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원양어선과 연근해어선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심각한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하루 평균 17시간 일하면서도 한 달 임금은 60만 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현대판 노예제도'가 먼 바다 위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선원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네트워크) 등 4개 시민사회단체는 8일 서울 종로구 걸스카우트 빌딩에서 '한국 어선에서 발생하는 외국인 선원 인권침해 및 불법 어업 실태'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국 원양어선에서 조업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현대판 노예제도'라 불릴 수준의 심각한 인권 침해에 시달린다'고 밝혔다.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주립대는 2018년 상위 25개 수산국의 참치 연승선의 조업형태를 분석한 결과 한국 국적선이 항해 거리, 항해 시간, 조업시간에서 1위를 나타냈고 항구와의 최대 거리는 2위로 열악한 조업환경이라고 분석했다.
네트워크는 불법어업과 인권유린이 함께 발생하고 있어 정부에 국제 어선원 노동협약(ILO 188) 비준과 입항하는 한국 국적 선박에 대해 노동 검색을 포함한 항만국 검사를 의무화할 것으로 요구했다.
해상 조업시간·항해시간 세계 1위...한달 임금은 60만 원 수준
네트워크는 공익법센터 어필과 환경정의재단이 2016~2019년 한국 원양어선에서 일했던 이주노동자 54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소개했다. 2018년 기준 원양어선 선원 5247명 중 3850명(73.3%)이 이주노동자다.
조사결과, 한국 원양어선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최저임금을 받으며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지난 2018년 기준 한국 참치잡이 연승선의 해상 조업시간과 항해시간 등은 세계 1위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관계 기관이 2016~2019년 한국 원양어선에서 일했던 54명의 이주 어선원을 인터뷰한 결과 이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6.9시간에 달했다. 응답자 대부분(96%)이 하루 12시간 이상 일했고 절반 이상(57%)이 하루 18시간 이상 일한다고 답했다. 하루 20시간 이상 일한다고 답한 사람도 26%에 달했다. 이들 중 65.5%는 수면시간을 포함한 휴식시간이 6시간 이하라고 증언했다.
고강도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이주 어선원의 41%는 한 달 임금으로 500달러(약 60만 원)도 받지 못한다고 답했다. 원양어선의 경우 한달 55만 원도 못 받는 이주 어선원이 4분의 1 이상으로 조사됐다. 특히 응답자 중 72%가 출신국가에서 한국으로 들어올 때 드는 비용을 직접 부담했는데, 이 비용이 월급에서 공제되는 경우가 많아 실제 수령액수는 이보다 훨씬 적은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한국인 어선원의 월급은 2018년 기준 516만 원 정도다.
차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획물 판매이익을 선원들이 나눠 갖는 수당인 '보합제'가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김종철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는 "이주 어선원의 노동시간에 법적인 제한이 없어 심각한 노동 착취가 벌어지고 있다"며 "초과근무 수당도 전혀 없어 장시간 노동의 대가가 한국인 어선원과 선주에게만 돌아간다"고 밝혔다.
여권·외국인등록증·급여통장도 뺏겨
공익법센터 어필과 환경정의재단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이주 어선원들은 장시간 노동과 차별적이고 낮은 임금, 폭행 및 폭언 등 착취와 학대를 당하면서도 배를 떠나지 못하는 구조에 빠져있다.
이주 어선원들은 한국인 선장·부선장·항해사·갑판장 등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거나 욕설을 듣는 경우가 일상적이었다. 한국어를 배운 적은 없어도 욕은 할 수 있을 정도다. 아파도 적절한 치료 없이 쉬지 못한 채 계속 일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간담회에서 상영된 <바다에서 붙잡히다>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한 인도네시아 출신 선원은 "오징어 철에는 7개월 동안 30시간 연이어 일하고 2시간 자는 생활을 반복했다"며 "한국 사람에게 스크루 드라이버로 머리를 맞으며 자주 욕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들이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계속 일을 하는 이유는 바다라는 특성도 있지만 거의 모든 선원들이 비싼 이탈 보증금을 인력업체에 낸 데다 선장이나 업체에 여권을 압수당했기 때문이다.
오세용 경주 이주노동자센터 소장은 "대부분의 선원이 선장이나 인력 송출업체에 여권과 외국인등록증, 급여 통장을 뺏긴다"며 "배를 탄 뒤 3개월 동안의 월급을 이탈 보증금으로 내게 해 재정적으로 사람을 배에 묶어둔다"고 지적했다.
오 소장이 공개한 사진 자료에 따르면 이주 어선원들은 컨테이너나 낡은 가옥에 11명 이상이 함께 살고 있었다. 식사로는 쌀과 달걀만 제공되고 있었다.
네트워크, "정부가 개입해 인권침해 근절해야"
네트워크는 이주 어선원에 대한 최저임금 차별 철폐와 휴식시간 보장, 여권 압수 관행 근절 등을 촉구했다. 유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위원회(UN CESCR)도 2017년 한국정부에 이주 어선원 착취를 조사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미국 정부 역시 2012년부터 <인신매매보고서>를 통해 한국 어선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신매매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 하고 있다.
네트워크는 "국제법에선 이러한 인권침해를 인신매매로 규정하고 '현대판 노예제도'라고 비판한다"며 "선원에게 휴식시간을 보장하고 최저임금을 적용하는 등 국제 어선원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한 노동협약을 비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트워크는 국내 선박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를 근절하기 위해 △이주어선원에 대한 최저 임금 차별 철폐 △어선원에 대한 휴게 및 휴일 보장 △여권 압수 관행 근절 △정부가 개입해 이주어선원 송출비용 책임 제거 △권리 구제를 위한 핫라인 구축 등의 개선사항을 제안했다. △선박 해상 체류 기간 6개월로 제한 △선박 복귀시 노동 검색을 포함한 항만국 검색 의무화 △선박위치추적장치 송수신 주기를 30분으로 단축 △전자 모니터링 체계 구축 등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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