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출범한 국제노동기구(ILO)는 1차 대전과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산물이다. 출범 시 ILO는 산업 평화를 비롯한 항구적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 첫걸음으로 1919년 가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창립대회에서 하루 8시간과 주 48시간을 규정한 ILO협약 1호(일하는 시간의 규제, Regulation of Hours of Work)를 채택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91년 국제노동기준의 비준과 준수를 다짐하며 ILO에 가입한 대한민국 정부는 "사회 정의 없이 평화 없다"는 ILO 헌장을 비준했고 그 후 30년 동안 (ILO 190개 협약 중) 29개를 비준하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하루 8시간과 주 48시간을 규정한 1919년 1호 협약에 대한 비준은 아직도 맹렬하게 거부하고 있다.
'전태일'만 남고 '근로기준법'은 사라져
1953년 한국전쟁 와중에 만들어진 근로기준법은 제정 당시부터 '하루 8시간'과 '주 48시간'을 못 박았지만, 이 조항은 아직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1970년 11월 스물두 살 대구 촌놈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자신을 불살랐지만, 50년이 지나도록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전체의 과반에 육박한다. 근로기준법은 실현되지 않고 '열사'로 화석화된 전태일만 기억될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실에서 일하던 노무현 정권 때 근로기준법이 바뀌어 표준 근로시간이 주 40시간으로 단축되었지만, 노동자들의 일하는 시간은 줄어들지 않았다. '주 40시간제'가 '주 5일제'에 날치기당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이 도입한 주 5일제의 핵심은 1주를 이루는 이레(7일) 가운데 닷새는 일하고 이틀을 쉰다는 게 아니었다. 황당하게도 근로기준법의 시간 조항은 1주일의 이레 가운데 닷새만 적용되고 나머지 이틀은 법 적용을 받지 않으므로, 그 이틀 동안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착취해도 된다는 해석이 허용되었다. 법을 바꾸는 권한은 국회가 행사했지만, 법을 해석하는 권한은 관료들이 행사했다. 관료들은 '행정 해석'을 통해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헌법이 부여한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대통령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지만 주 5일제에 대한 행정 해석은 철폐되지 않았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명령하고, 장관이 해당 관료에게 지시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헌법이 보장한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는 대신에 자신의 책임을 국회에 미루었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국회는 근로기준법에서 말하는 한 주는 이레, 즉 1주일이 7일이라는 것을 확인한다는 내용의 법 개정을 통해 '주 5일제' 해프닝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하여 이제 근로기준법이 말하는 표준 시간이 하루 8시간과 주 40시간으로 정착되는가 싶었는데, 사태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연장근로 12시간을 더하여 '주 52시간'이 표준이라는 주장이 언론을 도배했다.
미래통합당은 '주 40시간 + 연장근로 12시간 + 법 적용이 안 되는 이틀 동안의 16시간'을 합친 '주 68시간'으로 회귀하지 않으면 국민경제가 망한다고 징징댔다. 한국노총 출신 '노동 귀족' 임이자 의원이 고달픈 노동자들의 삶을 더 고달프게 만드는 데 앞장섰다.
'변호사' 한계에 갇힌 문재인
이로써 이승만 정권이 도입한 주 48시간제(연장근로 12시간 허용)는, 노태우 정권의 주 44시간제(연장근로 12시간 허용)와 노무현 정권의 주 40시간제(연장근로 12시간 허용)를 거쳐, 문재인 정권의 주 52시간제(표준 40시간+연장 12시간)로 귀착되었다.
근로기준법의 표준시간 문제에서 보인 소심함에서 잘 드러나듯 문재인 정권의 '노동 존중'은 그 말의 화려함에 비해 실속의 부실함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실패가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실패에서 연유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경로를 밟고 있는 문재인 정권이다.
보수적 자유주의 정권으로서 문재인 정부가 가지는 구조적 한계는 이미 예견한 바고, 이에 더해 법률가 출신이라는 대통령 개인의 한계도 중요하게 작용하는 듯 하다. 법률(만능)주의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ILO협약 비준 손 놓은 '노동 존중' 여당
'자유민주적' 노사관계의 입구를 여는 ILO협약 87호(사용자단체와 노동자단체에 대한 결사의 자유 보장, 1948년 채택) 비준 문제도 마찬가지다. 집권 4년 차에 접어드는 올해 들어서야 겨우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에 올라가 있다.
이 협약의 의미는 사용자(자본가)들에게만 보장해온 결사의 자유를 노동자들에게도 보장하는 데 있다. 이를 통해 노동조합법을 노동조합 활동을 억제하는 법이 아닌, 노동조합 활동을 증진하는 법으로 바꾸는 것을 뜻한다.
180석에 육박하는 거대 여당이 출현한 지 넉 달이 넘고, 새 국회가 출범한 지 두 달이 넘어가지만 87호를 비롯하여 대통령이 국회에 보낸 ILO 협약 29호(강제노동 금지, 1930년 채택)와 98호(단체교섭권 보장을 위한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 금지, 1949년 채택) 비준은 감감무소식이다.
ILO가 '기본 협약(Fundamental Conventions)'이라 부르며 회원국 정부의 비준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나라에서 이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29호, 87호, 98호 협약들은 특별한 게 아니다.
식민 잔재 청산과 민주주의 토대
1930년 채택된 29호가 말하는 강제노동(forced labour) 금지는 '식민지 노예 노동을 자유로운 임금 노동으로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 한일 간에 쟁점이 되고 있는 근로정신대,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가 여기에 속한다. 국가가 전쟁이나 경제발전 등의 명목으로 민간인을 동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1948년 채택된 87호가 말하는 결사의 자유(the freedom of association)는 노동자의 권리가 아니라 사용자(자본가)들에게도 적용되는 일반적 시민권이다. 사용자든 노동자든 자신들이 알아서 단체를 만들어야 하며, 거기에 국가권력이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밥그릇 지키기 위해 의사들은 자유롭게 하는 파업을 헌법에 파업권이 명시된 유일한 직업군인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헌법이 말하는 자유가 만인(萬人)이 아니라 만명(万名)에게만 적용되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평평한 운동장'의 출발점인 단체교섭권
노동자를 위한 단체교섭권(the right to collective bargaining) 보장의 내용으로 1949년 채택된 98호를 읽어보면 의외로 단체교섭이 무엇인지에 대한 조항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노동자들이 단체교섭권을 보장받기 위해 사용자가 지켜야 할 의무인 반노조 차별 행위(acts of anti-union discrimination) 금지, 즉 부당노동행위 금지가 무엇을 뜻하는지가 명시되어 있다.
이전 칼럼에서 썼듯이(☞관련 기사 : 뉴딜? 문재인과 루즈벨트의 결정적 차이점), 1930년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이 전임 후버 대통령의 정책과 독보적으로 달랐던 것은 사회운동가 출신인 프란시스 퍼킨스 노동부 장관과 손잡고 밀어붙인 사회보장 도입과 노동 개혁이었다.
1935년 전광석화처럼 의회를 통과해 시행된 전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의 핵심은 노동자를 위한 결사의 자유(파업권 포함)와 단체교섭권 보장이었다.
문재인의 '퍼킨스'는 누구인가?
루즈벨트-퍼킨스 '콤비'는 1938년 시행된 공정노동기준법(Fair Labor Standards Act)도 만들어냈다. 이 법은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의 기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원안은 주 40시간이었으나, 의회 내 논의를 거치면서 민주당 우파와 공화당의 합작 공격으로 주 44시간으로 통과되었다.
법정 표준인 주 44시간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동부 안에 '임금시간국(Wage and Hour Division)'이 설치되었다. 대한민국 관료들처럼 '연장근로' 꼼수를 부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법에서 정한 주 44시간 표준을 공장과 사무실에 관철시키기 위해서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뤄진 87호 협약과 98호 협약 채택에는 미국이 앞장섰다. 1940년대 국제사회는 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노사 단체 활동과 단체교섭권 보장을 통한 노동자의 경영 참여가 필요하다는 정신으로 충만해 있었고, 지금과 달리 당시 미국 정부는 ILO가 만드는 진보적 정책의 든든한 후원자로 활약했다.
김종인의 조부 김병로와 그의 스승 아데나워
정부와 여당이 내세웠던 '노동 존중'이 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국회에 상정된 ILO 기본협약(29호, 87호, 98호) 비준이 시급하다. 노동 존중이 말만 요란한 속 빈 강정 꼴을 모면하려면 여당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좌고우면하지 말고 오는 정기국회에서 협약들을 통과시켜야 한다.
ILO 기본협약 비준은 통합당이 말하는 '경제 민주화'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경제민주화' 한다는 나라치고 ILO 기본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유학한 독일이 대표적이다.
김종인의 조부인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1888-1864)와 김종인의 이념적 스승인 초대 독일 연방총리 콘라트 아데나워(1876~1967)에게 물어보아도 필자와 같은 말을 할 것이다.
ILO 협약 1호 비준이 시급하다
'노동 존중'이든 '경제민주화'든 그 핵심은 노동자들의 삶을 좀 더 인간답게 해주는 데 있다. 이는 코로나 19로 인한 경제 위기에 대응한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공유로 이어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근로기준법이 정한 법정 표준인 주 40시간을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필자는 1919년 제정된 하루 8시간 주 48시간을 규정한 ILO협약 1호의 비준을 제안하려 한다. 이명박 정권 때인 2011년 11월, 대한민국 정부는 주 40시간을 규정한 ILO협약 47호(1935년 제정)를 비준하였다. 187개 ILO 회원국 중에서 15개국만이 비준한 47호는 내년이면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지 10주년을 맞게 된다.
주 40시간 협약(47호)도 비준했는데 주 48시간 협약(1호)을 비준 못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더군다나 '노동 존중'을 공약한 여당과 '경제민주화'를 약속한 야당이 장악한 21대 국회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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