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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의사들의 강인함의 뿌리는 '희생 정신' 아니라 '동료 시민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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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의사들의 강인함의 뿌리는 '희생 정신' 아니라 '동료 시민 의식'

[쿠바와 코로나19] ⑤ 보통 사람들을 위한 의(醫)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은 코로나의 본토 침공에 속수무책이다. 자본주의의 성지인 미국 뿐 아니라 자본주의 탄생지인 유럽에서도 영국, 프랑스 등 주요 국가들 역시 맥을 못 추고 있다. 무섭게 경제가 성장중인 중국, 인도, 브라질은 말할 것도 없는 상황이다.

여기, 우리가 외면해 온 작은 나라가 있다. '저개발국'이라 치부되던,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의 바깥에 있는 세계, 쿠바에도 코로나19는 찾아왔다. 그러나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2020년 7월 3일까지 쿠바의 누적 확진자는 2400명 이하이고, 총 사망자는 86명이다. 사망률도 WHO의 평균보다 낮은 3.6%이다. 쿠바는 어떻게 코로나를 극복하고 있을까. <프레시안>은 현재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교에 재학중인 김해완 씨가 본 '쿠바의 의료 체계'와 관련된 글을 연재한다. 편집자

'쿠바와 코로나19' 연재 보기

①우리가 외면한 세계, 쿠바는 어떻게 코로나를 이겼나

②쿠바에는 코로나 자가진단 '인간 앱'이 동네마다 있다?

③쿠바의 코로나 방역 '사회적 거리 0m'의 쾌거..."이웃간 볼키스를 멈추세요"

④코로나 방역에 성공한 쿠바, 굶주림은 어떻게 방역할 것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대해 말한다. 모든 전염병이 그러했듯이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결국 사라질 텐데도 말이다. 이는 팬데믹을 겪기 이전으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직감, 그리고 머지않아 또 다른 역병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병과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야한다고들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구체적으로 감이 안 온다. 평소에는 실감할 수 없었던 죽음의 그림자가 유독 가깝게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논할 때는 의(醫)가 빠질 수 없다. 병과 생사가 실질적으로 교차하는 현장이다. 이번 재난의 최전선에 의료진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나 세계에서나 그들은 밀려오는 환자를 받았고, 열악한 의료 실태를 폭로했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의료진의 노고와 사람들의 불안이 공명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웅 서사가 흘러나왔다. 병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는,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훌륭한 의료진들! 이는 그런 의사가 더욱더 많아지기를 바라는 염원이기도 하다. 세계 어디서나 의사는 두 얼굴의 인물이다. 생명을 살리는 귀한 기술을 가진 자와, 사회에 필수불가결한 기술을 이용해 돈과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자. 지금 코로나 대역병의 시대는 전자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리는 중이다.

그렇지만 이게 바람직할까? 저 언표를 뒤집어보면 ‘영웅’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헌신하기 어렵다는 말도 된다. 의사도 결국 수많은 직업들 중 하나인데, 그들 개인에게만 특별히 높은 윤리의식과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사회 시스템 속에서 영웅들의 활약을 언제까지고 기대할 수 없다면 일반인들은 자기 나름대로 병(病)이라는 인생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평소라면 개인이 각자도생의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 생명보험을 추가로 들고, 보약도 좀 먹고, 운동도 좀 하고, 병에 걸리더라도 국민건강보험으로 해결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식으로. 그러나 지금은 다 같이 살거나 다 같이 죽는 상황이다. 전 인류를 ‘운명공동체’로 엮어버리는 대역병 앞에서 개별적인 대응책은 힘을 못 쓴다. 현재 한국에서 새로운 의료 정책들이 제시되고 그에 대한 찬반의 진통을 겪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치 앞도 볼 수 없게 된 시대, 의(醫)에 열린 새로운 길의 여명을 나는 쿠바에서 본다. 카리브해 섬에 팬데믹의 여파가 본격적으로 밀려오자 쿠바의 의료진들도 혹독한 고생길을 걸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8월에 쿠바가 봉쇄 정도를 완화했다가 바이러스가 재유행하면서 다시 비상사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 9시마다 의료진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전 국민 박수치기 캠페인이 진행된다. 헌데 그게 전부다. 이 외에는 딱히 다른 언표가 없다. 의료진들의 뼈를 깎는 노력에 비하면 영웅 서사가 너무 심심하다.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의료진의 활약이 새삼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쿠바에서 의사와 간호사란 원래 그런 존재들이다. 쿠바의 모든 마을은 가족주치의가 머무는 진료소를 중심으로 안정감을 찾는다. 팬데믹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의료진들은 사회의 기본적인 안정망을 구축하며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 그래서 쿠바 사회에서 한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로 완벽한 인간상은 ‘의사’다. 이왕 살게 된 인생, 지성을 갖추고 타인도 도우며 명예와 보람을 만끽하고 싶은 젊은이라면 대부분 의학에 뜻을 둔다. 고생길은 보장되어 있지만 이보다 더 자존감 높은 직업은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쿠바 의료진의 영웅심이 쿠바 정부의 세뇌로 만들어졌다고 믿는다. 월급을 겨우 15만원 받으면서 그 누가 헌신을 자처하겠는가? 미국은 심지어 쿠바 의료진이 ‘국가의 노예’로서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깊은 오해다. 당사자들은 물론이요, 쿠바의 전 국민이 의료진의 처우가 대폭 개선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의사들이 바라는 것은 의식주를 걱정 없이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월급 인상이다. 다른 국가의 의사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면서 그들과 똑같은 라이프스타일로 사회특권층에 진입하고 싶은 게 아니다. 무엇보다 헌신은 진심 없이 타인의 강요만으로 나올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이런 오해가 내게 가르침을 베푼 의대 교수님들께 모욕이 될까 두렵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쿠바 의사는 정녕 철인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직접 만나보면 영웅의 아우라는 온 데 간 데 없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비장한 사명감으로 마음을 불태우지도 않고, 거창한 말로 명예를 찾지도 않고, 의사라는 자존심이나 자의식도 없는 것 같다. 환자와 의대생과 허물없이 어울릴 때는 동네 아줌마 아저씨 같다. 그렇지만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흰 가운을 입고, 어김없이 자리를 지킨다.

▲쿠바 아바나 시내의 거리 ⓒ프레시안(박세열)
▲쿠바의 혁명 기념비 ⓒ프레시안(박세열)
▲쿠바의 옛 국회의사당 ⓒ프레시안(박세열)

도대체 이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쿠바 의사들의 헌신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평범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들은 홀로 지구를 구해야 하는 영웅의 부담을 짊어지지 않는다. 또, 돈이냐 소명이냐 사이에서 고뇌할 필요도 없다. (쿠바에서는 어차피 무슨 직업을 택해도 큰 부자가 될 수 없다.) 단지 ‘다 함께 고생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노력이 타인에게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때 같이 고생하는 사람이란 동료 의사와 간호사들부터 생로병사의 부침을 겪는 주민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주민들은 고생하는 의료진에게 식량과 커피를 준비해주며 나름대로 그들을 돌본다. 또, 이들의 연대감은 시간을 통해서도 흐른다. 앞서 고군분투한 선배 의사들 덕분에 쿠바 의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자신들 또한 의료의 맥을 이어갈 후배들에게 자산을 전해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들의 강인함의 뿌리를 ‘희생정신’이 아니라 ‘동료의식’에서 찾는 게 더 정확하다. 희생이라는 말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버려야한다는 부담감을 지운다. 그러나 동료의식은 고생 속에서 더 많은 사람을 얻는 길이다. 이 평범한 의사들이 일심동체로 실천하려는 과업은 간단하다.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철학이다. 모든 생명은 살고 싶어 하고, 의학은 보편적인 마음에 응답하여 환자를 섬긴다. 빈자와 부자, 남녀노소 누구도 가리지 않고 차별 없이 치료해왔다는 쿠바 의사의 자긍심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아니, 사실 이것은 의사만이 전유하는 자긍심이 아니다. 온 생명이 ‘살고 싶다’는 동일한 마음을 지녔다면, 그런 생명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가치와 윤리가 생겨나는 시작점이 아닌가? 아픈 부모를 간병하는 자식, 병에 걸린 후에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 있는 환자, 전 세계 기아 문제 캠페인에 뛰어든 학생들 모두가 의사의 마음을 가졌다. 의사이자 철학자였던 조르주 캉길렘은 이렇게 말했다. 치료란 전문가의 기술이 아니라, 박테리아마저도 지향하는 생명의 본능이자 가치라고.

코로나바이러스가 안겨준 교훈은 우리는 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병의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물론 전 인류를 바이러스로부터 한 번에 괴리시킬 초능력은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생사가 하나라는 말은 곱씹을수록 오묘하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생명의 길은 열린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인간의 발목을 잡지만 그로써 지구의 생태계를 혁명적으로 치료한다. 전 세계 공장이 멈추자 호흡기질환을 앓던 사람들이 치유되고 있는데, 그 숫자가 바이러스로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더 많다.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방치되었던 사람들 역시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사회 안전망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렇게 모두가 얽혀있는 판 속에서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남아있다. 하나는 죽음과 쇠퇴에 대한 근시적인 두려움이다. 보균자일지 모르는 타자를 배제하는 흐름, 힘들어진 생계전선 속에서 밥그릇 싸움이 나타난다. 또 하나는 새로운 삶에 대한 장기적인 열망이다. 바이러스를 예방하면서도 과거와 현재의 고립 모두를 최소화하는 새 네트워크를 짜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후자가 전자보다 더 강성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전 세계 의사들이 감염의 위험을 감수하고 환자를 돌보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헌신하는 까닭은 자기 목숨을 희생해도 좋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환자를 살려서 그 사람과 같이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뚫고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런 동료의식이다. ‘다 함께 살아야한다’는 평범한 사실이 폭 넓은 공감을 얻어야 한다.

이것은 의(醫)가 가진 의의를 일상생활 속으로 퍼뜨리는 길이기도 하다. 위기가 왔을 때 언제나 의사 개인의 영웅적인 행위에 기댈 수 없다는 지적은 옳다. 그렇다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의료의 장벽을 낮추는 것이 해결책이다. 지방에는 더 많은 병원이 필요하다. 병원의 재정적인 자립이 어렵다면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라도 시골의 병원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 또, 의료 영역을 병원 밖으로 확장시켜서 일상생활과 접촉면을 늘려야 한다. 보건지소가 중심이 되어 재가복지에 의료진들의 왕진 활동이 더해지거나, 각 동네마다 예방의학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예시가 될 수 있다.

개개인들이 해야 할 일도 있다. 방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요, 의료보험료 증진 같은 문제에 대해서 공론의 장을 활짝 열어야 한다. 같은 사회에 사는 타인의 고통에도 더 민감해져야 한다. 몸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의사지만 고립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모두의 몫인 까닭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생사의 의미를 탐색할 정신의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역병이 낳은 긴장감은 인간의 생이 대자연에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기를, 그리고 죽음의 순간을 먼 훗날 병원의 문턱에만 맡겨두지 않기를 종용한다. 사유의 자극은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준 선물이다.

사유는 단선의 감정이 가라앉은 후에 찾아온다. 지난 봄, 우리 학교에서 뻬스끼사(문진)에 참여한 외국인 의대생은 나를 포함해 일곱 명 뿐이었다. 먼 타국에서 가족도 없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친구들의 손발을 묶었다. 나 역시 두려웠으나, 종국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더 큰 병이 되었다. 방역의 대상자인 주민들이 오히려 연고 없는 곳에 발 묶인 나에게 살 힘을 주었다. 그 삼 개월 동안 몇 번 생각했다. 나는 혼자서는 아무 존재도 아니며, 주민들 없이는 의학도 없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 없이는 온전한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의사’를 목표로 ‘의료’를 배우려는 ‘의대생’일지 모른다. 그러나 의(醫)는 의-관료, 의-대학, 의-기술의 이름 속에 갇히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범람하는 잡초, 야초 같은 일상 속에서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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