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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70주년…광주의 유일한 전적지 ‘옛 산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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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70주년…광주의 유일한 전적지 ‘옛 산동교’

광주북부의 진·출입로 방어위해 폭파했다 일부 복원 후 2011년 현충시설 지정

6.25전쟁기간 광주지역은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던 지역은 아니었으나 호남지역에서 낙동강 전선인 마산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방어 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특히 광주시 북구 동림동에 자리한 ‘옛 산동교’는 1950년 7월23일 군경합동부대가 북한 인민군의 광주 점령을 막기 위해 첫 전투를 벌였던 광주지역 유일한 6.25전적지로 지난 2011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옛 산동교 교각 ⓒ병무청

1934년 목포와 신의주를 잇는 국도 1호선 일부로 건설된 폭 6m, 길이 228m의 ‘옛 산동교’는 물자 등 수송을 위해 철근콘크리트로 건설되었고 이후 광주 북부의 진·출입 통로 역할을 해왔다.

전쟁초기 호남의 방어부대인 5사단 20연대가 전선으로 긴급히 이동됨에 따라 잔류 병력과 학도병 등으로 지역방어를 담당할 26연대가 편성되었는데 병력 규모가 1개 대대에 불과했다. 이 외에 전남경찰국 소속 경찰부대도 있었으나 역시 북한군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7월23일 새벽 4시,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인민군의 광주 진격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국군은 당시 장성 등 북쪽에서 광주 진입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전략적 요충지였던 ‘옛 산동교’를 폭파했고 이 곳에서 인민군과 군경합동부대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다.

▲옛 산동교 전쟁의 흔적 ⓒ병무청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에 맞서 2.3인치 로켓포 등을 사용해 1시간 여 동안 전투를 벌였으나 부족한 병력과 열악한 장비 등으로 강물을 넘어온 인민군의 탱크와 화력 앞에 광주 방어는 사실상 실패했고 국군은 보성을 경유 순천으로 후퇴했다.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낙동강전선에서 악전고투하던 전남경찰부대가 10월1일 마산에서 부대를 재편성한 후 미군 1개 소대와 함께 전남지역 수복작전을 감행해 광주에 10월 3일 진주했다.

하지만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과 좌익분자들이 군경과 주민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는 등 저항했으나 10월15일 국군 11사단 20연대가 광주에 들어와 인민군 잔당세력을 소탕함으로써 광주의 치안이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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