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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교체와 국가(國歌) 제정에 관한 백가쟁명(百家爭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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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애국가 교체와 국가(國歌) 제정에 관한 백가쟁명(百家爭鳴)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14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지금 우리 애국가에는 두 가지 은폐된 진실과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이 있다. 은폐된 진실의 하나는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가 심각한 수준의 친일파이자 친나치 부역자로 그러한 사실을 우리 국민들에게 철저히 숨겨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애국가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임에도 끝까지 감춰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은 애국가 작사자 문제이다. 세간에는 윤치호 작사설이 우세하지만 임진택 씨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문화운동가이자 창작판소리 명창인 임진택 씨는 "안익태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치"이지만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노랫말은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위대한 가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부터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 정기를 되찾고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한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련 기사 : "친일파 애국가 대신 '아리랑 애국가' 불러야 할 때")


다음은 연재 순서.(편집자)

1.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

2. 애국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3. 안익태의 두 얼굴 - 애국가 작곡 : 친일·친나치 행각

4. 하나씩 벗겨진 안익태의 거짓말

5.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6. 애국가 작사자 논쟁 –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7.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 활동의 전말(顚末)

8.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物的)증거에 대한 검토

9.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 전문증거(傳聞證據)에 대한 검토

10. 애국가의 원형 '무궁화노래'의 진실

11. 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12. 애국가 노랫말에 담긴 뜻 – 애국가 시상(詩想)

13.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지난번 글 마지막에 나는 다음과 같이 천명(闡明)하였다.(☞ 관련 기사 :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안익태 애국가 곡조는 민족의 수치이지만,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노랫말은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위대한 가사로 평가받아야 한다.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가사는 살리고 곡조는 바꿔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우리 애국가를 아리랑 곡조에 맞추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를 제안한 바 있다.

그런데 내가 제안하는 '아리랑 애국가' 이전에, 해방 이후 70여 년 동안 수많은 학자 지식인들에 의해 애국가 교체 또는 국가(國歌) 제정에 관한 백가쟁명(百家爭鳴)이 있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아리랑 애국가'가 왜 필요하고 어째서 적합한지 설명하려면 먼저 그 백가쟁명에 대한 소개가 필요한 바, 이번 글은 그동안의 애국가 교체 및 국가(國歌) 제정에 관련하여 있었던 여러 논쟁에 할애하고자 한다.

1. 해방 직후의 애국가 교체 및 국가(國歌)제정 논쟁

1) 1945년 말 '새로운 애국가' 공모사업의 이면(裏面)

해방이 된 지 얼마 안 된 1945년 12월, 도하(都下) 유력신문인 <동아일보>는 상당한 액수의 당선작 사례금을 걸고 '새로운 애국가'를 모집한다는 공고(公告)를 냈다. 같은 시기 <중앙신문>이라는 진보계열 신문에서도 음악가협회와 문학동맹 공동주최로 애국가 현상모집 공고가 났다.

해방공간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열망이 한층 고조된 시점에 나온 좌·우 진영의 이 '새로운 애국가' 공모사업에 대해 잠시 돌아보기로 하자.

<동아일보>가 계획한 '새로운 애국가' 공모사업의 취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해방된 우리 강토 해방된 우리 민족 그리하야 광복될 우리의 신국가(新國家)를 사랑하는 새로운 애국가를 천하에 구한다. 시공을 통하여 자별(自別)한 우리의 전통과 긍지, 향기와 정조를 새로운 이념으로 재인식하고 새로운 각도로 재음미하여, 국가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축복하는 새로운 국가(國歌)를 우리는 힘껏 마음껏 부르고 싶다. 가슴속에서 뼛속에서 울어나오는 감격의 노래를 하루바삐 부르고 싶다. 그리하여 해방된 삼천리 강산과 해방된 삼천만 심금(心琴)의 선율 위에서 무궁한 해조(諧調)를 누리게 하자.

응모 규정 :

○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애국가가 한말시대부터 있었으나 이는 가사나 가곡이 새 시대에 맞지 않는 점이 있으므로, 종래의 애국가에 구애(拘碍)치 말고 새로운 호흡으로 창작할 일.

○ 1인 1수(首)에 한하되 2절 이상 4절까지 잇도록 할 일.

○ 문체와 격조는 수의(隨意)로 하되, 실내악으로나 행진곡으로나 작곡에 의하여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일.

○ 애국가의 주제와 정신은 별항 전문(前文)과 같거니와, 특히 씩씩하고도 명랑하고 웅건하고도 경쾌하야,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누구나 어디서든지 부를 수 있을 일.

한편 진보계열 신문인 <중앙신문>이 후원한 '애국가 현상모집' 공고를 보면 '애조를 피할 것' '진취적이고 건설적일 것' '민족의 유구성이 있는 웅장한 리듬일 것' 등의 응모 규정이 나와 있어 '동아일보'의 응모 규정과 기본적으로는 유사하면서도, 사회주의적인 지향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 자료1. <동아일보> 1945년 12월 15일 자 '애국가 모집' 공고와 <중앙신문> 1946년 1월 17일 자 '애국가 가사 현상모집' 공고.



그런데 이렇듯 언론사들이 나서서 계획한 '새로운 애국가' 공모사업을 보면 그 취지와 명분이 대단히 훌륭함에도 여기에 뭔가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이 같은 '새로운 애국가' 공모사업이 좀 뜬금없이 나왔다는 느낌 때문이다. 정부수립도 아직 되지 않았고 정세가 불투명한 시기에 좌·우 진영이 왜 갑자기 '애국가'를 선점(先占)하고자 나섰을까?

'새로운 애국가'라는 개념이 성립하려면 그에 대조되는 '낡은(?) 애국가'가 전제되어야 할 것인데, 이들 공모사업은 그동안 온 국민이 가슴 깊이 간직해 왔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가(國歌)에 준하여 열렬히 불러왔던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를 과거의 '낡은 애국가'로 돌리고, 새 시대 새 나라의 이념을 담아낼 '새로운 애국가'가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동아일보사가 추진한 '새로운 애국가' 공모사업 응모 규정에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를 '낡은 애국가'로 치부(置簿)하고자 하는 전제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내가 받은 느낌은 이 '새로운 애국가' 공모사업의 이면(裏面)에 사실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로 표상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나간 '낡은 정부'로 취급하려는 의도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동아일보>와 <중앙신문>의 '새로운 애국가' 공모사업은 표면적으로는 문화사업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을 관철하려는 숨은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

돌이켜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 일행은 1945년 11월에 환국했으며, 이 시기 미(美) 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국내의 정치정세는 크게는 미·소 점령하에 남북으로 갈려져 있는 터에, 남한사회는 별도로 좌우 이념 투쟁이 극심했으며, 우익 안에서도 친미·친일 세력과 민족자주 세력의 대립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공산계열이든 우파 계열이든) '새로운 애국가'를 주장하며 '동해물과 백두산' 애국가를 격하(格下)시키는 것은 결국 '동해물과 백두산' 애국가로 표상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격하시키는 정치적 효과를 노리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45년 당시에 국내에서 불리던 '동해물과 애국가'의 곡조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이었다. 안익태가 작곡한 곡조는 1945년까지 미주 동포들 사이에서만 보급되어 있었고, 1940년 이후 안익태 곡조 사용을 승인한 임시정부와 광복군 안에서도 정작 안익태 곡조는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었으며, 더욱이 국내에는 안익태 곡조가 아직 도입조차 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동아일보>와 <중앙신문>이 교체(交替) 또는 배제(排除)하고자 했던 '낡은 애국가'란 실제로는 ''올드 랭 사인'으로 불리어온 '동해물과 백두산' 가사의 애국가'를 가리킨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이들 '새로운 애국가' 공모사업들은 용두사미(龍頭蛇尾) 격으로 그 후 당선작 발표도 없고 또 '새로운 애국가' 선정(選定)에 관한 어떤 후속 보도도 없이 흐지부지 무산(霧散)되고 말았다.

2) '동해물과 애국가'에 대한 사회주의 계열의 비판

'동해물과 애국가'에 공식적으로 처음 비판을 제기한 사람은 해방공간(1946년) 시기의 음악평론가 박영근이다. 그는 '동해물과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거나 거론치 않고 가사 내용 자체를 갖고 비판했으며, 또한 곡조에 있어서도 남의 나라 민요를 차용한 것을 여지없이 비판하면서 새로 알려진 안익태 곡조까지 싸잡아 함께 비판하였다.

박영근의 시평(時評)을 통해 '동해물과 애국가'에 대한 당시 사회주의 계열의 시각을 한번 점검해보자.

대저 새 시대의 조선사람에게 하나님 타령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망국적 애조(哀調)의 곡보(曲譜)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우리 인민의 참다운 애국의 부르짖음이 없는 곳에 무슨 애국가가 있고, 우리 인민의 참다운 애국의 행진이 없는 곳에 무슨 애국 선율이 있을손가?

참으로 조선인민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애국의 정조, 애국의 선율 여기에 있어서만 새 시대의 애국가는 창조되어질 것이다.

주1) 박영근, 악단시평, <인민> 제1권 제2호, 인민사, 1946, 107쪽(<역사비평> 1994년 여름호, 40쪽, 노동은 교수의 글 '애국가 가사는 언제, 누가 만들었나'에서 재인용)

안익태 씨 곡도 역시 8.15 광복 이전 것이며, 그 멜로디와 리듬에 망명객을 위한 실내적 위무(慰撫) 가치는 있을지 모르나 애국적인 감격이 표현되지 못한 작품이다. 시위 행렬시에 애국부인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마치 전도(傳道)부인들이 겨울밤에 부르고 다니는 처량한 소리 그것임을 들어 알 것이다.

주2) 박영근, 악단의 제문제 – 민족음악 건설을 중심으로, <예술신문>, 1946년 8월 17일(<역사비평> 1994년 여름호, 40쪽, 노동은 교수의 글 '애국가 가사는 언제, 누가 만들었나'에서 재인용)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고 열혈적인 비평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나는 '동해물과 애국가'에 대한 이 같은 일방적 비판들이야말로 오늘날 다시금 비판적 시각에서 점검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해방 직후 평단(評團)에 만연(蔓延)했던 '동해물과 애국가'에 대한 비판은 표면(表面)상으로는 음악성 자체(가사와 곡조)에 대한 불만이지만, 이면(裏面)적으로는 그 애국가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투쟁노선과 정치노선에 대한 정통성 논란에 연계되어 있다.

② 박영근은 '계승된 애국가'와 '제정할 국가(國歌)'를 혼동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특히 '동해물과 애국가'가 어떻게 생성되고 어떻게 파급되었으며, 일제의 병탄(倂呑) 이후 3.1만세운동에서 8.15까지 이 노래가 얼마나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었는가에 대한 역사성과 진실성을 외면하고 있다.

새로운 국가(國歌) 제정이 필요하다면 계승되어온 '애국가'를 놓고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그러한 국가 이념과 시대정신을 담아낼 노래를 별도로 만들면 될 일이었다.

③ 박영근은 특정 종교(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바, 이것은 편향이며 독단이다. '동해물과 애국가'가 애초에 찬미가로 시작된 것은 맞지만, 여타 찬송가와는 다른 '애국찬미가'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고, 민족의 수난 속에 종교를 초월하여 스스로 '애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보해온 노래이기 때문이다. 국가(國歌) 제정 여부와는 별도로 '애국가'의 형성과 계승은 종교적 차별성이나 정파의 차이를 떠나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3) 국가(國歌) 대행으로 자리 잡은 안익태 곡조 '동해물과 애국가'

1945년 이후 1948년의 정부수립 과정에서 '동해물과 애국가' 아닌 새로운 애국가 또는 국가(國歌)의 출현과 제정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사실 해방되기 전 독립투쟁의 과정에서 불렸던 수많은 독립군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광복군으로 직접 활동한 항일음악가 한형석이 작곡한 '압록강 행진곡'이나 '광복군 제2 지대가'같은 노래들은 '애국가'로 승격되어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프랑스나 미국의 국가(國歌)는 바로 그러한 혁명투쟁, 독립전쟁의 과정에서 불리었던 무명(無名) 병사의 곡이 혁명과 독립이 완수된 후 국가(國歌)로 채택된 사례이기도 하다.

한형석 말고도 해방공간에 김순남이라는 탁월한 민족음악가가 있었지만, 그의 정치 성향으로 인해 그가 작곡한 '건국행진곡'이나 '인민항쟁가'는 남쪽에서는 논의되기 쉽지 않았다. 아마도 박영근이 말한 "참으로 조선인민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애국의 정조, 애국의 선율에서 창조된 새 시대의 애국가"가 바로 사회주의 계열 문인(文人) 임화가 작사하고 김순남이 작곡한 '인민항쟁가'같은 노래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겠다. 하지만 분단의 상황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1948년 남과 북이 따로 단독정부를 세움으로써 한반도는 분단이 고착되었고, 북쪽은 김원균으로 하여금 '아침은 빛나라'를 사회주의국가의 새 애국가로 작곡하도록 하여 국가(國歌)로 승격시킨 반면, 남쪽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동해물과 애국가'를 국가(國歌)에 준하는 혹은 국가(國歌)를 대행하는 '애국가'로 존중하여 부르게 되었다.

다만 독립된 민주국가에서 남의 나라 민요 '올드 랭 사인'에 계속 의탁하여 '애국가'를 부를 수는 없는 일인지라, 정부에 의해 '올드 랭 사인'이 안익태 곡조로 교체되는 방안이 추진되었고, 이후 국민들은 안익태를 '세계에 코리아를 알리고 국위를 선양한 애국자'로 자랑스럽게 알고 받아들여 왔던 것이 관행(慣行)으로 굳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만약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각이 들통났더라면 정부가 안익태 곡조를 애국가로 수용했을 리 만무하며, 아마도 '새 애국가' 창작과 국가(國歌) 제정 논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4) 1948년 제헌의회에서 벌어진 국가(國歌) 제정 논란

1948년(단기 4281년) 9월 대한민국 제헌의회에서는 '연호에 관한 법률안 기초의 건'과 더불어 '국가(國歌)와 국기(國旗) 제정에 관한 건'이 안건으로 상정되어 토의되었다가 철회된 사실이 있다.

이날은 대한민국 국회가 막 출범하여 첫 번째 과제로 반민족행위특별법을 난항 속에 겨우 통과시키고 새로운 의안으로 개의(開議)한 날이었다.


▲ 자료2. 제헌1회 61차 국회속기록(國會速記錄), 국회사무처, 1948년 9월 9일.



그날 있었던 '국가(國歌)와 국기(國旗) 제정에 관한 건' 토론 내용 중 국가(國歌)에 관한 내용에 국한하여 주요 부분을 발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균식 의원 :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국가(國家)에는 국토와 국민과 주권에 관한 어떠한 표상이 있습니다. (중략) 헌법 제정시에 국기(國旗)에 대한 명문이 없었던 것은 3.1정신을 계승해서 우리 국호 대한민국으로 하자는 것이 명문에 씌어있는 까닭에 거기에 추수(追隨)되는 태극기가 곧 우리 국기(國旗)로서 따라온다고 하는 것을 시인할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國歌)에 있어서는 일정한 명문도 없이 종래에 우리가 늘 불러오던 애국가가 그대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애국가와 국가는 당연히 다르다고 해석되는 바입니다. 이 애국가의 발족도 전날에 우리 독립을 얻고 주권을 찾으려 할 때에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민족의식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나라를 사랑하며 주권을 그리워하는 애달픈 가사로서 지어놓은 것입니다. 그 계통을 보면 당초에 아주 오랜 서양의 이별곡조였다가 작곡에 있어 자세히 기억 못 합니다마는 '안' 무엇이라고 하는 작곡가의 곡조라고 합니다마는, 그 가사를 보건대 지금 여러 학자나 지식인 문화예술인들이 구시대적인 그런 느낌이 있다고 그렇게 지적들 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정부를 새로 수립하고 만방에 독립을 선언하는 새 나라의 재건에 있어서 반드시 우리는 국가(國歌)를 새로 제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중략) 국가(國歌)는 애국가와 달라서 곡조에 있어서 국가(國歌)를 우리가 제정한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정신을, 즉 우리의 혼탁된 머리를 좀 더 향상할 만한 번뜻한, 예술적으로 모든 부문에 있어서 번뜻한 우리 국가(國歌)를 새로이 창조하자고 하는 그런 말이올시다.

강욱중 의원 : 새로운 신생국가에 새로운 국기(國旗)를 제정해야 된다는 것은 역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국가(國歌)라는 것이, 애국가가 어느 정도 국가화(國歌化)된 이러한 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國歌)라는 것이 한 나라를 상징한다 할 것 같으면 어느 정도 역사성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애국가 우리의 태극기가 어떠한 역사를 가진 것입니까? 우리가 지난날 저 왜정하에 있었을 때 얼마나 쓰라린 생각을 하면서 우리 태극기를 그리워했던 것입니까? 우리의 독립의 소망을 들러메고 만주에서 적탄에 맞아 쓰러졌을 때 언제든지 그의 손에 쥐어졌던 것이 태극기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항상 부른 것이 애국가였던 것입니다. 이 애국가 이 태극기 이것을 버리자는 것은... 어찌 시급해서 이 문제를 들고나온 것입니까?(중략)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금 저 38선 해결이라는 가장 중대한 과업을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38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렵니까?(중략)

이북에서 노래를 만들고 기(旗)를 제정했다고 해서 우리가 국가(國歌)를 혹은 국기(國旗)를 제정한다? 우리가 지금 이북에서 만든 국기(國旗)에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이북에 있는 동포들도 새로 제정한 노래 혹은 기(旗)에 대하여 감격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역시 다같이 태극기 아래 죽으려는 그러한 우리의 태극기와 더불어 나는 반드시 통일이 되리라는 것을 주장하고 이 안에 절대 반대합니다.(중략)

정균식 의원 : 잠깐 보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애국가와 국가(國歌)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40여 년 동안 노예화 민족의 눈물로서 언제나 부르고 싶었고 그리워하던 우리 애국가를 결코 말살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신생국가로서 국가(國歌) 하나 없으니 이걸 만들자고 하는 것이지 절대 애국가를 말살하고 새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이주형 의원 : 저는 국가(國歌)와 국기(國旗)를 제정하고자 하는 이 건의안을 반대하고 싶습니다. 아직 우리들에게는 마(魔)의 38선이 가로놓여 있어서 남에 있는 사람은 북에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북에 있는 사람은 남에 있는 사람을 그리워해 온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나 만들 때에 혹은 어떤 일을 하나 실행할 때에 반드시 북에 있는 사람은 남에 동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고, 남에 있는 사람은 역시 북에도 우리와 같이 피를 받아 난 동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한 이유는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수립하고 동시에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정부조직법을 다 제정했습니다. 허나 그것은 다만 우리가 누구든지 갈망하고 있던 이 38선을 철폐시키는 데에 가장 첩경인 과정이라고 해서 우리가 실행해온 것이고, 결코 38선이라는 것을 영영 승인해서 우리만으로 정부를 수립하고 우리만으로 헌법을 제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중략) 오늘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를 제정하는 것을 모름직이 전 민족의 의사를 전부 합해서 우리가 다 같이 희망하고 찬성하는 국가(國歌) 국기(國旗)를 제정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중략)

그러므로 이 동의안은 남북이 완전히 통일되어서 삼천만이 전부가 대표를 보내서 한 의사당에서 논의할 그때까지 보류할 것을 동의하는 것입니다.

(재청합니다, 3청합니다 등 의견 수합)

부의장 김약수 : 표결에 부치겠습니다. 국가(國歌) 국기(國旗) 제정에 관한 건의안은 보류하자는 동의가 들어왔고, 따라서 성립이 되었습니다.

정광호 의원 : 그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조건이 완성되기까지 이러한 것을 보류한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구속당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역사적 진전이 우리 의도의 상상 밖의 것이 안 온다고 누가 보장할 것입니까? 그 구속된 동의는 할 필요가 없이, 다만 여기 처음 건의안을 부결시키면 그 효력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보기에는 그 건의안이 지금 부결될 공기가 보이니까 앞의 건의안을 철회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동의는 말하자면 성질상 되지 않았고, 동의가 성립이 되었다 하더라도 동의 제출하신 분으로서 철회하시기를 바랍니다.

부의장 김약수 : 철회라든지 부결이라든지 또 보류니 하는 것은 성격이 좀 다른 것이올시다. 그러나 지금 보류동의가 성립된 것인 만큼 원의에 묻겠습니다.

이주형 의원 : 이 건의안을 결정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보류동의를 제출했던 것인데, 그러나 지금 정광호 의원의 말씀이나 그 외의 다른 의원들 의견을 들으니 보류동의는 낼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하므로 보류동의는 철회합니다.

부의장 김약수 : 그러면 지금 그 보류동의는 철회된 것이올시다.

정균식 의원 : 그 건의안을 철회합니다.

부의장 김약수 : 국가와 국기에 관한 건의안은 철회하겠다는 의견입니다. 그것을 찬성합니까? 이 철회에 있어서도 이때까지 기록이 되어온 만큼 가부로서 표결할 밖에 없습니다. (거수표결한 후)

재석 133, 가(可) 121, 부(否) 한 표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철회된 것을 선포해 드립니다.

국회 속기록을 다소 길게 인용한 바, 요약하면 1948년 9월 9일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제61차 본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의결했다.

지금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를 새로 제정하는 것은 결국 통일에 지장을 주어 분단을 영구히 할 우려가 있으므로, 적당한 시기에 남북 전 민족의 의사로 제정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통일될 때까지 논의를 보류하기로 한다.

이처럼 1948년 정부수립 당시부터 국가(國歌)를 새로 제정해야 된다는 일부 여론이 있었으나 남북통일 뒤로 미루자는 국회의 결의에 의해 국가(國歌) 제정은 보류되고, 기왕에 불려오던 '동해물과 애국가'를 국가(國歌)에 준하여 또는 국가(國歌)를 대행하여 잠정적으로 부르기로 한 것이 오늘날까지 70여 년 동안 관행적으로 이어져 왔던 것이다.

다만 앞서 말했듯 바로 직전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맞추어 '올드 랭 사인'이 남의 나라 민요인 탓에 한국 사람 안익태가 작곡한 곡조로 교체해서 부르게 됨으로써, 이후 안익태 곡은 국가(國歌)를 대행한 '동해물과 애국가'의 곡조로 채택되어 독점적 지위를 갖게 됨으로써 오늘날의 관행에 이르게 된 것이다.

2. 분단시대 대한민국의 국가(國歌) 제정 논쟁

1) 1960년 4.19혁명 직후의 국가(國歌) 논쟁

새로운 애국가 또는 새 국가를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다시 표출된 시기는 4.19 직후였다.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리고 자유의 숨통을 튼 4.19혁명은 정치·사회 제반 문제와 더불어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였다. 현행 '애국가'에 관해서도 지식인 학자 예술가들의 견해들이 여과 없이 드러났는데, "보우니 공활이니 하는 가사가 너무 어렵다", "부르면 기뻐지는 희망찬 가사와 곡으로 바꿨으면 좋겠다"는 등의 다양한 불만들이 표출되었다.

1960년 9월 제5대 민의원이 개원되자 김영삼 박준규 김재순 등 민주당 신·구파 젊은 의원들은 "애국가는 국가(國歌)도 아니고 가사 또한 좋지도 않다"고 평가절하하며 전근대적 유산을 청산하는 과제의 하나로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공동 발표하기도 했다.

사실 1960년의 4.19는 국정(國政) 체제에 커다란 변혁이 예견되는 혁명적 상황이었으므로, 국기(國旗)와 국가(國歌) 등 국가상징 체계를 교체하자고 하는 주장이 국민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시기였다. 그해 11월 국회 문교위원 유청(민주당) 의원은 문교부 장관에게 국기와 국가 등을 고칠 의향이 있는지 질의하였고, 문교부 장관은 국무회의에서 논의하겠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 자료3. '國旗·國歌·國花의 改替論', <경향신문> 1960년 11월 6일 자 기사.



그러나 다음 해인 1961년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파괴가 오면서 국가(國歌) 개체론(改替論)은 동력(動力)을 잃고 말았다.

2)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 사이비(似而非) 국가(國歌)의 등장

그런데 1964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연장인 제3공화정 시절, 국가상징(國家象徵=國旗·國歌·國花)에 대한 국민들의 견해와 수정 의사를 묻는 설문조사가 행해졌다. 이때 행해진 국가(國歌) 관련 설문 내용 중 핵심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자료4. '어떻게 고쳐야 하나-國旗·國歌·國花에 대한 意見', <경향신문> 1964년 2월 11일 자 기사.

①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가 국가라고 생각하십니까?

② 달리 국가가 만들어진다고 하면 그 가사며 곡조는 어떻게 강조되기를 원하십니까?

설문조사의 결과가 다소 의외인데, 먼저 애국가가 국가(國歌)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국가(國歌)가 아니라는 응답이 52%, 국가라는 응답이 26%였다. 그리고 국가(國歌)를 새로 제정하자는 응답이 83%, 그대로 부르자는 응답이 15%였다. 국가(國歌)를 새로 제정하자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 것이다.

나는 여기서 박정희 군사정권이 왜 갑자기 뜬금없이 국가 상징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우선 국가(國歌) 관련 설문조사의 질문 내용을 보면, 거의 국가(國歌) 교체의 필요성을 전제하고 답변을 유도하는 기술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박정희 군사정권은 왜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國歌)를 포함한 국가상징(國家象徵)을 교체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끔 유도하려 했을까? 그것은 쿠데타로 잡은 자신들의 정권이 이전과는 다른 '혁명정부'임을, 정통성이 없음에도 마치 정통성을 넘어서는 '혁명정부'인 양 과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의 쿠데타 정권이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화국이 아님에도 자칭 '혁명정부'이자 제3공화국'이라고 표방했던 것이며, 이를 증빙하는 표상으로 국가(國歌)를 비롯한 국가상징(國家象徵)을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시도한 '국가상징을 통한 국민 호도정책'은 그 당시는 설문조사로만 끝났을 뿐 실제로 진행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한 나라의 국가상징을 교체하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혁명적 상황(통일이라든가 체제 변혁이라든가)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 후 삼선개헌에 의한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획책되고 드디어 1972년 종신집권을 향한 '유신'을 선포한 후, 국민의 동의도 없이 뜬금없는 사이비(似而非) 국가(國歌)가 출현하였다. 박정희 자신이 작사·작곡했다는 '나의 조국'이라는 노래이다.

이 노래를 정말로 박정희 자신이 작사·작곡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 국민가 '애국행진곡'을 표절했다는 이 노래에는 '백두산의 푸른 정기' '한라산의 높은 기상' '무궁화꽃' '이 땅을 수호하고' '이 겨레 지켜왔네' '동해의 아침 해' '금수강산' '우리 모두 정성 다해' '길이길이 보전하세' 등 현행 진짜 <애국가> 노랫말의 핵심 단어(key word)가 모조리 들어가 있는 바, 일단 사이비(似而非) 애국가로서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 세대는 젊은 시절 유신체제 하 아침저녁으로 방송을 통해 나오는 그 노래를 지겹도록 들어야 했고 또 팔을 흔들며 강제로 따라불러야 했다. 그러니 그 노래는 사실상 애국가를 넘어선 관제(官製) 국가(國歌)였던 것이다.

3) 1980년대 전두환 폭압 정권에서의 국가(國歌) 제정 논란

1981년 5월 전두환 군사쿠데타 정부는 5.18 광주항쟁 1주년을 맞아 이를 희석시키고자 대규모 문화행사 '국풍81'을 개최했다. 그리고는 이듬해 1982년 10월 국풍81 후속 사업의 일환으로 뜬금없이 '국가제정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학술원 원로회원인 안호상 씨를 위원장으로 한글학자 한갑수 씨 등을 부위원장으로, 작곡가 나운영 씨 등을 전형위원(銓衡委員)으로 해서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하는데, 참가자들의 뜻과는 관계 없이 이 추진은 광주에서의 학살을 거쳐 권력을 장악한 폭압 정권이 '학살정부'를 '혁명정부'로 포장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표방하기 위해 기획한 국가상징(國家象徵) 조작의 일환이었다.

국가제정추진위원회는 1983년 4월 저명인사 5000명에게 새로운 국가(國歌)의 제정 계획을 설명하고 제정 방법 등을 묻는 설문서를 보냈다. 설문서에는 안호상 추진위원장 이름으로 된 제안 취지문이 첨부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현재의 애국가 가사와 곡은 '나라노래'로서는 부적합하다. 가사도 고종 때 국운이 완전히 기울어져 있을 무렵 만들어져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의타적이다. 자유 · 평화 · 화합 · 단결 · 개국이념 등을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국가(國歌) 제정이 필요하다.


▲ 자료5. '국가를 새로 만들자' <동아일보> 1983년 4월 29일 자 기사.



그러면서 국가제정추진위원회가 지적한 현행 '애국가' 가사와 곡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았다.

① 가사의 문제점

∎ 우리나라 국토가 만주까지라는 것을 강조해야 함에도 '무궁화 3천리'로 영토를 한정시켜 일제의 반도사관과 흡사하다.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표현은 소멸적이며 하소연하는 의미다.

∎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표현은 의타적이다.

∎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는 가사는 세계로 뻗어가는 오늘의 기상과는 거리가 멀다.

② 곡조의 문제점

∎ 겨레의 기백이 담겨 있지 않다.

∎ 고유의 리듬이나 장엄 활기찬 면이 없다.

∎ 불가리아 민요와 16소절 중 8소절이 비슷한 서양곡이다.

∎ 당초 안익태가 국가(國歌)가 아닌 환상곡으로 작곡한 것이다.

내 생각에는 국가제정추진위원회가 지적한 현행 '애국가' 가사와 곡의 문제점 자체가 잘못 지적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오히려 위원회 측의 단편적인 지적에 문제점이 더 많아 보인다.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을 피력해보자.

① '무궁화 3천리'는 원래 우리 국토가 만주까지임을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만약 '반도 삼천리'라고 했다면 일제의 반도사관을 연상할 수 있겠지만, '삼천리'는 원래 한반도 2천리와 만주 1천리를 합한 거리이다.

더욱이 현재의 분단 상황과 국경 상황으로 볼 때 만주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을 애국가 노랫말에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지적대로 '무궁화 3천리'가 우리 영토를 한정시킨 것이라면, 우리 영토를 어떻게 표현해야 맞는가? 대안 없는 시비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② 그동안 애국가를 교체하자고 하거나 국가를 새로 제정하자고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특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란 구절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어떤 이는 '극한적인 표현'이라고 질색하기도 하고, 국가제정추진위원회는 이 가사를 '소멸적이며 하소연하는 의미'라고 비판했는데, 이는 우리의 고전문학 또는 한시(漢詩)에 대한 낯섦에서 나온 것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은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라는 고려시대 한시(漢詩)구절을 바탕으로 지어낸 절절한 언어 구사로 대단히 높은 경지의 시어(詩語)이다. 그런데도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심지어 일본 국가의 "작은 돌이 큰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라는 가사와 비교하며 폄훼(貶毁)하기도 하는데, 갑자기 일본인의 사유체계를 따라 문장의 우열을 평가하는 발상이 엉뚱해 보인다.

③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표현이 의타적이라는 주장 역시 너무 단순한 사고(思考)이다. 보우(保佑)라는 단어가 잘 쓰이지 않는 단어라 생경한 느낌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보우(保佑) 또는 보호(保護)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에게 기대려는 의타적인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자주(自主) 자립(自立)하려는 굳은 의지와 의욕을 실천해 나가면 신(神)의 가호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구절은 기독교적인 것만이 아니고, 천신(天神)신앙이 넓고 깊게 퍼져있는 우리 겨레에게 혁명의 성공을 믿게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④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는 가사가 세계로 뻗어가는 오늘의 기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도 단순 즉흥적인 사고(思考)일 뿐이다.

노랫말을 지은 도산 안창호 선생 자신의 말을 빌리면, 소나무는 우리 겨레의 조상이 한해(瀚海=바이칼호)를 거쳐올 때부터 1만여 년 동안 우리 겨레와 함께 살아온 영원한 반려자로 여겨온 나무이다.

도산 선생은 봉래산 제일 봉의 낙락장송으로 읊지 않고 남산 위의 소나무로 읊은 것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남겼다.

우뚝 솟은 것을 내걸면 영웅주의와 세력 싸움을 촉발해 항일투쟁보다 내부 감투투쟁에 더 열중할 우려가 크디. 그래 올망졸망한 남산이 모이는 것이 바람직하디. 많은 사람의 마음을 모아야 할 때 나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교오벽(驕傲癖)이 끼어들면 판이 흐려지는 수가 있어.

물론 시대가 다르고 세상이 바뀐 것이 있겠지만, 그만한 애국적 삶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그 시대 상황의 긴박함과 당사자의 간절한 충정을 고려하지 않고 현재의 시점에서 일방적 · 편향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다.

⑤ 다만 곡조의 문제점에 있어 "안익태 곡조에 겨레의 기백이 담겨 있지 않고 고유의 리듬이나 장엄 활기찬 면이 없다"는 지적만큼은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불가리아 민요와 16소절 중 8소절이 비슷한 서양곡이라고 지적함으로써 표절 가능성을 거론한 것은 매우 타당하다.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각이 밝혀지기 전에도 이미 안익태 애국가 곡조를 바꿔야 하는 이유는 안익태의 음악성 결여(缺如)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였다.

⑥ 애국가 곡조가 당초 안익태가 국가(國歌)가 아닌 환상곡으로 작곡한 것이라는 지적은 전혀 잘못된 정보이다. 1935년 말 안익태는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해서 애국가를 먼저 작곡하였고, 그 후 1938년 코리아환상곡을 작곡·연주할 때 그 애국가 곡조를 원용(援用)해서 교향곡의 4악장을 만든 사실이 있다.

그런데 이렇듯 국가제정추진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하자 한국기독교계 일각(一角)에서 항의하고 나섰다.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는 기자회견을 갖고 "최근 일부 인사들이 '국가제정추진위원회'를 결성해 현재의 애국가 대신 새로운 국가를 제정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반발하면서 즉각 중지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들은 "애국가는 지난날 일제의 탄압과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 속에서 우리 얼을 지키며 불러온 애환이 담겨있는 민족의 국가(國歌)로 특히 전 국민의 화합과 단결이 요망되는 이 때에 국가 제정이란 불필요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반국가적 행위로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자료6. '"새 국가 제정운동 중지를" 기독교지도자협의회 성명', <경향신문> 1983년 5월 3일 자 기사.



기독교계는 현행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안창호인지 윤치호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보우하사'라는 가사가 들어있는 현행 '애국가'가 초기 기독교계의 수확(收穫)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현행 '애국가'를 교체하는 것이 기독교계의 수확을 회수(回收)당하는 것"이라는 조금은 빗나간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향후에도 '애국가' 교체 논란에 있어 상수(常數)로 작용하는 문제이다.

또 하나 문제는 국가제정추진위원회가 당시 충분한 고찰 없이 발설한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지적(指摘) 내용이 그 후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정설(定說)인 양 받아들여져 분별없이 재인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애국가 노랫말에 대한 이 같은 과도한 현상이 현행 애국가의 작사자를 친일 민족반역자 윤치호로 잘못 알고 있는 데서 생겨난 오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우리의 현행 애국가 노랫말은 100여 년 전에 지어진 가사이므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시대적으로 안 맞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우리 선조들의 피어린 고뇌와 뼈저린 애국심을 상기한다면 그러한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비판이 얼마나 무례한 결과를 낳고 있는지 다시금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든 1983년의 '국가제정추진위원회'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별로 한 일 없이 활동을 마감하였다. 5000명에게 의뢰한 답신 결과도, 통계에 의한 결과보고서도 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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