요즘은 우즈베키스탄이나 키르키즈스탄, 몽골, 중국, 베트남 등 다양하다. 그러다 보니 제1언어로 한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제2언어로 영어, 그리고 제3언어로 자국어를 사용하게 한다. 실제로 필자의 연구실에서 자국어를 사용하면 벌점을 받든지 꿀밤을 맞든지(?) 해야 한다. 이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을 앞에 놓고 늘 학기 초가 되면 공통된 질문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을 발견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독자들도 속으로는 아마 웃고 있을 것이다. 너무 쉬운 것을 질문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우리 학생들은 한결같이 똑똑하여 어느 나라 학생을 막론하고 “콜럼버스”라고 답을 한다. 우즈베키스탄 아이도 그렇고, 베트남 아이도, 중국 아이도 모두 그렇게 답을 한다. 그러면 필자가 자세히 설명한다. 콜럼버스가 1492년 출항하여 두 달 동안 힘들게 항해를 하고 어느 곳에 닿았는데, 그는 그곳이 인도인 줄 알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후에 그는 인디언들을 싣고(?)와서 동물원에 가두고 사육하기도 했다. 이글을 자세히 읽어 보면 콜럼버스가 당도했을 때 이미 누군가(인디언?)가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미국을 발견한 것이고 그곳의 주인이지 어찌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인가? 그는 침략자일 뿐이다. 콜럼버스가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유럽인의 시각일 뿐이다.

동유럽에 가면 보헤미아 지방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 가면 집시들이 노래를 부르며 점도 봐 주고, 춤을 추기도 하면 자유스럽게 생활하고 있다. 이른 바 보헤미안이라고 하기도 하고 집시라고도 한다. 유럽인들이 보기에는 이들이 이집트 사람(an Egyptian)같이 보였던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동양인들은 다 이집트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을 ‘이집시안’이라고 했는데, 제1음절이 묵음이다 보니 ‘집시안’만 남아서 오늘날의 ‘집시’가 되었다. 이 집시들은 이집트 사람이 아니고 인도의 펀잡 지방 사람들이다. 인도에서 유럽까지 가서 그런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이 진짜 인디언이라고 봐야 한다. 미국에 살던 사람들은 인디언이 아니고 원주민(native)인데, 이들이 인디언이 되었고, 진짜 인디언은 다시 ‘이집트사람(집시)’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이런 것을 일컬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것이다.”라고 명명하면 바로 그것이 정답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과거에 필자가 금산의 어른들을 모시고 온양온천에 다녀온 일이 있다. 전세버스를 타고 온양에서 시원하게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길 오른편에 큰 학교가 있었다. 노인들이 입이 쩍 벌어지면서 “어찌 저렇게 큰 학교가 있어?” 하고 놀라고 있는데, 연세가 지긋하고 위엄 있는 어른이 “응 저건 순천향대학교야”라고 하니까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구나 하고 있었다. 사실 그 학교는 순천향대학교가 아니라 경찰학교였다. 필자도 거기서 한 번 강의한 적이 있었는데, 하도 그 어른이 단호하게 말씀하셔서 뭐라 토를 달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 차에 탔던 모든 노인들은 그 학교를 순천향대학교로 알고 있을 것이다.

오호 통재라! 우리가 지금까지 정답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 제대로 알고 보면 오답임이 분명하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그렇다고 정말로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기도 힘든 세상이다. 이제 필자의 제자들에게 미국을 발견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답을 한다. 학교 교육이 지나치게 편협해서는 안 된다. 사고의 틀을 넓히고 자연스럽게 논쟁에서 이기게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다양하게 생각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럽인의 시각에서 벗어나 우리의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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