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에 출간된 이 책의 서평을 쓰기 위해 4개월을 기다렸다. 왜 기다렸는지를 말씀드리면서 이번 글을 시작하려 한다.
<한국일보> 2019년 5월 7일자 1면에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지옥고 아래 쪽방] <상> 누가 쪽방으로 돈을 버는가'(☞바로 보기)이다. 한국의 몇몇 부자들이 서울 곳곳의 쪽방촌 건물을 대량으로 사들여서는 대를 이어가며 빈민들을 착취하는 실상을 폭로한 기사였다. 나중에 듣기로 저자인 이혜미 기자는 협박 전화도 적잖이 받았다고 한다.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다. 노숙자보다 간신히 상황이 나은 사람들에게, 인간을 머물게 하는 공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설비도 놓지 않고, 평수로 계산하면 웬만한 아파트보다 더 비싼 돈을 받아온 저들의 "쪽방 비즈니스"가 드러났으니 말이다. 건물주가 설치해야 할 최소한의 설비도 하지 않아서 구청이 국민 세금으로 이들 쪽방촌의 설비를 갖추어주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사회에 실제적으로 피해를 끼치는 "약탈적 임대행위"(59쪽)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18년 11월 9일 서울 청계2가와 3가 사이에 자리한 국일고시원에서 발생한 화재가 발단이 되어 이 시리즈를 구상하게 된 이혜미 기자는, 우선 쪽방촌 주민 취재에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웬만한 기자라면 사회부에 배치되었을 때 한 번씩은 다 하게 되는 일이다. 사건이 발생하거나 연말연시・명절 때가 되면 쪽방촌 관련 기사가 언론에 작게 다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실 터이다. 필드 워크로서 쪽방촌을 선택한 인류학자들도 비슷한 성격의 취재 작업을 한다. 이혜미 기자의 취재가 이런 작업들과 구분되어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그가 시간을 들여 서울 전체 쪽방의 등기부등본을 확인해 쪽방촌의 구조적인 문제를 폭로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혜미 기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 쪽방촌과 서울 영등포구의 영등포역 서쪽 쪽방촌을 여러 차례 답사했다. 창신동 쪽방촌은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서울 동대문-마장동-왕십리-뚝섬유원지・광나루 간을 운행한 경성궤도, 속칭 기동차의 시발역이었다. 사람들은 식민지 시대의 경성이라고 하면 흔히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전차를 떠올리지만, 종로6가에서 전차를 내린 경성 시민은 동대문을 지나 지금의 동대문 관광호텔 자리에 있던 역에서 기동차로 갈아타고 뚝섬유원지로 놀러가거나 광나루에서 내려 한강 너머의 강남, 오늘날의 천호동으로 건너갔다.
이렇게 식민지 시대부터 번성한 기동차 시발역 부근에는 당시 유행한 개량한옥, 속칭 '집장사집'이 많이 지어져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20세기의 유산인 개량한옥과 청계천변의 상가아파트, 그리고 이명박 전 시장이 청계천을 복원한 후에 이곳저곳의 옛 블록을 헐고 올라가고 있는 고층아파트단지는 내가 말하는 삼문화광장(Three Cultures Plaza)을 형성한다. 오세훈 전 시장이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개관한 후, 이 건물이 동대문의 역사적 경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각에서 제기된 적이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조선시대의 이간수문・오간수문, 식민지 시대의 경성운동장과 개량한옥, 20세기 후기의 상가아파트와 21세기 초의 고층아파트단지 사이에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동대문 일대의 역사적 지층, 즉 시층(時層)을 이루는 훌륭한 일원으로 보인다.
이렇듯 동대문 동쪽 지역의 경관 구성에서 개량한옥이 중요한 요소이다 보니, 기동차가 운행하던 옛 길을 답사할 때면 반드시 옛 길 주변의 개량한옥 단지를 한두 군데 들르게 되고, 그때마다 그곳에 사는 주민을 스쳐 지나가고는 한다. 어떤 지역을 진정으로 답사하려면 그곳의 주민로부터 이야기를 들어야 하겠으나, 뚝섬・광진교까지 뻗어있는 기동차길을 주파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는 한다는 핑계로 언제나 그러한 의무를 소홀히 하고는 했다. "그런 심층조사는 기자들이 해야 하는 것이고, 나는 그런 조사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으니까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는 거지"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이렇게 늘 지나치는 창신동 개량한옥 단지 즉 쪽방촌에 사는 주민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산더미 같은 등기부등본을 헤집으며 그곳의 본질적 구조를 파헤쳐낸 이혜미 기자에게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던 차, 어느 날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취재 전후 상황을 정리해서 책으로 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의 기사를 감동적으로 읽었던 터라, 신뢰할 수 있는 출판사의 편집장께 주저 없이 소개를 드렸고, 그 뒤로 출판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이 책이 출간되자 그 가치를 알아 본 독자들 및 정부・서울시의 관계 기관들이 꾸준히 구입해서 읽고 공부하고 주변에 소개한 덕분에, 3개월 사이에 3쇄를 찍었다고 한다. 경영・실용 분야나 문학 분야가 아닌, 정치/사회 분야에 속하는 책이 이렇게 스테디셀러가 되는 일은 쉽지 않다. 게다가 이번에는 교보문고 '2020년 상반기 좋은 책의 재발견'(☞바로 가기) 투표에도 후보로 올랐다고 하니, 비록 내가 쓴 책은 이런 영광을 누리지 못했지만, 이 책의 출판을 주선한 사람으로서 참 기쁘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이혜미 기자는 빈민과 빈곤 비즈니스를 파헤침으로서 자신의 명성을 날리기 위해 이 취재를 하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니었다. 테마는 무겁지만 한 번 책을 펼치면 그 자리에서 끝까지 읽히는 이 책을 한 번만 보시면 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리라 믿는다.
사족 또 하나. 창신동 어느 쪽방에는, 방주인 박 씨가 길에서 주웠다고 하는 <가난의 시대: 대한민국 도시 빈민은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책이 꽂혀 있다고 한다(31쪽). 딱 일 년 전에 이 서평 코너에서 최인기 선생의 이 책을 소개했다(☞바로 보기: 서울 도시 빈민을 기록하는 사람들의 계보). <한국일보>에 기사가 나간 뒤에 다시 이혜미 기자와 만난 박 씨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생각하질 못해요... 동네 사람들은 그 기사를 싫어할 수밖에 없지. 아가씨가 왜 그렇게 썼는지도 나는 이해해요"(119쪽)라고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이혜미 기자는 "박 씨는 '무학 無學'이다. 현명하다는 건 학력이 높고 사회에서 번듯한 지위를 가져야만 갖출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박 씨의 이 문장에, 학력과 관계없이 개인은 잠재력이 있고 세상에 대한 인식은 계속해서 확장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박 씨를 1.5평 쪽방에 20년 동안 가둬버린 것은 우리 사회의 잘못이자 손실이다"(119쪽)라고 적으며 쪽방촌 취재편을 마무리한다.
양명학을 시작한 왕양명이 바깥에서 돌아온 제자 왕여지에게 "무엇을 보았나?"라고 묻자, 왕여지가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모두 성인이었습니다(見滿街人都是聖人)"라고 답했다는 말이 있다. 시민 박 씨는 이혜미 기자가 서울 거리에서 만난 성인이다. 일 년 전에 소개한 최인기 선생의 책과, 그로부터 일 년 뒤 소개하는 이혜미 기자의 책이, 내가 만난 적 없는 서울 거리의 성인인 박 씨를 통해 이어졌다는 느낌은 나에게 작은 전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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