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정치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것은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의 출생 의혹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하 직함 생략)은 2011년 4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케냐 출생 유학생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바마의 '국적'을 문제 삼고 나섰다. 오바마의 출생지가 미국이 아닌 케냐가 아니냐면서 출생증명서를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헌법에서는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만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이미 4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재선에 도전하는 오바마에게 트럼프가 난데없이 '출생 의혹'을 들고 나온 것은 명백히 인종차별적 문제제기였다. 트럼프가 물꼬를 튼 인종주의적 정치 공세는 극우주의자들 사이에서 확산 됐고 오바마는 처음에는 대응하지 않다가 결국 다음달 자신의 출생증명서를 공개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이 증명서가 '가짜'일 수도 있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트럼프의 오바마 출생 의혹 제기를 거론하고 나서자 그제서야 트럼프는 "오바마는 미국에서 태어난 것이 맞다. 축하한다"며 의혹 제기를 멈췄다.
13일(현지시간) 트럼프 재선캠프 관계자가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캘리포니아)의 '국적 의혹'을 제기하고 나선 것은 과거 트럼프가 촉발시킨 인종주의적 음모론을 상기시킨다. 당시 오바마가 출생증명서를 공개한 이후에도 케냐에서 태어났다고 믿는 인종주의자들을 부르는 '버서(birther)'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복스>는 이날 트럼프 캠프의 법률 자문인 제나 엘리스가 해리스의 국적 의혹을 제기한 법대 교수의 칼럼을 리트윗한 사실에 대해 보도하면서 "해리스의 시민권에 대한 공세는 트럼프 캠페인의 '버서리즘' 각본에서 나왔다"고 비판했다.
엘리스는 "해리스가 출생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존 이스트먼 채프먼대 법대 교수가 쓴 글을 리트윗했다. 해리스는 자메이카 출신인 아버지와 인도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해리스의 시민권 자격 논란은 오바마 사례와 마찬가지로 억지에 불과하다. 해리스의 부모가 모두 이민자라 하더라도 해리스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출생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국적 취득에 있어 '속지주의'를 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외교관 출신 자녀 등 일부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해리스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해리스가 시민권자가 아닐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백인'이 아니면 누구나 '미국인'임을 의심해봐야 한다는 백인우월주의에 기반한 것이다. 오바마의 출생을 둘러싼 의혹 제기로 신조어까지 만들어진 이유는 지금도 트럼프 캠페인에 가면 오바마가 '케냐인'이라고 믿는 다수의 트럼프 지지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해리스의 '출생 의혹'은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며, 트럼프 캠프 관계자가 이런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인종주의를 끌어들여 보수적인 백인 유권자들을 결집시키기 위한 목적이다.
바이든 캠프 엔드류 베이츠 대변인인 이날 오후 논평을 내고 "트럼프는 오바마에 대한 기괴하고 인종차별적인 '버서 운동'의 리더였으며, 대통령 임기 내내 인종차별을 부추기고 나라를 분열시키려 했다"며 "트럼프 캠프의 이런 주장이 놀랍지는 않지만 혐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해리스 국적 의혹 제기한 변호사 두둔..."사실이라면 심각한 얘기"
트럼프도 이날 오후 기자회견에서 엘리스의 의혹 제기에 대한 질문에 "그는 매우 뛰어난 자격을 갖춘 변호사"라면서 의혹을 부추겼다. 트럼프는 "나는 자세한 내용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해리스를 부통령 후보로 선출하기 전에 민주당원들이 그것을 확인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그건 정말 심각한 얘기다. 해리스가 (부통령)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까. 나도 방금 들었기 때문에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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