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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오거돈·박원순 사건, '민주당 권력집단 됐다' 시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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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오거돈·박원순 사건, '민주당 권력집단 됐다' 시그널"

[기고] 박원순 시장의 죽음이 남긴 과제

박원순 서울시장이 실종 신고 7시간여 만에 숨진 채 발견됐고, 전직 여비서가 성추행 혐의로 박원순 시장을 고소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후 조문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혹은 서울특별시장(葬)이 적절한 것인지 등 여러 가지 논쟁이 뒤를 이었다. 심지어 박원순 시장 극렬 지지자들은 성추행 피해자를 비난했고, 심지어 '이순신 장군도 관노와 잠을 잤다'는 시대착오적인 주장까지 했다. 이 글은 이 같은 다툼을 재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으로 촉발된 논쟁 중에 정작 언급되지 않은 우리 정치제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박원순 시장의 지지자들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혁신에 노력했던 시민운동가로서의 업적이 성추행 문제로 훼손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은 그 자체로 틀렸다. 박원순 시장이 압제자들에 저항했던 위대한 시민운동가였던 것처럼, 그 또한 그 여비서에 대해 '또 다른 압제자'였던 것이다. 그의 업적이 위대했던 것만큼, 그의 과오 또한 엄격하게 평가되어야만 한다.

어떤 네티즌은 "안희정과 박원순의 공통점은 여자 비서다. 여성의 일관된 주장이 진실이 되는 더러운 세상에서는 '펜스 룰(Pence Rule)'만이 답이다"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여성 비서를 고용하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펜스 룰은 성폭력 사건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적반하장의 비뚤어진 대책이다. 피해자이자 고소인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직에서 배제된다면, 직업선택의 자유가 성별에 의해 침해되는 위헌적인 결과에 이르게 된다.

성추행은 "운동권의 속성"일까?

안희정 전 충남지사·오거돈 전 부산시장·박원순 서울시장 사건까지 권력자의 성추행 사건이 잇달아 일어난 데는 구조적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지자체장 출신의 한 미래통합당 의원은 "권력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좌파의 특성" 때문이라면서 "소속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문화 속에서 이런 문제들을 '쉬쉬'하는 경향이 존재했다"고 했다. 또 다른 통합당 의원도 "민주당에서 지자체장뿐만 아니고 국회의원들도 이 같은 일이 계속 발생하고 있지 않냐"며 "반대로 과거 많은 지자체장들이 있었지만 이런 현상이 없지 않았냐. 이것은 지자체장의 속성이라기보다 운동권의 속성"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한때 '성누리당'이라는 비난을 받은 새누리당(미래통합당의 전신)의 수많은 성폭력 스캔들을 간과한 주장이다. 안희정·오거돈·박원순에 이르는 작금의 사건은 '성누리당'의 성폭력 사건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기초한 사건이며, 오히려 우리 사회의 주류 권력 집단이 민주당으로 전환되었다는 시그널로 봐야 한다.

'제왕적 지자체장'의 권력

안희정·오거돈·박원순 사건은 피해자에 대해 인사권을 가진 지자체장에 의한 범행인 탓에 성폭행 피해가 장기간 지속되었고,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기 어려웠으며 알렸더라도 쉽게 은폐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지자체장이 해당 지자체에 관한 독립 예산권과 각종 인허가권을 가지며 전체 공무원의 승진이나 보직에 관하여 일체의 인사권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제왕적 지위로 피해자들은 장기간 피해를 당했으며 가해자들은 자신의 범행에 무뎌졌다.

혹자는 야당의 무력함을 이유로 꼽기도 한다. 2018년 지방선거 이후 부산시의회 47석 중 민주당이 41석을 차지했는데, 통합당은 5석, 무소속은 1석뿐으로 민주당이 부산시의회 의석의 87%를 차지했다. 서울시의회 역시 110석 중 102석(전체의 92%)을 민주당이 차지했다. 통합당은 6석, 정의당 1석, 민생당 1석뿐. 그러나 이는 권력 구조에 대한 무지가 아닐 수 없다. 설령 야당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해서 '제왕적 지자체장'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조례 제정이나 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대상이 아니라면 야당이 지방정부를 견제할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런 제왕적 체제를 어떻게 견제할 수 있을까? 지금의 문제는 우리가 '1명의 개인'에게 모든 권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제왕적 지자체장'의 문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동전의 뒷면이기도 하다.

대통령제에서는 통치의 주체가 대통령 1인이며, 애초부터 '대통령 1인의 전횡(專橫)'이 헌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의원내각제의 수상과 대통령을 사실상 동일시하며, 수상은 의회가 간접적으로 선출하기 때문에 오히려 대통령제가 더 민주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원내각제에서는 대통령제에서와 같은 제왕이 존재하지 않으며, 수상은 합의체로서의 내각을 대표할 뿐이다. 독일연방기본법 제65조를 보면 제왕적 대통령제와 극명히 다른 의원내각제의 작동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독일연방기본법 제65조(책임)

연방수상은 정책 계획을 결정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진다. 각 연방장관은 이 지침 내에서 그 소관 사무를 자주적으로 그리고 자기 책임 하에서 처리한다. 연방장관 간의 의견 차이에 관하여는 연방정부가 결정한다. 연방수상은 연방정부가 의결하고 연방대통령의 재가를 얻은 직무규칙에 따라 사무를 처리한다.

독일연방의 장관은 수상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주적으로 자기 책임 하에서 소관 사무를 처리할 수 있으며, 그 사무가 중첩되어 연방장관 사이에 조정이 필요할 때에는 내각 전체가 협의해서 연방정부의 이름으로 결정한다.

같은 맥락에서 제왕적 지자체장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의 지방정부를 의원내각제로 바꾸는 것이다. 지방의회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고 지자체장은 단지 내각을 통할하고 대표하게 함으로써 제왕적 체제를 근절시킬 수 있다.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중앙정부를 의원내각제로 개조한 후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이 같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고민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파도

청년 시절 심원한 민주주의 투사가 욕망에 빠진 노년의 지배자로 타락한 모습에, 민주주의를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에 비유했던 로베르트 미헬스(Robert Michels)가 떠올랐다. 로베르트 미헬스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사회학>(<정당론>(김학이 옮김, 한길그레이트북스 펴냄)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됐다)이라는 그의 저서 마지막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들은 영광의 투쟁기와 불명예스럽게 지배에 참여하는 시기를 겪은 뒤에, 마침내 다시 구(舊)지배계급 속으로 흡수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내건 새로운 자유의 투사들이 또다시 등장한다. 청년의 치유할 수 없는 이상주의와 노년의 치유할 수 없는 지배욕 사이의 가공스러운 투쟁은 그렇듯 끝없이 이어진다. 언제나 새로운 파도가 언제나 똑같은 바위에 부딪힌다. 이것이 정당사의 심원한 서명(署名)이다."

어떤 사건을 단순히 한 개인의 돌발적인 일탈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 안에 있는 구조적 문제를 파헤치고 이를 제도로 승화시켜야 한다. 정치의 발전과 안정은 '정치 제도화'가 얼마나 이루어졌는가에 달려 있다는 새뮤얼 헌팅턴(Samuel Phillips Huntington)의 지적을 새겨야 한다.

아울러 정치 발전의 척도로서의 정치 제도화란 '정치 조직과 절차가 가치와 안정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제도와 유리된 형이상학적인 정치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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